'No!'라고 말할 줄 아는 용기

-사랑과 이타적이 자세에만 연연해하다 결과적으로는 자신의 한계와 범위를 잊어버릴 때가 많다.

-스스로 상처를 받으면 받았지, 거절해서 남에게 상처줄 수 없다는 생각으로 살아간다.

-예수의 '아니오'는 변덕스러운 감정의 표현이 아니라, 더 크고 본질적인 '예'를 지키기 위한 거룩한 경계선이었다.

▲ AI 이미지 (제공: 중동디스커버리신문)

"아니오(No)."

 

세상에서 가장 짧은 단어 중 하나지만, 우리 입술에서 가장 무겁게 맴도는 말이다. 특히, 신을 믿는 '기독교인'이라는 정체성을 삶의 중심에 두고 살아가는 이들에게, 이 한마디는 천근만근의 무게를 지닌다. 

 

왜냐하면, "서로 사랑하라"는 대계명을 받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가르침을 따르며, "오른뺨을 맞으면 왼뺨도 돌려대라"는 비유 속에서 자기를 부인하는 미덕을 배웠기 때문이다.

 

이 숭고한 가르침 속에서 종종 하나의 함정에 빠진다. 그것은 '사랑'과 '희생'을 '자신의 한계를 지우는 것'과 동일시하는 오류다. 나보다 남을 배려해야 한다는 강박, 타인에게 상처를 주어서는 안 된다는 선한 의지가 뒤엉켜, 정작 자신의 영혼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와 한계를 잊어버린다. 

 

내가 상처받고 소진되는 한이 있더라도, 나의 거절로 인해 상대방이 겪을 실망감이나 상처를 견딜 수 없다는 생각. 이것이 우리를 '아니오'라고 말하지 못하는 굴레에 가둔다.

 

헨리 클라우드와 존 타운센드가 그들의 저서("No라고 말할 줄 아는 그리스도인")에서 통찰했듯이, 이는 '바운더리(Boundary)', 즉, 경계의 상실에서 비롯된다. 바운더리는 단순히 타인을 밀어내는 이기적인 벽이 아니다. 그것은 '나'라는 존재가 어디까지 책임질 수 있는지를 명확히 하는 건강한 '책임의 울타리'다. 이 울타리가 무너질 때, 우리는 타인의 삶의 무게까지 불필요하게 짊어지게 된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혹은 신앙을 기반으로 한 일터에서 이 문제는 더욱 첨예하게 드러난다. 선한 목적을 위한 사역과 헌신의 요구 앞에서 '아니오'라고 말하는 것은 곧, 믿음이 부족하거나 사랑이 없는 사람으로 비칠까 두렵다. 우리는 끊임없는 '예(Yes)'를 통해 자신의 선함을 증명하려 애쓴다. 그러나 그 결과는 무엇인가?

 

자신의 한계를 넘어선 헌신은 결국, 영혼의 방전(Burnout)을 가져온다. 기쁨으로 시작했던 섬김은 원망과 분노로 변질되고, 사랑해야 할 대상은 어느새 피하고 싶은 부담이 된다. 

 

더 심각한 문제는, 우리가 '아니오'라고 말하지 못할 때, 상대방의 건강한 성장마저 가로막는다는 사실이다. 나의 무분별한 '예'가 타인의 의존성을 키우고, 그들이 마땅히 져야 할 책임의 무게를 대신 짊어줌으로써 그들을 미성숙한 자리에 머무르게 한다. 이것은 사랑이 아니라 '해로운 도움(Enabling)'이다.

 

우리는 가장 완벽한 사랑의 모델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다시 깊이 들여다보아야 한다. 그분은 무한한 사랑과 긍휼의 소유자였지만, 모든 요구에 '예'라고만 답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자신의 사명과 때를 정확히 아셨고, 그것을 방해하는 요구에는 단호히 '아니오'라고 말씀하셨다.

 

군중의 열광적인 요구 속에서도 홀로 산에 올라 기도하시며 자신의 시간을 지키셨다(마 14:23). 그것은 군중을 향한 '아니오'였고, 하나님을 향한 '예'였다. 자신을 정치적 메시아로 만들려는 이들의 기대를 거절하셨고, 심지어 가장 사랑하는 제자 베드로가 십자가의 길을 막아설 때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마 16:23)라고까지 엄중히 말씀하셨다. 

 

그분의 '아니오'는 변덕스러운 감정의 표현이 아니라, 더 크고 본질적인 '예'—즉,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를 지키기 위한 거룩한 경계선이었다.

 

그분의 사랑은 모든 것을 수용하는 무기력한 관용이 아니었다. 때로는 아프게 책망하고, 단호하게 거절하며, 상대가 스스로의 몫을 감당하도록 기다리는 '강인한 사랑(Tough Love)'이었다.

 

'아니오'라고 말할 줄 아는 용기는 이기심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첫째로, 나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는 '정직함'에서 나온다.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신이 아니라, 유한한 시간과 에너지를 가진 한 명의 인간임을 겸손히 고백하는 것이다.

 

둘째로, 그것은 '책임감'에서 나온다. 하나님이 내게 맡기신 고유한 삶의 영역(가정, 건강, 핵심 사명)을 먼저 지켜낼 책임이 나에게 있음을 아는 것이다. 내가 먼저 건강하게 서 있지 못하면, 그 어떤 선한 일도 지속할 수 없다.

 

셋째로, 그것은 '진정한 사랑'에서 나온다. 상대방의 순간적인 실망을 감수하더라도, 그가 스스로의 문제를 직면하고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진짜 사랑임을 믿는 것이다. 나의 '아니오'가 때로는 상대방에게 가장 필요한 선물일 수 있다.

 

우리는 거절이 관계의 끝이라고 지레 겁먹는다. 하지만 건강한 관계는 솔직한 '아니오'를 수용하고 존중하는 토대 위에서 더욱 깊어진다. 나의 '아니오'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떠나는 관계라면, 그것은 애초에 사랑이 아니라 일방적인 이용이나 의존이었을 뿐이다.

▲ AI 이미지 (제공: 중동디스커버리신문)

'아니오'라는 말을 두려워하지 말자.

 

우리가 '아니오'라고 말해야 할 때 침묵하는 것은, 사실 우리 자신에게 가장 잔인한 '아니오'를 외치고 있는 것과 같다. 나의 영혼을 향해, 나의 건강을 향해, 나의 가정을 향해,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나의 본질적인 부르심을 향해 '아니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수많은 '예'를 남발하며 공허한 울림을 만드는 삶이 아니라, 무게 있는 '아니오'를 통해 나의 '예'를 진실하게 만드는 삶을 선택해야 한다. 

 

우리의 '예'가 진정 '예'가 되고, '아니오'가 '아니오'가 될 때 (마 5:37), 우리는 비로소 위선과 소진의 굴레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설 수 있다.

 

'아니오'라고 말하는 것은 사랑이 없는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가장 정직하고, 가장 책임감 있으며, 가장 용기 있는 사랑의 또 다른 표현이다. 

 

오늘, 당신의 삶에서 진정한 '예'를 지키기 위해 단호하게 '아니오'라고 말해야 할 영역은 무엇인가. 그 거룩한 용기를 내는 것이야말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가장 뜨거운 도전이다.
 

작성 2025.11.03 12:09 수정 2025.11.03 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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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