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페소에 살아있는 그리스와 로마
역사는 힘이며 살아있는 유적이다. 힘 있는 자가 역사를 지배한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지배를 받던 튀르크에의 에페소에 그리스와 로마가 유적이 고스란히 찬란하게 살아있었다.
그리스에서 크루즈를 타고 에게 바다를 건너 튀르크에 이즈미르에 도착하여 옛 그리스와 로마의 유적을 보려고 에페소로 떠난다. 에페소 기행은 쉬린체 마을부터 시작된다. 쉬린체 마을은 오스만 튀르크 지배 때 그리스도교인들이 이주해 와서 살았던 마을이다.
주류 생산지로 유명하다. 쉬린 체는 튀르크에게서 가장 비싼 와인을 생산하는 곳으로 각종 과일주를 만들어 팔고 있었다. 사프란블루 등 다양한 와인을 만드는 고산 마을이었다. 산으로 오는 길은 아주 위험한 난 코스였다. 길을 따라 잘 가꾸어진 올리브 나무가 산 전체에 조성되어 있었다. 올리브 생산의 최대지역으로 수확한 판로는 국가에서 매수해 간다. 마을에서 와인 시음을 하고 나서 에페소로 향하였다.
에페소에 남은 찬란한 그리스와 로마
에페소엔 그리스와 로마 제국의 유산을 옮겨 놓은 듯 그대로 볼 수 있었다. 원래 이곳엔 그리스인이 살았으나 훗날 로마인이 튀르크에를 지배하면서 그리스 문명의 토대 위에 로마 문명을 활짝 일으킨 곳이다. 그 후 계속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게 된 에페소는 로마의 소아시아 서부지역 수도가 되었고 상업과 교역의 중심지가 되어 정치적, 경제적 번성기를 맞이하였다.
BC 88년 그리스 영토인 에페소 시민들이 로마의 지배를 받자 이에 항거하여 반란을 일으켰으나 로마의 실라(Sylla)장군은 에페소를 완전히 초토화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BC27∼AD14년) 때 다시 건설된 이 도시는 로마의 아시아 속주의 정치, 상업, 문화의 중심지다.
에페소는 이즈미르(Izmir)로부터 74km 거리에 있는 도시로 바울 시대에 번창한 항구였으나 지진과 해일 스나미로 카이스트로스강을 타고 온 토사가 항구를 묻어 없어진 도시였다. 근래에 와서 토사 속에 묻힌 도시를 재발견하게 된 유적이다. 바다는 에페소로부터 멀리 물러나 있지만 원래 이곳은 항구였다. 에페소는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다가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해방되었고 대왕이 죽은 후, 에페소는 대왕 휘하의 장군 리시마코스가 경기장, 체육관, 원형 극장을 세워 에페소를 크게 발전시켰다. 상업의 중심지로 AD 1세기에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165m에 이른 도로를 건물 밀집 지역으로 만들어 25만 명이 살았던 도시였다.
그리스도교가 전파되기 전의 로마인들은 알테미스 여신을 숭상했다. 에페소의 고대 도시의 대로를 따라 유적이 늘어서 있었다. 초입에 다산의 여신인 알테미스가 24명의 남자를 거느리고 살았다. 그 남자들이 거리에 서 있었다. 그녀는 프리섹스의 여신이었다.
히드리안 신전 앞에 행운의 여신 메두사가 머리카락을 나부끼며 서 있었다. 거리를 걷다가 바리오 목욕장에서 걸음을 멈춘다. AD 1세기에 만들어진 목욕탕인데 현대적 탈의실, 냉실, 미온실, 온실, 사우나실 등이 잘 갖추어져 있었다. 아고라 시청사는 AD 3세기에 완공 되었는데 시의 공식적인 업무를 보는 사무실로 쓰였다.
바실리카 대성전 오데온은 공중 집회소로 시 의회실로 쓰였다. 무대 뒤편으로 두 줄의 기둥이 서 있는 그곳이 민주적으로 재판하는 법정 바실리카가 있었다. 오데 온(Odeon)은 서기 150년 경에 지은 극장인데 원로 회의장과 연극을 상연하는 장소로 1,500명 정도를 수용할 수 있었다. 메비우스의 기념비은 도미티아누스 광장의 산기슭에 뫼비우스의 가족 이름을 새겨진 기념 동상이다.
