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상 칼럼] 순결과 진실의 의미

이태상

“정조대를 찼는데요. 열쇠를 분실했어요.”

 

21세기에 이런 전화를 받는다면 믿을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이탈리아 소방대에 최근 실제로 이런 전화가 걸려왔다. “장난 전화가 분명해” “그래도 가봐야 하는 거 아냐?” 의견이 분분했지만 결국 소방대는 출동을 결정했다. 신고 된 주소에 도착한 소방대는 깜짝 놀랐다. 신고 전화는 100% 사실이었다. 최근 이탈리아 파두아 지역에서 벌어진 사건이다. 이름과 나이가 공개되지 않은 문제의 여성은 평소 열쇠로 열고 닫는 정조대를 차고 있었다. 하지만 소중하게 보관했어야 할 열쇠를 잃어버리면서 큰 사고가 났다. 정조대를 벗을 수 없게 된 여자는 소방대에 SOS를 쳤다. 중세기에나 있을 법한 사고가 났다는 말에 소방대는 반신반의하면서 여자에게 정조대를 차게 된 경위를 물었다. 돌아온 대답은 의외였다. 여자는 성관계를 피하기 위해 스스로 정조대를 사용한 것이라며 누구의 강요도 없었다고 했다.

 

이 사건은 현대사회에서 찾기 힘든 희귀 사건으로 외신에 보도됐다. 텔레싱코 등 유럽 언론은 정조대가 아직 자취를 감추지 않았다는 사실이 확인됐다며 르네상스 시대에 사용되던 물건을 여전히 사용하는 사람이 있다는 건 매우 흥미로운 일이라고 보도했다. 하기는 한국에서도 아직까지 여성들에게는 순결이라는 정신적인 정조대가 채워지고 있지 않은가. 남성들에게는 순결의 반대가 되는 유경험의 능력이란 훈장을 달아주면서 말이다. 여성의 성을 상품화해 신제품과 중고품, 새 차와 헌 차로 분류, 인격체가 아닌 사유물 소지품으로 취급하고 있지 않은가. 남녀 불문하고 순결이 중요하다고 강조하자면,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으로 돌아가야 할 테고, 그럴 수 없다면 차라리 태어나지 않은 상태가 낫겠다는 말이 되지 않겠는가. 

 

예부터 나이가 몇이든 남녀가 합성해서 아이를 낳아 키워보지 않은 사람은 인내성性도 결여된, 성인性人이자 성인成人이 아닌 미숙아 취급해 온 데는 다 그럴 만한 사유가 있었을 게다. 어떻든 남성으로든 여성으로든 태어난 이상, 성의 존재 이유와 존재 목적이 여성은 남성을 위해, 남성은 여성을 위한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성性을 사용하지 않는 거야말로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는 부자연스럽고 불순한 행위가 되지 않겠는가. 아, 그래서 우리말에 ‘쓰지 않으면 녹슨다’ 하고, 영어로는 ‘쓰지 않으면 잃게 된다. Use it or lose it’고 하는 것이리라.

 

그건 그렇고, 자, 이제 우리가 ‘진실’이란 말을 쓸 때 뭘 의미하는지도 좀 살펴보자. 2016년 총선에서 야권의 분열로 어부지리를 얻게 된 집권당 공천을 둘러싸고 박근혜 대통령이 신뢰하는 ‘진실한 사람’이라는 ‘진실 마케팅’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자신에 대한 무조건적 절대 충성을 ‘진실한 사람’의 평가 기준으로 삼는 대통령이나, ‘진박’을 진실한 사람의 동의어로 사용하는 정치인들이나, 이런 가짜 ‘진실게임’에 휘둘리는 유권자들이나, 모두가 다 하나같이 ‘진실’이란 말의 뜻을 망각했거나 외면하는 사람들이다. 한국일보 칼럼 ‘진실한 정치인’의 기준을 조윤성 논설위원은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정치인이라면 어떡해야 하는지, 그리고 정치는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를 버니 샌더스(미국 연방 상원의원)는 현란한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설파하고 있다. 대통령이 민주주의 가치를 마구 훼손하는 데도 반기를 들기는커녕 충성스러운 행동대원이 되기를 서슴지 않는 정치인들은 진실한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호칭할 자격이 없다. 보수니 진보니 하는 이념은 진실한 정치인의 기준이 되지 않는다. 좋은 정치란 결국 진실한 정치인들과 그런 인물을 가려낼 줄 아는 유권자들의 안목이 빚어내는 예술품이라고 할 수 있다. 가치가 있는 것은 원래 희귀한 법이다. 정치판의 진실함이 바로 그런 덕목이다. 날로 확산되는 정치적 무관심은 진실한 정치인들의 실종에서 한 가지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유권자들에게 뜨거운 열망과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힘은 오직 진실함뿐이다. 샌더스의 선전을 기원해 본다.”

