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용대 칼럼] 동방의 밝은 빛을 향하여

문용대

1. 타고르의 시와 조선의 시대 상황

 

1929년, 식민지 조선의 한복판에 한 편의 시가 실렸다. 제목은 「동방의 등불(Lamp of the East)」, 그 주인공은 인도 출신의 노벨문학상 수상자, 라빈드라나트 타고르였다. 당시 그는 이미 세계적인 문호이자 사상가로, 제국주의의 그늘 아래 있던 여러 민족에게 정신적 위안을 주던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조선을 향해 던진 한 편의 시는 지금까지도 수많은 한국인들의 기억 속에 각인되어 있다.

 

동방의 등불

 

일찍이 아시아의 황금 시기에

빛나던 등불의 하나였던 코리아,

그 등불 다시 한 번 켜지는 날에

너는 동방의 밝은 빛이 되리라.

 

마음에는 두려움이 없고

머리는 높이 쳐들린 곳,

지식은 자유스럽고

좁다란 담벽으로 세계가 조각조각 갈라지지 않는 곳,

진실의 깊은 속에서 말씀이 솟아나는 곳,

끊임없는 노력이 완성을 향하여 팔을 벌리는 곳,

지성의 맑은 흐름이

굳어진 습관의 모래벌판에 길 잃지 않는 곳,

무한히 퍼져 나가는 생각과 행동으로 우리들의 마음이 인도되는 곳,

그러한 자유의 천국으로

내 마음의 조국 코리아여 깨어나소서.

 

이 시는 당시 암울한 현실 속에서 신음하던 조선 민중에게 한 줄기 빛이 되었다. 1919년 3·1운동 이후, 무장 독립투쟁은 계속되었지만 현실의 일상은 여전히 어둡고 고달팠다. 정치적 독립은 멀게만 보였고, 생활 속에서 체감되는 식민지의 무게는 무겁기만 했다. 바로 그때, 세계적인 시인이 남긴 이 예언 같은 말은 무너져 가는 마음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힘이 되었다.

 

신문에 실린 짧은 번역문을 읽고 많은 이들이 가슴이 뜨거워졌다고 한다. 누군가는 눈물을 흘렸고, 누군가는 다짐을 새롭게 했다. ‘우리가 단순히 억눌린 민족이 아니라, 언젠가 다시 빛을 밝혀야 할 사명을 가진 민족’이라는 자각이 생겨난 것이다.

 

나는 오래 전부터 이 시를 자주 접했다. 교과서에도 실려 있었고, 여러 차례 인용되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단순히 외워야 하는 암송문으로만 알던 시절에는 그 의미를 깊이 새기지 못했다. 오히려 나이가 들고, 세상을 경험하고, 특히 해외에서 우리나라를 비추어 보게 되면서 이 시가 지닌 진정한 울림을 이해하게 되었다.

 

타고르는 단순히 조선을 동정하거나 위로하려 했던 것이 아니다. 그는 ‘동방의 등불’이라는 표현을 통해, 조선이 과거의 영광에 머무르지 않고 미래의 문명을 밝히는 주체가 될 것임을 내다본 것이다. 그 예언은 20세기 내내 우리의 가슴 속에 남아 있었고, 마침내 21세기에 들어와 조금씩 현실이 되어 가고 있다.

 

2. 등불의 의미 – 김구 선생과 탄허 스님의 문화 예언

 

타고르의 시가 던진 메시지는 단순한 문학적 격려를 넘어, 우리 민족의 정체성과 미래에 대한 깊은 성찰을 요구했다. 그리고 이 예언은 단순히 먼 미래의 희망으로만 머물지 않았다. 우리 시대의 지식인과 지도자, 스승들은 이를 현실과 연결해 해석하며, 실제로 우리 문화와 사회를 일깨우는 지침으로 삼았다.

 

김구 선생은 그의 저서 『나의 소원』에서 한국이 단순히 정치적 독립만을 이루는 나라가 아니라, 높은 문화적 성취를 이루고 세계 문명의 모범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그는 경제적 번영이나 군사적 강국이 아니라, “높은 문화의 힘”이 국민에게 행복을 주고, 나아가 다른 민족에게도 귀감이 되는 나라를 꿈꾸었다. 그가 말한 ‘문화의 힘’은 곧 한 국가의 정신적 자산이며, 타고르가 예언한 ‘동방의 등불’과 같은 맥락이었다.

