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 철학적 해석: 존재, 침묵, 해석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1831)은 『정신현상학』에서 변증법적 순환과 관련하여 ‘지금’을 강조하였다. 이를 아래와 같이 간략히 읽어 본다.
‘지금’은 ‘이 지금’으로 명시된다. 그러나 이렇게 명시되는 순간 그것은 존재하기를 그만둬 버린다. 지금 있는 ‘지금’은 명시된 ‘지금’과는 다른 ‘지금’이며, 따라서 ‘지금’이란 지금 있으면서 더 이상 지금이 아닌 것임이 판명된다. 우리에게 명시되는 ‘지금’은 벌써 지나가 버린 ‘지금이었던 것’으로서, 이것이 ‘지금’의 진리이다.
헤겔의 시간성에 관해 현대 철학자들은 ‘끝은 곧 시작이다.’라며 요약하여 해석하곤 한다. 이를 시적 정서와 연계해 보면, 시에서 마침표도 하나의 마무리이지만, 동시에 여백을 남기고 독자에게 이어지는 의미를 상상할 수 있게 여지를 열어 준다. 존재가 살짝 물러난 자리에 부재가 번지고, 그 부재는 오히려 긴 여운을 만든다. 영화관 불이 켜지는 순간 이야기는 끝났지만, 관객의 머릿속 필름은 여전히 돌아간다. 그와 같은 원리가 작용한다.
헤겔의 변증법과 해체주의에서 말하는 여백(공백) 개념을 결합하면, 마침표는 단순히 문장이나 사건의 끝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진행 중인 한순간의 변화를 나타낸다. 마침표 뒤에 남은 여백은 단순한 공백이 아니라, 독자가 시의 정서를 탐구하고 상상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한다.
마침표가 문장을 끝내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 뒤에는 언제나 ‘다음에 무엇이 올까?’라는 의문과 기대감이 머리를 든다. 이와 함께 ‘아직 끝나지 않았다.’라는 열림이 자리한다. 이는 새로운 사유나 변화가 일어날 수 있는 공간을 열어 두는 것이다. 가령 “접동 / 접동 / 아우래비 접동”의 행간의 여백은 단순히 글자가 없는 공간이 아니다. 독자가 사유하고 느낄 수 있는 여유를 제공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이는 가청적 심상과 리듬을 타고 흐르는 청각적 심상의 정서를 사유하거나 상상할 수 있게 열어 놓은 것이다. 시에서 여백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시적 정서나 이미지를 전달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런 여백을 두면 독자는 자신의 경험이나 정서를 채워 넣을 수 있다. 이는 마치 빈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는 것처럼, 독자의 상상력과 해석을 자극한다. 이를 통해 시적 정서의 여운을 만들어 낸다.
예를 들면, 김소월의 「진달래꽃」 원문에서 “삽분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는 마침표가 없다. 시적 화자는 이별을 마주하지만, 그 정서는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흐른다. 또한, 마지막 행의 “죽어도아니 눈물흘리우리다” 뒤에 마침표가 없기에, 이별은 멈추지 않고 독자 내면에서 상념(想念)으로 이어 간다. 이들 연의 끝에 마침표가 있다면, 정서는 그 순간 닫혀 흐름을 멈춘다. 독자는 이별의 정서를 단일하게 수렴한다. 정서는 갑자기 고요해지고, 독자는 그 순간의 정서를 고정 형태로 받아들인다. 마침표는 ‘모든 것이 이 순간에 정리된다.’라는 단호한 인상을 남긴다. 이후 시의 정서는 더는 열리지 못하고 고요히 닫힌다.
