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헌식의 역사칼럼] 최초 삼도수군통제영이 여수라는 주장의 문제점 ​

윤헌식

얼마전부터 최초 삼도수군통제영이 여수에 있던 전라좌수영이라는 주장이 계속 제기되고 있다. 이러한 주장은 현재 여수시를 중심으로 힘을 얻고 있는 추세이다. 그 주장의 근거를 살펴보면, 크게 다음의 두 가지 논리로 요약된다.

 

① 충무공 이순신은 그가 쓴 『난중일기』에서 전라좌수영을 줄곧 ‘본영(本營)’으로 기록하였다. ‘본영’은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용어 ‘본부(本部)’의 의미와 상통하므로 곧 전라좌수영이 ‘통제영 본영’이다.

② 충무공 이순신은 그가 쓴 『난중일기』나 장계 등에서 한산도를 ‘영(營)’이나 ‘통제영(統制營)’으로 칭하지 않고 단지 ‘진(陣)’ 등으로 불렀다.

 

위 논리가 과연 옳은 것일까? 『난중일기』를 비롯한 여러 사료를 통해 그 사실 여부를 살펴보자.

 

 

(1) 『난중일기』에 기록된 ‘본영(本營)’의 의미

 

충무공 이순신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다음해인 1593년 8~9월경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되었으며, 이때부터 통제영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만일 『난중일기』에 언급된 ‘본영’이 ‘통제영 본영’을 의미한다면, ‘본영’이라는 용어는 『난중일기』의 1593년 8~9월 이후 기록부터 나타날 것이다.

하지만 『난중일기』의 기록을 살펴보면, 충무공이 통제사로 임명된 1593년 8~9월 이전 기록에도 ‘본영’이라는 용어가 여러 차례 등장한다. 『난중일기』의 1592년 1월 12일, 1593년 2월 8일, 2월 10일, 5월 12일, 5월 20일, 5월 22일, 6월 2일, 6월 19일, 6월 22일 등 통제사 임명 이전 많은 기록에서 용어 ‘본영’이 등장한다. 다음은 용어 ‘본영’이 나타나는 『난중일기』 기록의 일부 사례이다.

 

『난중일기』, 1592년 1월 12일

식사를 한 뒤에 객사의 동헌에 나가서 본영과 각 진포의 진무들의 활쏘기 시험을 보았다.

(원문) 食後出客舍東軒 本營及各浦鎮撫 優等試射.

 

『난중일기』, 1593년 2월 8일

그날로 신시(오후4시)에 배를 출발하여 초경(밤8시)에 온천도(칠천도)에 이르러 본영으로 편지를 썼다.

(원문) 即日申時 發船 初更 到溫川島 簡于本營.

 

『난중일기』 1592년 1월 12일에 등장하는 ‘본영(本營)’ – 자료출처: 한국고전종합DB

 

만일 『난중일기』에 언급된 ‘본영’이 ‘통제영 본영’을 의미한다면, 통제영이 설치되기 이전 시기의 『난중일기』에 나타나는 ‘본영’도 ‘통제영 본영’을 의미하는가? 이는 전혀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 이야기이다. 심지어 용어 ‘본영’은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이전 시기인 『난중일기』 1592년 1월 12일 기록에도 나타난다. 임진왜란 이전 시기에 전라좌수영이 ‘본부(本部)’ 또는 ’지부(支部)’가 있을 수 있는가? 즉, 『난중일기』에 등장하는 용어 ‘본영’은 ‘통제영 본영’이라는 의미가 아나다.

‘본영’이 ‘통제영 본영’을 의미한다는 주장은 한자 ‘본(本)’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문제에서 비롯되었다. 조선시대 용어 ‘본영’은 ‘우리 영’ 또는 ‘자기 영’의 의미로 사용되던 보편적인 말이다. ‘본영’의 앞 글자 '본(本)’은 ‘본부’나 '근본’이라는 뜻이 아니라 ‘우리’ 또는 ‘자기’라는 뜻이다.