 

또한 탄허 스님은 생전 여러 차례 “미래에 한국에서 새로운 문명이 일어나고, 세계문화의 중심국가가 된다.”고 말하였다. 6.25 전쟁으로 폐허가 된 나라에서, 세계 문화의 중심 국가를 꿈꾸는 말은 어쩌면 허무맹랑해 보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단순한 예언자가 아니었다. 그는 철저히 현실을 관찰하고, 역사적 흐름과 민족적 잠재력을 근거로 예언을 남겼다. 실제로 그는 일본의 고베 대지진, 한국전쟁 발발 시간까지 정확히 맞춘 예언으로 많은 이들을 놀라게 했다.

 

이처럼 타고르의 시, 김구 선생의 소원, 탄허 스님의 예언은 모두 같은 맥락 속에 있었다. 그것은 ‘한국이 세계 속에서 독립된 문화적 주체로 다시 설 날이 반드시 올 것이다’라는 믿음이었다. 그리고 그 믿음은 단순히 종교적 혹은 사상적 이상이 아니라, 우리가 실제로 경험하고 확인할 수 있는 역사적 현실과 결부되어 있다.

 

현대의 한류 현상을 보면 이 점이 실감된다. K-pop, K-드라마, K-뷰티, K-푸드, K-패션, K-역사 콘텐츠까지, 우리나라가 만든 문화 콘텐츠가 전 세계인의 삶 속으로 파고들고 있다. 단순히 유행을 넘어, 국가 브랜드와 문화 자산으로 자리 잡는 한류의 현상은 100년 전 타고르가 예언한 ‘동방의 등불’이 점차 현실화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3. 1985년, 일본에서

 

1985년 봄, 나는 기술 연수 목적으로 일본에 갔다. 약 한 달간의 짧은 체류였지만, 당시 내게는 세상을 보는 눈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는 경험이었다. 내가 머문 곳은 교토에 위치한 미쓰비시 자동차 공장이었다. 막중한 책임과 기대 속에서 일본의 산업 현장을 직접 보고 배우며, 나는 우리나라와 일본의 격차를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거리마다 느껴지는 질서와 정갈함은 압도적이었다. 신호등 하나, 횡단보도 한 칸까지 시민들의 움직임은 정확하게 맞춰져 있었다. 지하철은 도착과 출발시간이 정확했고, 그 안에서 사람들은 조용히 서로의 공간을 존중했다. 반면 나는 한국에서 온 사람으로서, 질서보다는 활기가 넘치는 우리의 거리와 비교하며 묘한 생각이 들었다.

 

연수 과정에서는 생산 라인, 품질 관리, 엔지니어 회의 등 일본 산업의 체계와 철저함을 직접 경험했다. 각 공정마다 기록이 꼼꼼하게 남겨져 있었고, 문제 발생 시 즉시 보고와 분석, 개선이 이루어졌다. 그 속도를 한국 기업의 당시 현장과 비교하면, 우리는 ‘빨리빨리’ 문화 속에서도 체계적 분석이나 기록 문화에서는 큰 차이가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일본 근로자들의 태도는 내 눈을 뜨게 만들었다. 누구 하나 태만하지 않았고, 반복적인 업무 속에서도 자부심과 책임감을 유지하는 듯 보였다. 그들이 보여준 ‘일의 완성도’와 ‘세부까지 신경 쓰는 습관’은 당시 한국에서 경험하기 힘든 풍경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깨달았다. 한국은 일본보다 늦었지만, 에너지가 넘쳤고, 변화와 혁신을 빠르게 수용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다.

 

밤에는 일본의 골목과 상점, 거리를 걸으며 여러 생각에 잠겼다. 소박하지만 정돈된 생활, 서로 간의 배려, 그리고 문화적 자부심이 일상 속에서 자연스럽게 스며있는 모습. 반대로 우리나라의 당시 모습은 경제 성장과 산업화로 바쁘고 시끌벅적했지만, 생활 속 질서와 문화적 성숙도에서는 아직 갈 길이 멀었다.

 

이 한 달간의 연수는 단순한 기술 습득 이상의 의미를 주었다. 일본의 시스템과 문화를 몸으로 경험하며, 우리나라가 나아가야 할 길과, 동시에 우리가 가진 잠재력을 더욱 명확히 확인하게 된 것이다. 나는 그때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언젠가 우리나라가 산업과 문화, 기술에서 일본과 나란히 서고, 심지어 앞서 나가는 날이 올 것이라고.