이육사(1904~1944)의 『육사시집』(서울출판사, 1946)에 수록한 「청포도」(15~16쪽)의 5연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과 마지막 연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역시 원문에 마침표 없이 자연스러운 호흡과 리듬으로 열린 정서로 이어 간다. 이는 여름의 염원과 해방의 기미를 여백 속에 매단 ‘열린 종결(open ending)’이다. 일반 서사의 ‘열린 결말(open ending)’이 이후의 사건을 독자에게 위임한다면, 시적 ‘열린 종결’은 정서의 흐름이 독자 안에서 오래 머물게 한다. 그 흐름의 틈새에서 해석의 가능성 또한 자연스레 피어난다.
시에서도 일반 서사의 ‘열린 결말’처럼 완전히 숨기는 결말을 장치하기도 한다. 시에서 열린 종결은 호흡과 여백을 남겨 독자의 내면에서 시적 정서가 지속되도록 하는 표현 기법이다. 마치 숨을 완전히 멈추지 않고 남겨 두는 호흡과 같다. 이는 시를 ‘완성되지 않음’ 속에서 상상의 폭을 더욱 풍부하게 만든다.
반면, 교과서에 삽입한 마침표는 역동성을 묶어 둔다. 종결 기호가 ‘해석의 안전벨트’를 채우는 셈이다. 학생 독자가 흔들리지 않고 정답(표준 해석)에 도달하도록 안내하려는 교육적 전략이지만, 그만큼 텍스트의 다성(多聲)은 잠재운다.
나아가 마침표는 독자를 무대로 초대한다. 웹툰의 마지막 컷이 검은 여백으로 끝나면 독자는 다음 주 이야기를 상상하며 댓글을 단다. 사진 속 한쪽 끝의 빈 공간에는 자연스럽게 서사가 채워진다. 시의 마침표 하나를 담벼락에 난 창문처럼 안과 밖을 동시에 열어 두어, 닫힌 듯 열려 있는 풍경을 만들어 낸다.
무엇보다 마침표는 침묵을 통해 더 큰 목소리를 낸다. 법정의 망치 소리 뒤를 채우는 정적, 추모식의 묵념처럼, 말 없는 순간이야말로 가장 큰 울림을 품는다. 시의 마침표는 “여기서 멈춰라.”가 아니라 “이제부터 스스로 듣고 사유하고 상상하라.”는 초대이다. 언어가 놓아준 자리에 독자의 정서가 다리를 놓는다.
언어와 문화적 맥락을 바탕으로 의미를 이해하는 해석학적 관점에서 시를 볼 때, 언어적 표현과 해석자의 주관적 경험을 중요시한다. 가다머(Hans-Georg Gadamer, 1900~2002)의 해석학은 ‘마침표’가 아닌 ‘전체와 부분 간의 해석 구조’로 접근한다.
어떤 텍스트를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은 줄곧 기획을 하는 셈이다. 텍스트에서 최초의 의미가 드러나는 순간부터 해석자는 텍스트 전체의 의미를 미리 염두에 두게 된다. 더 나아가 그런 의미가 드러나는 것도 텍스트를 특정한 의미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읽어 나갈 때에만 비로소 가능하다.
이처럼 해석학에서 중요한 개념인 ‘해석학적 순환(hermeneutic circle)’은 전체와 부분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이해가 이루어진다고 본다. 또한, 해석자는 자신의 경험, 배경, 문화적 맥락을 통해 텍스트를 해석하기 때문에 절대적인 객관성은 존재할 수 없다는 관점이다. 해석학자들이 구체적 기호로서의 마침표에 대해 언급한 적은 없다. 하지만 ‘해석학적 순환’, ‘절대적 객관성의 부재’ 측면에서 볼 때, 마침표의 유무는 시인의 의도적 장치이다. 이는 독자의 자유로운 해석의 문제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아래 창작 사조와 비평 방법론별 관점 분석으로 이어 간다.
[신기용]
문학 박사
도서출판 이바구, 계간 『문예창작』 발행인
경남정보대학교 겸임교수
저서 : 평론집 10권, 이론서 3권, 연구서 3권, 시집 6권
동시집 2권, 산문집 2권, 동화책 1권, 시조집 1권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