용어 ‘본영(本營)’을 국사편찬위원회의 조선왕조실록 홈페이지에서 검색해보면 약 700여 건이 나타나는데, 그 내용을 살펴보면 ‘본영’이 ‘우리 진영’ 또는 ‘자기 진영’이라는 의미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옥편에서도 한자 ‘본(本)’의 의미를 찾아보면, ‘근본(根本)’이라는 의미 이외에 ‘자기 자신(自己 自身)’ 등의 의미도 발견된다. 다음은 『선조실록』의 기사에 등장하는 용어 ‘본영’의 한 사례이다.

 

『선조실록』, 선조19년-1585년 4월 21일 임술 2번째 기사

올 4월 1일 경기수사가 전일 병조가 받든 교서에 의해 궐군의 속목을 받아들여 본영의 배를 만드는 일에 쓰고, 나머지 목면 4동 12필 반을 비변사에 상납하여 북도의 군수에 보충하도록 하겠다는 계본을 올리고 이를 계하 받았습니다.

(원문) 今四月初一日 京畿水使 以前日兵曹所受敎闕軍贖木 捧上本營造船而用 餘木綿四同十二匹半 備邊司上納 以補北道軍需事啓本啓下.

 

위 『선조실록』의 기사에 언급된 ‘본영’은 경기수사의 진영인 경기수영을 가리킨다. 경기수사 ‘자기 진영’을 가리키는 의미로서 용어 ‘본영’이 사용되었다. 당시 경기수영에 ‘본부(本部)’ 또는 ’지부(支部)’가 따로 존재하지 않았으니 기사에 나타난 ‘본영’이 의미하는 바는 분명하다. 참고로 조선 초기 경기수영은 경기도 화성시 송산면에 있던 화량진(花梁鎭)에 있었다.

 

통제사 이순신은 원래 관직이 전라좌수사이므로 전라좌수영을 ‘우리 진영’이라는 의미를 가진 ‘본영’으로 칭한 것이다. 『난중일기』에는 전라좌수영 뿐만 아니라 전라우수영이나 전라병영을 ‘본영’으로 칭한 기록도 등장한다. 이들 기록을 살펴보면 ‘본영’이 ‘자기 진영’의 의미임을 쉽게 알 수 있다. 다음은 그 해당 기록이다.

 

『난중일기』, 1593년 7월 27일

우수영(전라우수영)의 우후(이정충)가 본영(전라우수영: 전라도 해남)으로부터 와서 우도(전라우도)의 일을 전했는데 놀랄만한 일들이 많았다.

(원문) 右營虞候至自本營 傳言右道之事 多有可愕之事.

 

『난중일기』, 1597년 5월 2일

원수(권율)는 보성으로 가고 병사(전라병사 이복남)는 본영(전라병영: 전라도 강진)으로 갔다.

(원문) 元帥徃于寶城 兵使徃于本營.

 

용어 ‘본영(本營)’의 의미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또다른 사례는 용어 ‘본도(本道)’이다. ‘본도’는 ‘우리 도’ 또는 ‘자기 도’를 의미하던 말로서 『난중일기』나 충무공의 장계를 비롯하여 여러 조선시대 문헌에 등장하는 보편적인 용어이다. ‘본도’의 앞 글자 또한 ‘본영’의 앞 글자와과 같은 의미이다. 다음은 용어 ‘본도’가 사용된 『난중일기』의 기록들 가운데 하나이다.

 

『난중일기』, 1592년 5월 3일

본도(전라도)의 우수사(전라우수사 이억기)가 수군을 이끌고 오기로 약속하였는데

(원문) 以本道右水使 率舟師來 共之約

 

 

(2) 『난중일기』에 ‘영(營)’으로 기록된 한산도

 