 

그리고 놀랍게도, 그 다짐은 현실이 되고 있다. 1985년 당시 일본과 한국의 격차는 극명했지만, 40년이 지난 2025년, 우리는 기술력, 경제력, 문화적 영향력 면에서 일본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그 격세지감은 단순히 숫자로만 표현할 수 없는, 역사와 체험 속에서 확인한 진정한 변화이다.

 

4. 오늘의 한국과 일본

 

1985년 일본에서 체험한 격세지감은 단순한 개인적 감상에 그치지 않았다. 그 후 40년, 한국은 눈부신 성장을 이루며 세계 속에서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일본은 ‘잃어버린 30년’을 거치며 장기 불황과 사회적 도전을 맞이하게 되었다. 경제, 정치, 사회, 문화 전반에서 드러나는 양국의 변화는 우리에게 겸손과 자부심, 그리고 미래를 준비해야 할 필요성을 동시에 느끼게 한다.

 

경제적 비교

 

1985년, 일본은 이미 세계 2위 경제 대국이었다. 1인당 GDP 약 1만 2천 달러, 경제성장률 4%대, 완전고용에 가까운 낮은 실업률은 일본의 경제적 풍요를 보여주는 지표였다. 반면 한국은 2천 달러 미만의 1인당 GDP, 10% 이상의 경제성장률, 실업률 4%대라는 숫자가 의미하는 것은 ‘빠른 성장과 시행착오의 동시 경험’이었다. 당시 한국의 산업화는 눈부셨지만, 국민 삶의 질, 체계적 교육, 문화적 성숙도에서는 일본에 크게 뒤처져 있었다.

  

그로부터 40년이 지난 2025년, 한국의 1인당 GDP는 3만 6천 달러를 넘어 일본을 근접 또는 앞서는 수준으로 성장했다. 경제성장률은 1~2%대지만, 이는 이미 성숙한 선진국형 경제로 전환했음을 보여준다. 일본은 여전히 0%대 후반의 저성장 기조를 유지하고 있으며, 초고령사회에 접어들어 노동력 부족과 사회보장 체계의 압박이 심화되고 있다. 환율과 물가 측면에서도 양국의 상황은 달라졌다. 한국은 1,400원에 근접한 원/달러 환율과 높은 물가 상승률을 경험하고 있고, 일본은 초엔저 현상 속에서 물가가 급등하거나 정체하는 복합적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경제적 변화는 단순한 수치의 변동이 아니다. 그것은 국민들의 삶, 산업 구조, 기업 문화, 기술 혁신의 결과이며, 한국의 국민이 직접 만들어낸 성취이다. 특히 반도체, IT, 전기차 등 첨단 기술 분야에서 한국 기업이 세계 시장을 선도하면서, 과거 일본에 비해 느리거나 뒤처진다는 평가를 극복한 결과이다.

 

사회적·문화적 변화

 

한국 사회는 1985년 권위주의 정부 아래 산업화와 경제 성장에 집중하던 시기와 비교해, 오늘날 개인주의와 다양성을 존중하는 사회로 변모했다. K-pop, K-드라마, K-뷰티, K-푸드 등 한류가 전 세계를 휩쓸며, 문화 강국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동시에 젠더 갈등, 세대 갈등, 저출산, 비혼 문제 등 새로운 사회적 과제도 드러나고 있다. 사회적 안전망, 정신 건강 서비스, 육아와 교육 지원 등 국민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한 정책적 노력이 절실하다.

 

반대로 일본은 장기 불황 속에서 ‘달관세대’가 등장하며, 물질적 풍요보다 개인의 행복과 소소한 즐거움을 추구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형성했다. 하지만 경제적 정체, 인구 감소, 고령화는 여전히 국가적 도전 과제로 남아 있으며, 젊은 층의 활력과 창의력 발휘에 제한을 주고 있다. 그럼에도 일본의 전통 예술, 서브컬처(애니메이션, 게임, 만화) 등은 세계적 영향력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고 있다.

 

정치적 환경

 

1985년 한국은 전두환 정권 아래 권위주의적 통치가 이어졌고, 정치적 민주화 요구가 높아지는 시기였다. 일본은 안정적인 자민당 장기 집권 체제를 유지하며 경제 호황을 누렸다. 2025년, 한국은 민주주의가 정착했지만 보수와 진보 간 정치적 양극화가 심화되었다. 일본 역시 의원내각제는 유지되고 있으나, 자민당의 지지율 하락과 세대별 정치적 변화로 정치적 불확실성이 증가하고 있다.

