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필의 인문학여행] 이스탄불의 新和

로마의 천년고도

이스탄불에서 로마 3제국의 종말을 본다. 로마 3제국은 서로마, 동로마(비잔틴) 신성로마의 2,000년이란 방대한 역사를 가진 나라이다. 서로마(BC509~AC476년)는 밀라노, 라벤나에 수도를 두었고. 동로마 비잔틴(AC479~1157)은 콘스탄틴노풀에 수도를 두었고 신성로마(AC1184~1457년)는 콘스탄틴노플에 수도를 둔 제국이었다. 그런 대제국이 이슬람의 오스만 튀르크에게 망하여 사라졌다. 그런 의미에서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은 로마와 오스만을 이은 천년고도였다.

 

 동서문화의 충돌과 화합의 이스탄불

 

이스탄불에서 카톨릭과 이슬람의 충돌과 동서문화의 화합과 창조의 역사를 본다. 이곳은 숱한 종교와 인종의 갈등으로 수많은 전쟁을 치르면서 당당한 제국으로 명맥을 유지하였다. 이스탄불에서 수많은 국가가 태어나고 망하는 인종과 종교의 이합집산에서 찬란한 문명과 문화를 꽃피웠던 힘은 과연 어디서 나왔을까? 그 바탕엔 뿌리 깊은 그리스 문화와 로마 문명이 오스만에 의해서 동서양 문화가 화합하는 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스탄불은 마케도니아의 헬레니즘 문화와 로마 비잔티움 제국의 황금기를 맞았던 곳이다. 그러나 위대한 제국도 11세기에 셀주크 튀르크의 침략을 받고 13세기에는 십자군에게 약탈당해 쇠퇴기를 맞아 14세기에 세르비아, 소아시아의 오스만 제국, 이탈리아 공화국에 위협을 받아 휘청대다가 1453년 오스만 튀르크 제국에 의해 정복당하면서 찬란한 황금기를 끝냈다.

 

서로마제국은 BC 509년에서 AC 476년까지 유지하였고 동로마제국(비잔틴제국)은 서기 324년 동로마의 콘스탄티누스 1세가 아나톨리아의 니코메데이아에서 보스포러스 해협의 비잔티온(콘스탄티노폴리스)으로 천도하여 ‘동로마제국’이라 불렀다. 동로마 비잔틴제국은 서기 330년부터 1453년까지 1123년 동안 존속했던 대제국이었다. 

 

1184년 독일을 바탕으로 신성로마제국이 탄생하여 연륜을 더한다. 신성로마제국은 유럽에서 가장 큰 영토를 가진 막강한 전제 군주 국가로 구 로마 제국의 고토에 버금가는 광활한 지중해를 통합하였고 튀르크, 중동에 진출하였다. 따라서 수도인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아시아와 유럽, 흑해, 에게해의 모든 무역 중심지로 전 세계 부의 3분의 2가 집중하였던 부강한 나라였다. 

 

역사는 기필코 바뀐다는 진리 앞에 영원한 제국은 없다. 융성한 비잔티움 제국도 페르시아의 사산 왕조의 침략을 받아 영토를 잃기 시작했고 다시 10세기 말에 마케도니아의 황조가 국력을 회복하여 동지중해의 패권국이 되어 파티마 왕조와 대결하였으나 1071년 제국의 심장부인 소아시아 대부분을 셀주크 튀르크 세력에게 잃었고 12세기에 콤네노스 황조가 영토를 어느 정도 회복하였으나 제국은 점점 쇠퇴기로 접어들어 1204년 제4차 십자군이 수도를 점령하여 제국의 영토는 비잔티움 그리스인과 라틴인의 각축장이 되었다. 

 

1261년에 팔라이올로고스 황제가 정권을 탈취하여 비잔틴제국을 재건했으나 14세기 후반 내전을 거듭하다가 1453년에 오스만제국의 침입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는 함락되고 비잔티움 제국은 완전히 멸망하였다.

 

이스탄불의 역사와 문화 기행

 

노을이 물드는 시각에 이스탄불항에서 쿠루즈를 타고 보스포러스 해역을 유람하는 관광 역사문화 기행은 동서문화를 한눈에 볼 수 있다는 의미를 가진다. 보스포러스 해는 이스탄불을 동서로 가로 나누는 해역으로 동양과 서양으로 가른다. 동쪽의 구도시는 동양이고. 서쪽의 신도시는 유럽이다. 