“충무공 이순신이 『난중일기』나 장계 등에서 한산도를 ‘영(營)’이나 ‘통제영(統制營)’으로 칭하지 않고 단지 ‘진(陣)’ 등으로 불렀다”라는 주장은 최초 삼도수군통제영이 여수 전라좌수영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로부터 비롯되었다. 이 주장은 수군절도사 진영인 전라좌수영(全羅左水營), 전라우수영(全羅右水營), 경상우수영(慶尙右水營) 등과 달리 한산도는 ‘영(營)’에 해당하는 곳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과 달리 『난중일기』에는 한산도를 ‘영(營)’으로 칭한 기록이 여러 차례 버젓이 등장한다. 『난중일기』의 1594년 2월 14일, 1595년 6월 13일, 1595년 9월 9일, 1596년 7월 3일, 1596년 8월 11일이 해당 기록으로서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난중일기』, 1594년 2월 14일

저물녘에 방답첨사와 배 첨지(배경남)가 영으로 왔는데, 군량 20섬을 싣고 왔다.

(원문) 暮 防踏僉使及裵僉知來到營 軍粮二十石載來.

 

『난중일기』, 1595년 6월 13일

새벽에 경상수사 배설을 잡아오라는 명령이 내려오고 그 대신으로 권준이 제수되고 남해현령 기효근은 유임되었다고 하여 놀라웠다. 늦게 배 수사(배설)에게 가서 만나고 돌아왔다. 어두워질 무렵 탐후선이 들어와서 금오리가 거의 영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원문) 曉 慶尙水使裵楔拿命已下 而其代權俊爲之 南海奇孝謹仍任云 可愕. 晩 徃見裵水使而還. 昏 探船入來 金吾吏已到營中.

* 『난중일기』에 따르면 배설을 잡으러 온 금오리는 다음날 한산도에 들어왔다.

 

『난중일기』, 1595년 9월 9일

우수사(전라우수사 이억기)와 여러 장수들이 모두 모여 영의 군사들에게 떡 1섬을 나누어 주었다. 오후 8시경에 헤어져 돌아왔다.

(원문) 右水使及諸將齊會 而營軍士則分餠一石. 初更罷歸.

 

『난중일기』, 1596년 7월 3일

일찍 식사를 한 뒤에 순찰사(경상우도 순찰사 서성)와 도사(경상우도 도사)가 이 영으로 와서 활을 쏘았다. 순찰사 편이 또 96분을 졌다.

(원문) 早食後 巡使与都事到此營 射帿. 巡使邊又負者九十六分.

 

『난중일기』, 1596년 8월 11일

배 조방장(배흥립)과 함께 아침식사를 하였다. 늦게 그와 함께 활터로 가서 말달리는 것을 구경하다가 저물녘에 영으로 돌아왔다.

[원문] 与裵助防 同朝飯. 晩 与之同到射場 觀馳馬 暮還營.

 

위 『난중일기』의 기록은 모두 통제사 이순신 휘하 조선 수군이 한산도에 주둔했던 시기의 것이다. 통제사 이순신 스스로가 한산도를 ‘영(營)’ 즉, ‘통제영(統制營)’으로 호칭했음을 입증하는 명백한 근거들이다. 다음은 『난중일기』 친필본으로서, 붉은 네모를 친 부분은 1596년 8월 11일 일기 가운데 ‘저물녁에 영으로 돌아왔다(暮還營)’라는 문구이다.

 

『난중일기』, 1596년 8월 11일 “暮還營” - 자료 출처: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 『선조실록』과 『사대문괘』에 ‘영(營)’으로 기록된 한산도

 

한산도를 ‘영(營)’으로 서술한 기록은 『난중일기』뿐만 아니라 『선조실록』과 『사대문괘』에서도 발견된다.

통제사 휘하 조선 수군이 한산도에 주둔했던 시기인 1596년 조선 조정은 한산도에 관해 논의하면서 이곳을 전라좌수영(全羅左水營), 경상우수영(慶尙右水營) 등과 마찬가지로 ‘수영(水營)’으로 일컬었다. 이는 『선조실록』의 기사에 실린 기록으로서 조정에서 공식적으로 한산도를 수군의 ‘영(營)’으로 칭했음을 말해준다. 다음은 『선조실록』의 해당 기사이다.