히포크라테스의 병원 분점도 있었다. 그때부터 뱀 표시는 병원, 의사를 상징하는 마크였다. 헤르메스상은 올림포스 12신 가운데 주신 제우스와 아틀라스의 딸 마이아 사이에서 태어난 헤르메스를 상징하는데 가축의 증식을 관장하는 부와 행운의 신, 길을 지배하는 신, 통역, 상업, 꿈을 옮겨다 주고 경계를 지키는 신으며 죽은 자를 지하 세계로 인도하는 신이기도 하였다. 지팡이와 샌들이 트레드마크로 오늘날 샌들로 만들어 사용하였다.
니케(Nike)는 승리의 여신상이다. 로마 신화의 빅토리아에 해당한다. 그녀는 팔라스와 스틱스의 딸이다. 제우스와 아테네의 종자(從者)이며, 날개가 있고 종려나무 가지와 방패, 월계관을 가진 것이 특징인데, 전쟁의 여신 아테네와 모습이 비슷하다. 나이키의 로고가 바로 이 여신에게서 나왔다. 폴리오의 우물은 에페소의 부자 폴리오와 그의 가족의 후원으로 만들어졌다. 큰 분수대가 있었는데 이 도시의 수돗물을 공급하는 물 저장 탱크다. 트로이 전쟁 이후 오디세우스의 포리펨의 모험을 보여 주는 동상도 발굴되었다.
도미티아누스의 신전은 서기 81~96년 사이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만든 신전으로 발굴된 도미티아누스 동상의 팔과 머리 부분은 현재 에페소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트라이아노(Traianus) 황제 기념 분수는 AD 2세기 초에 세워졌으며, 12m 높이의 트라이아노 황제 동상은 그 발목에서 물이 흘러나오도록 설계되었다. 물은 수로를 통해 귀족계층 가정과 목욕탕에 공급됐다고 한다.
하드리아누스 신전은 에페소의 히드리 안 신전으로 2세기경에 하드리안 황제와 에페소의 시민, 아르테미스 여신을 위해 지어졌다. 조각이 무척이나 아름답다. 안으로 들어가면 아테네, 아폴로 신 등 여러 신이 조각되어 있으며 테오도시우스 황제와 그의 아버지, 아내, 아들도 조각되어 있다. 공중화장실 아래에 수로가 흐르고 배수망이 잘 연결되어 U자형 구멍으로 용변을 본 후에 변기 앞에 흐르는 물로 오물을 깨끗이 씻어내는 비데 시설로 되어있었다.
셀시우스 도서관은 크레테스 거리를 한참 내려가며 셀시우스 도서관이 기둥만 우뚝하게 남아 있었다. 에페소 유적들 가운데 가장 훌륭한 것 중 하나로 손꼽힌다. 셀시우스 도서관에 책들은 파피루스에 레드카펫이나 모자이크로 장식되어 있었다. 높은 초석 위에 세워진 이 건축물은 넓은 계단을 통해 올라갈 수 있게 되었다. 셀시우스 도서관은 서기 135년, C. Aquila에 의해 아시아 지역의 통치자였던 아버지, 플레마이아누스를 기리기 위하여 지어졌다.
이 도서관에는 세 개의 문이 있는데 상단부터 지혜, 운명, 지식을 상징하는 문으로 정결한 여성상으로 장식되어 있다. 셀시우스의 무덤은 중앙 적소 아래 지하에 있다. 당시 세계 3대 고대 도서관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페르가문 도서관 또는 셀시우스 도서관이다. 셀시우스는 당시 이 지역의 총독으로 부임해 통치하였으며 이곳에서 생을 마쳤다고 한다. 도서관은 많은 부분이 무너졌지만, 외벽은 아직도 굳건히 서 있다. 재미있는 것은 이리저리 연결된 도서관의 지하 통로가 홍등가와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다.