 

5. 한국, 동방의 빛으로

 

한국이 오늘날 일본과 어깨를 나란히 하거나 일부 영역에서 앞설 수 있었던 이유는 단순한 행운이 아니다. 경제, 문화, 기술, 교육, 그리고 국민의 끊임없는 노력과 도전 정신이 결합된 결과이다.

 

신속한 디지털 전환과 기술 혁신

 

1990년대 외환위기 이후 한국은 국가 차원에서 IT 인프라를 구축하고, 반도체, 스마트폰, 전기차 등 첨단 산업에 집중 투자했다. 삼성, LG, 현대 등 대기업들은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력을 확보하며 세계 시장을 선도했다. 일본은 과거 성공에 안주하며 디지털 전환이 늦어, 격차가 좁혀지기 시작했다.

 

역동적인 기업 문화와 민첩한 의사결정 구조

 

한국 대기업들은 ‘빨리빨리’ 문화와 오너 중심 경영을 기반으로 급변하는 시장에 대응했다. 일본 기업들은 안정적이지만 보수적인 의사결정 구조로 변화에 상대적으로 느렸고, 이 차이가 세계 시장에서 한국의 경쟁력을 높이는 요인이 되었다.

 

인재 양성과 교육열

 

한국인은 전통적으로 교육에 높은 가치를 두었고, 과학기술 인재가 산업 발전의 핵심 역할을 수행했다. 코딩 교육, 창의성·인성 교육 강화 등은 미래 산업에 대비한 체계적 투자였다.

 

문화적 영향력과 한류의 세계적 확산

 

K-pop, K-드라마, K-뷰티 등 한국 문화 콘텐츠는 전 세계인의 삶 속에 깊이 파고들며 국가 이미지를 높였다. 단순한 소비문화가 아닌, 국가 브랜드를 구성하는 핵심 자산이 된 것이다.

 

역사적 경험과 극복 정신

 

일본의 침략과 한국전쟁을 겪으면서도, 한국은 폐허 속에서 빠르게 일어나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성취를 이루었다. 새마을운동, 교육열, 기술 개발 등은 모두 국민적 결집력과 도전 정신을 바탕으로 한 결과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정신적·문화적 자부심이다. 타고르의 시가 예언한 ‘동방의 밝은 빛’은 단순한 경제적 성취가 아니라, 문화, 정신, 정의, 국민 행복이 함께 빛나는 국가를 의미한다. 김구 선생이 말한 ‘높은 문화의 힘’과 탄허 스님의 예언적 통찰은, 우리가 세계 속에서 자부심을 가지되, 그 빛이 정의와 공동체적 행복과 연결될 때 진정한 의미를 가진다는 것을 보여준다.

 

나는 1985년 일본 연수 당시, 한국이 세계 속에서 일본과 겨루기에는 너무 먼 길을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오늘, 2025년을 살면서 나는 놀라움을 느낀다. 한국은 경제적 수치뿐 아니라, 문화적 영향력과 기술력, 창의성에서 세계 속에서 두드러진 존재가 되었으며, 다음 세대가 자랑스럽게 살아갈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 것이다. 1인당 국민소득이 높고, 경제 대국이 되는 것만으로는 ‘동방의 밝은 빛’이 될 수 없다. 사회가 공정하고 정의롭고, 국민이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고, 교육과 문화가 공평하게 제공되며, 모두가 서로를 존중하는 사회. 바로 그것이 진정한 ‘등불’의 의미다.

 

나는 오늘도 생각한다. 우리가 타고르가 말한 동방의 등불, 김구 선생이 꿈꾼 문화적 주체, 탄허 스님이 예견한 문명의 중심이 되기 위해 해야 할 일들을. 그것은 단순히 경제적 성취가 아니라, 국민 각자가 삶 속에서 정의와 문화, 지식과 사랑을 실천하며, 공동체와 세계 속에서 빛나는 것이다.

 

우리의 앞날은 아직 무수히 많은 도전과 과제가 놓여 있다. 그러나 나는 확신한다. 우리가 끊임없이 노력하고, 배우고, 나누며, 정의와 문화적 자부심을 지킨다면, 대한민국은 타고르가 예언한 ‘동방의 밝은 빛’으로 세계 속에서 우뚝 설 것이다.

 

 

[문용대]

‘한국수필’ 수필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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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이크뉴스’ 오피니언 필진

‘코스미안뉴스’ 오피니언 필진

수필집 ‘영원을 향한 선택’

‘날개 작은 새도 높이 날 수 있다’

이메일 : myd1800@hanmail.net

 

작성 2025.11.20 10:22 수정 2025.11.20 1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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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