 

『선조실록』 권82, 선조29년(1596) 11월 1일 계사 2번째 기사

상(선조)이 이르기를 "한산도는 목장인가?" 하니, 신잡이 아뢰기를, "본래 섬입니다." 하고, 김응남이 아뢰기를 "그 크기가 국남산(國南山)만합니다." 하였다.

상(선조)이 이르기를 "그 안에 배를 감출 수 있는가?" 하니, 이충원이 아뢰기를 "지세가 험하고 막혀서 1만척의 배를 감추더라도 밖에서는 알지 못합니다. 또 만일 적의 배가 들어가려 하더라도 엿볼 수 없습니다." 하였다.

상(선조)이 이르기를 "그 땅은 평평하여 경작할 만한가?" 하니, 김응남이 아뢰기를 "이원익이 말하기를 ‘지세가 평평하므로 노는 군사를 시켜 경작 할 수 있다.’라고 했습니다." 하였다.

김응남이 또 아뢰기를 "병력이 남으면 거제를 지켜서 적이 오는 길을 끊지 않아서는 안 되겠습니다." 하고, 윤근수가 아뢰기를 "적이 거제를 지킨다면 우리 나라의 일은 글러질 것입니다. 수영이 거제의 한 모퉁이에 있어(水營在巨濟一隅) 김해와 서로 이어졌는데, 적이 부산으로부터 배를 잇대어 곧바로 친다면 무슨 군사로 항거하여 싸우고 무슨 배로 들어가 구원하겠습니까. 우선 거제를 지키는 것이 가장 편리하겠습니다."

 

1597년에 벌어진 칠천량해전 직후 경상우수사 배설이 조정에 보낸 장계의 일부 내용이 『사대문궤』에 실려 있는데, 여기에도 한산도를 ‘영(營)’으로 서술한 기록이 있다. 당시 현직 수군절도사였던 배설이 한산도를 ‘영(營)’으로 명기했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참고로 『사대문궤』는 조선이 명나라에 보낸 외교문서를 수록한 사료이다.

 

『사대문궤』 권22, 1597년 7월 27일

한산의 영을 지키는 군민에게 통보하기를 “각 장수가 본래 거느렸던 배 300여 척을 사량으로 이주하고...” (通諭閑山守營軍民 各將原帶船三百餘隻 移駐蛇梁)

* 자료 출처: 규장각한국학연구원

 

 

▶ 『난중잡록』과 『선조실록』에 ‘통영(統營)’으로 기록된 한산도, 거제 오아포, 고성 두룡포

 

조경남(趙慶男, 1570~1641년)의 『난중잡록』은 한산도를 ‘통영(統營)’으로 명시한 가장 빠른 사료이다. 『난중잡록』에는 용어 ‘통영(統營)’이 4차례 등장한다. 이들 가운데 앞선 시기의 두 기록은 한산도를 ‘통영’으로 기록하였으며, 이후의 두 기록은 ‘통영’을 각각 거제와 고성 두룡포로 옮겨 설치한 사실을 기록하였다. 다음은 『난중잡록』의 해당 기록을 정리한 것이다.

 

『난중잡록』, 1594년 6월 7일

이때 3도 수사가 여러 장수를 인솔하고 모두 한산도 통영 휘하에 진을 쳤다.

(원문) 時三道水使領率諸將 皆鎭于閑山島統營麾下.

 

『난중잡록』, 1595년 1월 11일

통제사 이순신이 장계에서 말하기를 “각 고을 수령들이 적을 방어하는 데 뜻이 없어 수군 병사를 전혀 들여보내지 아니합니다. 운운.”이라고 하였으므로 (조정이) 각 도의 감사에게 명하여 근실하고 태만한 것을 사찰하여 죄와 벌을 정하여 시행하였다. 이 때문에 남원의 병리 양순세와 이승서 등을 통영으로 잡아들여 연달아 참하였다.

(원문) 統制使李舜臣啓曰 各官守令等 無意禦賊 舟師水兵 專不入送云云 命各道監司 査考勤慢 定行罪罰. 以此南原兵吏梁順世李承緖等 拿入統營 連遭處斬.

 

『난중잡록』, 1601년 3월 11일

통영을 거제로 옮겼다.