 

이스탄불은 1,200만의 인구의 튀르키예 경제문화의 중심도시로 동서문화와 종교 역사가 집약되어 충돌하고 화합하는 요충지로 엄청난 역사적 사건과 사료가 잔재해 있었다. 자연적으로도 아름다운 자연경관인 흑해와 보스포루스 해. 마르마다 해, 다르다넬스 해, 에게해로 접하는 해양문화의 요충지이며 예부터 베네치아와 쌍벽을 이룬 해양문화가 발달한 도시였다. 이곳은 서양과 동양이 걸쳐있고 그리스의 아테네와 스파르타 도시 국가에서 알렉산더 대왕의 마케도니아 헬레니즘 문화를 번성시켰으며 로마와 신성 로마 제국과 오스만제국의 수도이다.  

 

크루즈를 타고 보스포러스 해를 돌아보며 동서문화와 해양 도시 문화가 이룬 풍경이 아름답다. 보스포러스 대교가 동서로 가로놓여 아시아와 유럽을 연결하는 역사의 헤게모니를 느껴 보았다. 크루즈는 천천히 보스포러스 대교 밑으로 물살을 가를 때 가슴 찡한 환희를 느꼈다. 이 해역은 숱한 전쟁의 비극을 안은 해역으로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이 동방정복을 나갔던 곳이며 로마의 천년 수도이며 십자군의 8차 전쟁과 오스만 튀르크의 영토 확장 전쟁 등 수많은 전쟁을 치렀던 해협이었다.

 

안테미우스 성벽이 무너지면서 로마는 최후를 맞다.

 

멀리 동쪽으로 도시 해안을 둘러싼 로마의 육중한 성벽을 바라본다. 난공불락의 안테미우스 성벽이 오스만의 함포 한 방에 무너졌던 콘스탄틴노플의 최후의 순간을 회상하였다. 철옹성이 한순간에 무너지면서 비잔티움은 오스만 튀르크의 지배를 받게 되었고 카톨릭이 이슬람의 지배를 받는 ‘동로마 최후의 날’이 되고 말았다.

 

배반자가 만든 역사였다. 잘 키운 첩자 한 명이 백만 대군보다 더 낫다. 오스만의 마호메트 2세가 로마의 콘스탄틴 대제를 무너뜨리고 대제국을 만들었던 날이 비잔티움 최후의 날이다. 오스만 튀르크가 동로마의 해안 철 성벽인 안테미우스를 함포 한 방으로 무너뜨림으로 비잔티움은 망했다. 

 

비잔티움 제국은 자국의 재상이 첩자 질로 망했다. 1453년 오스만의 마호메트 2세(술탄)가 30만 대군을 거느리고 보스포러스 해안으로 접근하여 함포 한 방을 동로마 콘스탄틴노풀의 안테미우스 성벽을 향하여 쏘았다. 순간 난공불락의 안테미우스 성벽이 무너진 것이다. 무너진 성벽으로 30만 대군이 일제 공격으로 콘스탄틴노풀을 점령해 버렸다.

 

바로 반역자의 농간이 부른 화였다. 콘스탄틴 대제의 재상인 루카스노티라스가 오스만의 메르메트 2세 술탄이 제공하는 황금 공세에 넘어가서 취약점을 알려준 결과였다. 

 

‘성벽에 해안으로 통하는 비상구가 있는데 이 비상구에 함포를 쏘면 문이 열립니다.’ 탐욕이 나라를 망친 결과를 자아냈다. 그런데 메르메트 2세는 강력한 함포를 어디서 구했을까? 아이러니한 역사의 꼬임이었다. 헝가리의 무기상 모오가 화포를 만들 화약을 가지고 콘스탄틴 대제에게로 갔다.

 

“이 화약은 한 개의 성을 무너뜨릴 위력을 가진 화약이니 사세요.”라고 요청했다. 

“우리의 이스탄불 성벽은 백만 대군이 쳐들어와도 무너지지 않은 철옹성인데 그깐 함포쯤이야 새발의 피죠.” 

“이슬람이 로마를 친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함포를 만들어 대비하십시오.”

“염려 마세요. 절대 우리 성은 절대 무너지지 않습니다.” 

 

비잔티움 재상이 이 소식을 듣고 오스만의 술탄인 메르메트 2세를 찾아가서 알리고 화약을 사라고 요청하였다. 술탄은 당장 헝가리 무역상 모오를 불렀다.

 

“내가 그 화약을 사줄 것이니 화포를 만드는 법을 가르쳐 주세요.”

“물론, 화포를 만드는 법을 가르쳐 주겠습니다.”

 

그렇게 화포를 만들어 오스만은 이스탄불의 철옹성을 무너뜨렸다. 무서운 화약이었다. 한방의 화포를 비상구에 쏘아 문을 열고 들어가서 이스탄불을 점령하였다. 마침내 1453년 5월 29일 콘스탄틴 대제가 손을 들었고 2,000년 역사의 로마 제국은 오스만 술탄에게 망했다. 

 

‘한 명의 반역자가 100만의 군대를 이기고 한 사람의 지도자가 나라의 운명을 바꾸었다.’ 

