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서 칼럼] 공교육, 기울어진 사다리에서 열려 있는 지평으로

이진서

지난 2024년 12월 초, 여러 교육 주체들이 긴 시간을 들여 준비한 끝에 ‘교육‧사회 대개혁을 위한 비상시국 교육원탁회의’가 출범했다. 이후 일곱 차례의 논의를 거쳐 집약된 정책 자료집에는 오늘의 교육이 어디에서 균열을 맞고 있으며 무엇을 새로 시작해야 하는지에 대한 현장의 절박한 목소리가 담겨 있었다. 

 

그 자료집을 읽는 동안 나는 희망과 회의가 동시에 스쳤다. 경쟁교육이 완화될 수 있을까, 교육 불평등이 조금이나마 해소될 수 있을까 하는 물음은 여전히 남았다. 분명한 것은, 이제 더 이상 ‘위기를 진단하는 데서 멈추는’ 개혁은 의미가 없다는 사실이다. 법·제도·재정의 구조적 변화를 실질적으로 만들어갈 새로운 이정표를 세워야 한다는 시대적 요청이 더는 미뤄질 수 없게 된 것이다.

 

필자가 보기에 한국 공교육의 가장 깊은 균열은 우리가 아직도 교육을 ‘미래로 올라가는 사다리’로 이해하고 있다는 데 있다. 문제는 이 사다리가 낡아 제 기능을 못 한다는 데 있지 않다. 그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이 사다리가 처음부터 특정한 문화·경제·젠더적 배경을 가진 이들에게 유리하게 설계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교육의 위기는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된다. 우리가 오래도록 믿어온 보편성, 공정성, 표준이라는 말이 실제로는 누군가의 경험을 ‘보편’으로 위장한 언어였음을 깨닫는 순간, 교육은 더 이상 같은 얼굴을 유지할 수 없다.

 

그동안 학교는 ‘중립적 언어’를 가르치는 공간으로 간주되어 왔다. 모두가 같은 교과서, 동일한 기준으로 시험을 치르면 공정하다고 여겨졌다. 그러나 언어는 투명한 유리창이 아니다. 언어는 언제나 누군가의 세계, 누군가의 감각, 누군가의 몸과 역사를 품은 채 만들어진다. 이 말은 곧 교육의 언어가 중립적일 수 없다는 뜻이다. 특히 교과서의 문장, 예시, 문제의 장면들은 대부분 중산층·남성·도시 중심의 정서와 가족 구조를 ‘정상’으로 삼는다. 이 세계 밖에 있는 학생들의 일상은 설명되지 않거나 ‘보충’, ‘지원’, ‘결핍’이라는 말 아래 재단되어 왔다.

 

보편적 언어라는 이름으로 감춰진 위계는 학생들의 지식 경험만이 아니라 존재 방식까지 규정한다. ‘능력’, ‘표준’, ‘성공’이라는 말도 마찬가지다. 이 말들은 특정 계층의 삶을 기준으로 삼고, 그 기준을 벗어난 이들에게 결핍의 이름을 씌워왔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물어야 한다. 교육은 지금까지 누구의 언어로 세계를 설명해 왔는가. 그리고 그 언어는 누구를 교실의 주변부로 밀어냈는가.

 

많은 이들이 동의하듯, 한국 공교육을 지탱해온 가장 강력한 신화는 ‘성공 사다리’였다. 노력하면 더 나은 삶으로 이동할 수 있다는 믿음은 한 시대를 묶은 서사였다. 그러나 부모의 사회경제적 배경이 학업 성취와 미래 기회를 결정하는 지금도 이 사다리가 ‘공정한 길’일 수 있을까. 더 나아가, ‘상향 이동’이라는 단 하나의 좌표만을 모든 학생에게 동일한 이상으로 제시하는 교육이 과연 교육일 수 있는가. 성공이 유일한 언어가 되는 순간, 타인의 세계를 이해할 여지는 사라지고 학생들은 그 기준 안에서 줄 세워지고 나누어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표준의 폭력성은 ‘교육적 필요’라는 이름으로 너무 오랫동안 정당화되어 왔다.

 

그러나 필자는 이 보편성의 균열을 교육의 붕괴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이는 보편을 다시 쓸 수 있는 기회이다. 우리가 버려야 할 것은 보편 자체가 아니라 보편을 하나의 기준으로 강제해온 방식이다. 새로운 보편은 단일한 표준이 아니라 서로 다른 경험들이 충돌하고 대화하며 갱신되는 과정이어야 한다.

 

 학생들이 살아가는 조건은 제각기 다르다. 지역, 계급, 젠더, 장애 여부, 가족 구조, 몸의 조건, 문화적 배경은 그들에게 서로 다른 세계를 보여준다. 기존의 공교육은 이런 차이를 ‘교정’하거나 ‘보완’해야 할 것으로 여겨왔다. 그러나 이제는 오히려 이 차이가 학습의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자신의 위치를 드러내는 순간, 학생은 비로소 자기 언어로 세계를 말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된다. 

 

차이는 갈등을 일으킬 수도 있지만 동시에 지식을 새로운 방향으로 열어젖히는 중요한 출발점이기도 하다. 서로 다른 세계가 부딪히는 교실은 더 이상 단일한 정답을 강요하는 공간이 아니라 세계의 복잡성을 견디고 이해하는 훈련의 장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보편성을 폐기하는 것이 아닌 보편을 더 넓고 다층적인 장(場)으로 다시 쓰는 작업이다.

 

지식이 넘쳐나는 시대, 공교육이 길러야 할 핵심 역량은 정보를 축적하는 능력이 아니라 언어와 지식이 만들어지는 조건을 감각하는 능력, 다시 말해 ‘해석의 힘’, ‘위치성의 감각’, ‘권력의 감각’이다. 지식의 부분성과 언어의 한계를 인식하는 학생은 단순한 정답 수용자가 아니라 자신의 세계를 재구성하는 존재가 된다. 교실은 ‘진리’를 주입하는 공간이 아니라 누가 말할 수 있고 누가 침묵을 강요받는지를 드러내는 정치적 공간임을 자각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추구해야 할 공교육의 목표는 무엇이어야 하는가. 이미 시효가 끝난 ‘더 높은 사다리’가 아니라 서로 다른 세계들이 각자의 속도와 방향을 찾아 걸어갈 수 있는 넓은 지평이어야 한다. 그 지평을 열어주는 것이 공교육의 새로운 패러다임이 되어야 한다. 미래의 공교육이 길러야 할 힘은 지식의 축적이 아니라 보편을 다시 쓰는 능력, 타인의 세계를 이해하는 감각, 자신의 삶을 재구성할 상상력이다.

 

차이는 보편을 위협하지 않는다. 차이는 보편을 갱신한다. 이 사실을 자각하는 순간, 교육은 특정 계층의 사다리를 벗어나 모두의 지평으로 나아갈 수 있다. 이것이 지금 우리가 공교육의 이름으로 다시 꿈꾸어야 할 미래이다.

 

 

[이진서]

고석규비평문학관 관장

제6회 코스미안상 수상

lsblyb@naver.com

 

작성 2025.11.24 10:19 수정 2025.11.24 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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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