(원문) 移統營于巨濟.

 

『난중잡록』, 1604년 봄

통영을 고성 두룡포로 옮겼다.

(원문) 移設統營于固城豆籠浦.

 

위에 나열한 『난중잡록』의 ‘통영’ 관련 기록에 대해 후대에 수정한 기록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하지만 『난중잡록』이 작성된 배경과 사료적 가치를 안다면 그러한 주장은 설득력을 잃는다.

『난중잡록』의 사료적 가치는 이미 역사학계에서 높이 평가받고 있으며, 이를 고찰한 연구 자료들도 여럿 출간되어 있다. 특히 다음 논문은 『난중잡록』에 관한 선행 연구의 논지를 종합하고, 그 내용을 서지학적 측면과 사학사적 측면에서 잘 분석하고 정리한 연구 자료이다. 한국학술지인용색인 홈페이지(kci.go.kr)에서 이 논문을 다운로드 받을 수 있으므로 관심있으신 분은 참조하시기 바란다.

 

「『난중잡록』의 사학사적 고찰」, 『한국사학사학보』 23, 정구복(한국학중앙연구원), 2011

 

 

위 논문의 내용을 바탕으로 『난중잡록』이 작성된 배경과 사료적 가치를 간략히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난중잡록』은 조경남이 만 12세인 1582년부터 그의 평생에 걸쳐 일기체 형식으로 쓴 책이다. 조경남은 임진년(1592년)부터 남원부의 서기(書記) 직으로 있었기 때문에 남원부사에게 제공되는 각종 문서 등을 이용하여 임진왜란과 그 이후의 시기에 해당하는 『난중잡록』 본문의 기사를 쓸 수 있었다.

『난중잡록』은 필사본 4가지와 인쇄본(영인본 포함) 5가지 정도가 전한다. 『난중잡록』은 사료로서의 가치가 뛰어나 『선조수정실록』 편찬을 위해 인조 19년(1641년) 전후에 춘추관에 바쳐진 것으로 여겨지는데, 그 시기로 보아 저자 조경남이 생존해 있을 때 바쳤을 수도 있다. 『난중잡록』의 4가지 필사본 가운데 하나는 조경남의 후손이 소장하고 있으며, 그 필사본의 일부는 조경남의 친필일 가능성도 있다. 그 필사본의 전래 경위는 지금까지 전해지며, 이를 고찰한 「조경남의 난중잡록 원본고」(조병희, 1984)라는 논고도 있다. 『난중잡록』의 기록이 후대에 수정된 흔적은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난중잡록』은 『경상도순영록(慶尙道巡營錄)』, 『고사(攷事)』, 『정기록(正氣錄)』, 『조보(朝報)』, 『비망기(備忘記)』 등의 많은 책과 교서(敎書), 격문(檄文), 고목(告目), 통문(通文), 회문(回文), 관문(關文), 명 황제의 칙유조서(勅諭詔書), 상소문, 장계(狀啓) 등의 많은 문서를 인용하였다. 즉, 『난중잡록』은 자료집 또는 역사서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 책이다. 그 내용을 수정하려면, 이 책의 내용을 전반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의 높은 지식을 가진 학자들과 함께 많은 참고 자료가 필요하다. 즉, 상당한 시간과 비용이 소요되는 작업이다. 또한 조경남이 『난중잡록』을 집필할 때 참조한 자료들도 필요할 수 있는데, 그러한 자료들 중 『경상도순영록』 등의 몇가지 자료는 세월이 흐르면서 실전되었다. 『난중잡록』의 기록이 후대에 수정되었다는 주장이 과연 가능한 일인지 조차 의심스럽다.