 

전쟁과 여인, 전쟁과 노예. 나라 없는 설움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당해본 사람은 안다. 나라가 없으면 백성이 사라진다. 이스탄불 광장에 펄럭이는 빨간 튀르키예 깃발을 보면서 나라 사랑 정신을 느낀다. 튀르키예인은 선조의 업적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면서 국기에 자부심을 갖고 바라보면서 애국심을 기른다는 것이다.

 

나라 없는 서러움은 정복당한 백성만이 알 수 있다. 역사상 전쟁에서 진 나라의 백성은 가혹하고 혹독한 고통을 당했다. 전쟁은 승자에게도 고통이 따르지만, 패전 국가의 백성과 군주는 노예로 끌려가는 치욕과 여성들은 성폭력에 시달렸다. 그래서 국가와 지도자는 영토를 지켜 백성을 편안하게 살게 하는 책임과 사명감을 가져야 한다. 나라 없는 백성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지도자의 판단이 국가와 민족의 운명을 결정한다는 것을 보스포러스 해역을 돌아보면서 오스만 전쟁에서 비잔티움이 무너지고 오스만이 탄생하는 역사를 볼 수 있었다.

 

로마의 멸망은 십자군 전쟁이었다. 

 

십자군 전쟁은 이슬람과 전쟁이 아니고 교황권 쟁탈전이었다. 이슬람은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카톨릭을 믿는 백성들을 학대하였다. 이에 로마 교황청의 십자군을 만들어 이슬람 국가를 치러 나섰다. 십자군 전쟁은 174년간의 보스포러스 해역에서 치룬 지겨운 전쟁이었다. 제1차 십자군 전쟁부터 제8차 십자군 전쟁까지 천만의 사상자를 냈다. 그 결과 오늘날까지 이슬람과 기독교는 반목과 분쟁을 끝나지 않았다. 승자도 패자도 없는 오로지 피해만 남은 잔혹한 전쟁이었다. 

 

1096년 로마 교황 리처드 1세는 에데사 장군을 앞세워 3만의 군대로 예루살렘 정복에 나섰다. 이슬람은 수니파와 시아파로 나누어져 분쟁하다가 십자군에게 참패를 당했다. (1차 십자군 승) 에데사는 정복한 예루살렘에 십자군 왕국을 세우고 이슬람을 핍박하기 시작하였다. 400만 명의 이슬람인이 학살당했다. 이때 수니파의 장기 장군이 시리아에서 지하드 깃발을 내세워 이슬람을 통일하고 십자군의 에데사 왕국에 대항하였으나 불행하게 장기 장군이 에데사의 부하에게 살해당하면서 참패를 당했다. 

 

장기 장군의 아들 누르 알딘이 이슬람 부흥을 부르짖고 제2차 십자군 정벌 전쟁을 벌인다. 그는 에데사의 십자군 왕국을 함락하고 시리아에 튀르크 왕국을 건설하였다.(2차 이슬람승) 

 

교황 유기니우스 3세는 프랑스 왕 루이 7세를 내세워 3차 십자군 전쟁을 일으키지만 실패하다. (3차 이슬람 승) 그러나 시리아 지도자 누르 알딘이 죽고 그 아들 알사이흐가 12살로 집권하지만 강력한 군주가 되어 수니파 시리아는 시아파 이집트를 점령하고 강력한 이슬람 연방국을 형성하면서 십자군은 기력을 잃고 말았다. 그러나 십자군이 예루살렘 탈환하려다가 엄청난 고배를 마셨다. (4차 이슬람 승) 

 

십자군 전쟁은 기독교 성지인 예루살렘을 회복하려고 치른 전쟁인 줄 알았는데 천만의 말씀이었다. 자세히 알고 보니 십자군은 예루살렘 탈환이란 이름으로 교황청의 권력 강화와 이권 확보와 영토 확장의 전쟁이었다. 십자군 내에서 자국의 이익을 지키는 분쟁이 벌어졌다. 스페인의 레콩기스타군과 동방, 북방, 알비, 사이비 십자군이 영토 확장 침략군으로 변형하였다. 게다가 3차 십자군의 원정은 같은 카톨릭 국인 비잔티움 제국을 치는 전쟁이었다. 

 

십자군의 동방정교와 로마 카톨릭의 피 터지는 전쟁 

 

십자군들이 비잔티움에서 동방 정교회 신자들을 학살하고 약탈하는 바람에 정교회 신자들이 박해를 크게 받았다. 로마 카톨릭은 동방정교도를 이슬람에 동화된 교인들이라고 하기아 소피아 성당에서 엄청나게 동방정교 카톨릭을 학살하였다. 그들의 무례함은 결국 비잔티움 제국에서 동방 정교회와 로마 가톨릭 십자군 기사들의 대립으로 나타났고 1054년에는 동방교회와 로마 서방교회 간의 전쟁이 일어나 결국은 카톨릭은 분열하고 오늘날까지 동방교와 카톨릭은 화합을 못 하고 있다.