야외 원형 극장은 클라디우스 황제(AD 41-54)때 공사가 시작되어 트라장크드(Trajanghkd) 황제(AD 98-117)때 완성되었다. 노천극장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다. 약 25,000명의 관중을 수용할 수 있는 대형극장이다. 3단 구조이며 각 단은 22계단으로 되어있다. 사도 바울이 선교 중 은세공 장인과 논쟁이 붙었던 곳이다. AD 2세기 초에 완공되었으며, 지금도 공연 장소로 이용되고 있다.
건축 초기에는 공연을 위한 곳으로만 이용되었지만, 특별한 날엔 로마 제국 때 유행하던 검투사들과 맹수의 결투를 볼 수 있었다. 지금은 세계의 유명한 음악가들이 이 무대에 서기를 선호한다. 소리의 울림이 과학적으로 설계되어 있어서 그 어떤 공연장보다 소리의 울림이 좋다는 것이다. 창녀의 집, 원형극장 바로 옆의 파란 건물은 창녀의 집이다. 창녀의 집은 거리의 가장 번화한 그곳에 있었는데 공연장에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었다. 창녀 환영시대로 당시 창녀는 고급 직업군이며 사회적인 중추인물이었다.
오스만제국의 형성
6세기 중반 돌궐(튀르크)족은 동북아시아로부터 페르시아에 이르는 제국을 세웠다. 돌궐은 한나라에 의해 밀려나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옮겨와 자리를 잡았다. 11세기에 튀르크 유목민의 한 집단 오구즈족이 동쪽으로부터 이동해 와서 튀르키에에 안주한다. 이후 튀르크족은 이슬람화 되었고, 최초의 무슬림 왕조인 셀주크가 등장한다. 셀주크 제국은 11세기경부터 14세기까지 중앙아시아와 중동 일대를 다스린 수니파 무슬림 왕조이며, 중앙아시아의 부족 연합체로 발흥하여 중동에서 튀르크 세력의 시조를 이루었다.
13세기 말에 이르러 셀주크는 몽골의 침입으로 완전히 세력을 상실하고, 몇몇 토후국으로 분할되었다. 카이족의 오스만 1세가 오스만 왕조를 세웠다. 오스만 왕국이 탄생하여 이스탄불을 수도로 정하고 서쪽의 모로코부터 동쪽의 아제르바이잔, 북쪽의 우크라이나에서 남쪽의 예멘에 이르는 광대한 영역을 지배한 제국이었다.
아나톨리아(소아시아)의 소 군주국 오스만 왕조는 동로마 제국과 동유럽의 기독교 제국, 맘루크 왕조, 서아시아·북아프리카의 이슬람교 제국을 정복하여 지중해 세계의 과반을 차지한 세계 대제국인 오스만제국으로 발전하였다.
14세기 후반 오스만 쪽은 마침내 서부 아나톨리아와 남동부 유럽의 비잔틴 영토를 차지하고 그리스도교를 신봉하는 발칸 국가들을 속국으로 삼았으며, 동부 아나톨리아의 투르크멘 공국을 점령했다.
15세기 초반 오스만제국은 발칸 속국들을 직접 통치하고, 1453년 비잔티움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하여 유프라테스 강과 헝가리까지 영토를 넓혔다. 16세기 후반에는 그 세력이 절정에 달해 발칸 제국과 중부 유럽의 헝가리, 중동, 북아프리카 지역 대부분을 포함하는 대제국을 건설했다.
오스만제국의 멸망
오스만제국은 술탄 쉴레이만 1세(1494년)의 통치 이후에 쇠퇴기를 맞았다. 18세기부터 오스만제국이 분열로 멸망하였다. 1718년경 오스트리아가 헝가리에서 오스만 튀르크족을 축출했으며, 러시아는 1783년에 크리미아를 빼앗았다. 그리스도 1830년, 영국의 지원을 받아 독립하였고 1881년에는 루마니아, 세르비아, 몬테네그로가 독립하였으며 1908년에는 불가리아, 1912년에는 알바니아가 독립하였다. 이렇게 오스만 튀르크는 방대한 제국을 잃고 앙카라의 튀르키에로 좁혀졌다.
[김용필]
KBS 교육방송극작가
한국소설가협회 감사
한국문인협회 이사
한국문인협회 마포지부 회장
문공부 우수도서선정(화엄경)
한국소설작가상(대하소설-연해주 전5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