 

위에 나열한 『난중잡록』의 ‘통영’ 관련 기록 가운데 1595년 1월 11일 기록은 통제사 이순신의 장계 내용에 관해 언급하였는데, 이는 조경남이 공문을 참조하여 해당 기록을 작성한 것임을 의미한다. 1601년 3월 11일 기록은 통영을 거제로 옮겼다고 기록하였는데, 이는 경상우수영이 있던 거제 오아포로 통영을 옮긴 일을 서술한 것이다. 비슷한 시기인 1601년 5월경 5대 통제사 이시언이 경상우수사로 제수되면서 통제사가 경상우수사 겸임으로 바뀌게 된다. 1604년 봄 기록은 통영을 고성 두룡포로 옮겼다고 기록하였는데, 이곳이 지금의 경남 통영시의 시초이다. 『난중잡록』의 ‘통영’ 관련 기록은 1594~1604년 시기 통제영의 위치 변경을 보여주는 중요한 당대 사료이다.

 

『난중잡록』뿐만 아니라 『선조실록』의 1601~1603년 기사에도 용어 ‘통영(統營)’이 3차례 등장한다. 다음은 그 해당 기록이다.

 

『선조실록』 권137, 선조34년(1601) 5월 8일 을사 2번째 기사

현재 우수사(전라우수사)의 전선이 11척뿐이지만, 지난날 통제사의 표하선(標下船) 10척을 뽑아 영남으로 보냈기(添防) 때문에 또한 우영선(右營船: 전라우수영의 배) 2척을 옮겨 통영(統營)에 소속시켰습니다.

 

『선조실록』 권144, 선조34년(1601) 12월 29일 임진 3번째 기사

신(이덕형)이 일찍이 남방에 있을 적에 유정(惟政)이 거느리는 여러 승려를 마음에 두고 간택해 보았으나 결국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군관이나 무사 중에서 여러 방법으로 시험해 보았더니, 오직 동래 소모진(東萊召募陣)의 천총(千摠) 전계신(全繼信)과 통영 군관(統營軍官) 김시약(金時若)이 다른 사람보다 나은 듯하였습니다.

 

『선조실록』 권159, 선조36년(1603) 2월 29일 병진 1번째 기사

귤왜(橘倭)가 3월 사이에 다시 나온다면 반드시 군문(軍門)에 말을 전할 사람을 찾을 것이니 손문욱(孫文彧)을 통영(統營)에 내려 보내 그로 하여금 통제사와 더불어 별소선(別小船)을 방비하는 일을 준비하면서 왜사(倭使)가 도착하기를 기다렸다가 접대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위 『선조실록』의 기사는 통제영이 1604년 고성 두룡포에 정착하기 이전부터 '통영’이라는 용어가 사용되었던 사실을 보여주며, 『난중잡록』의 ‘통영’ 관련 기록의 신빙성을 일부 뒷받침한다. 이들 『선조실록』의 세 기사는 통제영이 거제 오아포에 있던 시기의 기록이다. 특히 1601년 5월 8일 기사의 내용을 살펴보면, 당시 통영이 영남(경상도)에 위치했던 곳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위에서 살펴본 『난중잡록』과 『선조실록』의 기록을 통해 한산도, 거제 오아포, 고성 두룡포가 모두 ‘통영’으로 불린 사실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여수 전라좌수영의 역사적 가치를 의심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필자는 여수 진남관을 방문한 적이 여러 차례 있는데, 매우 좋은 추억으로 남아 있다. 앞으로도 기회가 닿는다면 새로이 복원된 여수 진남관을 보기 위해 방문할 생각이다. 최초 삼도수군통제영이 전라좌수영이라는 주장은 전혀 여수의 위상을 높여주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여수와 전라좌수영의 이미지를 훼손하는 행위가 되어 여수 시민의 얼굴에 먹칠을 할 뿐이다. 여수 시민들께서 이 문제를 깊이 있게 통찰하여 주셨으면 좋겠다.

[참고자료]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사대문궤』

한국고전종합DB, 조경남(趙慶男), 『난중잡록(亂中雜錄)』

정구복, 「『난중잡록』의 사학사적 고찰」, 『한국사학사학보』 23, 2011]

 

 

[윤헌식]

칼럼니스트

이순신전략연구소 선임연구원

저서 : 역사 자료로 보는 난중일기

이메일 : thehand8@hanmail.net

 

작성 2025.11.07 06:10 수정 2025.11.07 0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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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