 

이스탄불에서 오스만 제국의 번창하다

 

보스포러스 해역을 돌아보면서 튀르키예인들의 자존심이 이스탄불에서 나온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오스만 튀르크 대제국을 만들었던 조상을 숭배하고 그 정신이 강한 애국심으로 나타났다. 튀르키예는 기원전 1700년 아나톨리아 왕조에서 6세기 아케베네스 왕조, 4세기 마케도니아 알렉산더 대왕조를 지나 1세기 로마에 복속하였다가 AC 330년 콘스탄틴 대제가 이스탄불에 동로마제국을 건설하여 번창하였고 몽고의 지배를 받다가 1243년 몽고가 패망하자 그 자리에 오스만 튀르크가 성립하여 17세기까지 오스만제국의 번창기를 맞았다. 

 

한사람이 위대한 영웅이 민족과 나라를 부강하게 한다. 이스탄불 히포드럼 광장에서 전쟁 영웅들의 기상을 들추어 보면서 느낀 것이다.

 

카톨릭과 이슬람의 흉합 (소피아 성당과 블루 모스크)

 

토카피(dokapi)궁전에서 오스만 튀르크 제국의 영광을 보았다. 이 궁전은 이스탄불 최고의 오스만제국의 궁전인데 메메트 2세 술탄이 1299년 콘스탄틴노풀을 점령한 기념으로 지은 궁전인데 1699년까지 400년간 궁전으로 사용하였다. 메메트는 기독교 성당이 마주 보는 곳에 로마 성벽을 허물고 이슬람 성당과 궁전을 지었다. 

 

소피아 성당의 블루 모스크(bluemosque)는 이슬람과 카톨릭, 동서 문화와 종교가 화합하는 현장이었다. 광장에서 서로 마주 보는 곳에 이슬람 모스크와 그리스 정교의 성소피아 성당이 우뚝 서로 기개를 자랑한다. 푸른색 창이 아름다운 미학을 자아낸다. 이슬람과 카톨릭의 위세를 비교해 본다. 그러니까 블루 모스크는 이슬람 성당이고 소피아 성당은 카톨릭 성당인데 성당에 이슬람 기도처가 있어서 두 종교의 공존하는 성역을 보여 주었다.  

 

1453년 메헤메드 2세의 오스만 튀르크가 콘스탄틴노풀을 점령하고 비잔틴 제국의 대성당을 회교 사원으로 만들어 900년간 사용하였다. 내부의 카톨릭 벽화나 모자이크를 그대로 두고 코란을 외우는 모스크로 사용한 것은 종교의 화합이었다. 성소피아 성당은 17세기 비잔틴 최고의 성당이란 점에서 의미가 있다. 내부의 장식과 모자이크, 대리석, 돔은 카톨릭 그대로 두었다. 돔 중앙에 추를 늘어뜨려 땅바닥에 십자가를 긋고 그 중앙에 추가 고정되게 하여 건물의 이동을 측정했는데 지금도 꼭지점이 움직이지 않고 일치한다. 이스탄불에 지진이 많은 터라 꼭지점이 비틀어짐으로 지진을 측정하였다. 17세기에 이슬람 술탄은 이슬람 기도처인 6개의 첨탑 미나레(minare)를 이곳에 세웠다.  

 

‘거룩한 자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 그런데 1843년 압둘레지드 하렘이 술탄이 토카프 궁전이 싫어서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을 모방하여 새로 지은 돌마바우체 궁전(dolmabauche)으로 거처를 옮긴다. 새 궁전은 보스포러스 해 다리가 바라보이는 해변에 세계에서 가장 화려한 이슬람 왕궁이었다. 내부 기둥은 금도금(14톤)과 은도금(40톤) 대리석으로 포장되었고 천정과 창문은 크리스탈 (4.5톤)로 지었다. 사실 기둥은 나무인데 대리석으로 둘러쌓고 금도금을 하였다. 바닥은 나무판 조각을 모자이크로 붙여 깔고 그 위에 최고급 양탄자로 깔았다. 연회장으로 활용했다는 궁전 내 최고급 장식의 응접실은 술탄의 왕비를 간택한 장소였다. 그러나 오스만 튀르크가 망하고 튀르크 공화국이 서면서 초대 대통령 아타투르크가 이 궁전을 사택으로 만들어 버렸다.

 

 

[김용필]

KBS 교육방송극작가

한국소설가협회 감사

한국문인협회 이사

한국문인협회 마포지부 회장

문공부 우수도서선정(화엄경)

한국소설작가상(대하소설-연해주 전5권)

이메일 :danmoon@hanmail.net

 

작성 2025.11.04 10:27 수정 2025.11.04 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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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