 

우리 한국에도 샌더스 같은 인물이 어서 등장하기를 간절히 바라고 희망해 볼 뿐이다. 우린 ‘진실'의 진은 참 진眞 자요, 실은 열매 실實 자임을 잠시도 잊지 말아야 할 일이다. 옛말에도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 하지 않았나. 어느 시대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문자 그대로 뿌리는 대로 거두는 게 만고의 진리임이 틀림없다. 

 

중학교에 들어가 처음 영어를 배우면서 ‘사랑에 빠지다’는 뜻으로 ‘falling in love’란 말에 의문을 품게 되었다. ‘사랑’이 좋은 일이라면 긍정적인 ‘오르다’ 대신에 왜 부정적인 ‘빠지다’하는 것일까. 혼자 궁리에 궁리를 해봤다. 사랑(love)의 상징적인 글자 ‘o’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몸부림치다 보면 온몸이 충만해져 화산이 폭발하듯 하늘로 솟아올라 물방울이 우주가 되듯 하늘과 땅이 하나 되어 그야말로 ‘hole’이 ‘whole’이 되나보다고 내 나름의 풀이를 했었다. 히브리어로 ‘타~하~’하면 갓 태어난 어린애가 처음으로 눈을 뜨고 세상의 모든 것에 놀라워하는 경이로움이란 뜻이란다. 그러니 ‘오르기’ 전에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으리라. 술 취한 취객들 앞에서 악기로 흘러간 옛 노래를 연주하는 악사가 발견하듯 예술가의 진짜 고향은 창조물 창작품을 포기함으로써 찾을 수 있다고 체코 출신 소설가 밀란 쿤데라는 그의 작품 ‘익살’에서 이렇게 말한다.

 

“난 이 노래들 속에서 행복했다. 슬픔이란 것이 가볍지도, 웃음이란 것이 구긴 얼굴도, 사랑이란 것이 우습지도, 그리고 미움이란 것이 겁먹은 것도 아닌, 사람들이 몸과 마음을 다해 사랑하는 곳이다. 이 노래들이 내 고향이었다. 그리고 이 고향을 내가 버리고 떠났었다면 그렇게 함으로써 이곳이, 이 노래들이 그 더욱 애틋하고 애절하게 잊힐 수 없는 노래, 돌아가야 할 내 고향이 되지 않았을까. 우리가 노래하고 연주하는 것들은 오직 기억과 회상일 뿐, 더 이상 이 세상에 없는 것을 상상으로 보존하는 것임을 깨닫게 되자 이내 고향집이 서 있는 땅이 내 발밑에서 꺼져버리는 것 같았다. 따라서 나도 함께 세월이란 깊은 강물 아니 바닷물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어디까지나 사랑은 사랑이었고 아픔은 아픔이었던 곳, 깊고 더 깊은 못 심연 속으로. 그러면서 나는 스스로에게 말하는 것이었다. 나의 고향집은 바로 이 하강, 이 추구의 열망 가득 찬 추락이라고, 이 향수에 젖은 낙향의 감미로운 혼미상태로 빠져들어 갔다”

 

아, 이것이 참으로 정말 역설의 진리였구나.

떠나와야 돌아가게 되고 떨어져야 떨어질 수 없지.

 

아, 그래서, 그리하여서 잃는 것이 얻는 것 되고

주는 일이 받는 일되며 가는 길이 오는 길 되고

내리막이 오르막 되며 비워야 채워지게 되고

낮춰야 높아지게 되며 낙엽이 져야 새잎이 돋고

해와 달도 저야 또 뜨며 내쉬는 숨 들이마시게 되고

내리는 비구름 되어 오르며 마음에 담아야 꿈도 꾸게 되지.

 

아, 그렇군. 정말 그렇군. 기쁨이 슬픔의 씨앗이 되고

아픔 끝에 즐거움이 있지. 태어남이 죽음의 시작이고

죽음 너머 새 삶 있겠지. 적어도 영원한 기억으로 남아.  

 

아, 정말 정말로 그래서 떨어져 떨어져 봐야 임이고

떠나와 봐야 고향이지. 그래서 임도 고향도

다름 아니고 못내 사무치는 그리움이지. 임도 고향도

너와 나 우리의 그리움 뿜어내는 사랑의 긴 숨이지.

 

 

[이태상]

서울대학교 졸업

코리아타임즈 기자

합동통신사 해외부 기자

미국출판사 Prentice-Hall 한국/영국 대표

오랫동안 철학에 몰두하면서

신인류 ‘코스미안’사상 창시

이메일 :1230ts@gmail.com

 

작성 2025.11.15 10:12 수정 2025.11.15 10:22
Copyrights ⓒ 코스미안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금지 한별기자 뉴스보기
댓글 0개 (1/1 페이지)
댓글등록- 개인정보를 유출하는 글의 게시를 삼가주세요.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