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셰익스피어 4대 비극 중 하나로 꼽히는 '리어 '은 켈트 신화로 알려진 레어 왕(King Leir) 전설이 원전이다. 총 5막으로 구성돼 있으며, 셰익스피어가 집중적으로 비극을 집필하던 시기인 1605년에 쓰인 것으로 추정되며 1608년에 간행되었다. 이야기는 브리튼의 왕인 리어가 자신의 나라를 딸들에게 나누어주고 정권에서 물러나기 위한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리어에게는 세 딸이 있다. 첫째, 고너릴, 둘째, 리건, 막내딸 코딜리아이다. 첫째와 둘째는 아버지의 권위에 빌붙어 사는 사람들인 반면, 셋째는 진심으로 아버지를 위하는 딸이다. 한 가지 흠이 있다면 너무 솔직해서 입에 발린 말을 못한다는 것, 언니들처럼 아버지에게 아부하지 못한 코딜리아는 리어왕의 노여움을 사 브리튼국의 어떤 유산도 받지 못한 채 쫓겨나 그녀에게 구애했던 남자 둘 중 하나인 프랑스 왕과 함께 프랑스의 왕비로 지참금도 없이 시집을 간다.
모든 재산과 권세를 두 딸과 사위들에게 양도한 리어왕은 한 달은 첫째 딸, 한 달은 둘째 딸 집을 번갈아 다니며 여생을 보내려 했으나, 이미 빈껍데기가 된 아버지 왕을 공경하지 않는 두 딸들에 의해 쫓겨나 비참한 삶을 살게 된다. 이러한 가족에 대한 배신은 리어왕의 충신 중 하나인 글로스터 백작의 집에서도 일어난다. 그에게 아들이 둘 있는데 서자인 첫째 에드먼드와, 적자인 둘째 에드거이다. 글로스터 백작은 이 두 아들을 차별 없이 사랑했지만, 법적으로 적자인 에드거에게 모든 권한이 있으므로 에드먼드는 그것을 질투하여 아버지를 속여 에드거를 추방하게 된다.
에드먼드는 나아가 리어왕을 몰래 도우려는 아버지를 고발하여 아버지 또한 두 눈을 뽑혀 추방당하게 한다. 브리튼을 둘로 나눠가진 두 자매 사이에도 질투와 배신은 끊이지 않는다. 첫째에게 쫓겨난 아버지를 둘째가 박대하는 과정에서 둘째의 남편 콘월 공작이 죽고, 콘월 공작에게 충성을 맹세했던 에드먼드는 첫째 공주에게 붙어 그에게 사랑을 맹세하고 그리고 돌아와선 둘째 공주에게도 사랑을 맹세한다. 한 남자를 사이에 둔 두 자매는 질투로 서로를 독살하고 자결하는 결말에 이른다.
선한 인물은 첫째 공주의 남편 올바니 공작과 셋째 딸 코딜리아, 그리고 켄트 백작이다. 그 중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은 켄트 백작인데 그는 리어왕의 충신 중 하나로 막내딸 코딜리아를 쫓아낼 때 리어왕을 말리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 추방되었지만 곧 변장을 하여 다시 자신의 주군인 리어왕 근처에서 그를 보필한다. 그리고 올바니 공작과 함께 프랑스 왕비 코딜리아에게 리어왕을 구명해 줄 것을 요청한다. 이 일로 프랑스와 브리튼은 전쟁을 하는데, 그만 프랑스가 지고 만다. 리어왕과 코딜리아는 전쟁 포로로 잡혀왔고, 에드먼드의 계략으로 코딜리아는 죽임을 당하고 만다. 이에 상심한 리어왕까지 죽음을 맞이하면서 이야기가 마무리된다.
비극의 핵심은 자녀를 대하는 태도에 있다. 리어왕은 딸 들은 충성맹세라는 말로 판단하고 마음에 드는 말이 아니라고 해서 자식과 인연을 경솔한 사람이다. 첫째와 둘째에게 아버지는 자기들에게 권세를 물려줄 사람일 뿐 아버지에게서 원하는 것을 받자마자 괄시를 시작한다. 결국 욱하는 성격과 독선과 아집, 권위주의적 성격으로 똘똘 뭉쳐진 리어왕은 효심 가득한 셋째 딸의 진심과 진정성을 외면하고 사탕발림으로 사랑을 말한 큰딸과 둘째 딸에게 영토와 재산을 나눠주고도 온갖 수모와 박해를 받고 견디지 못하여 폭풍우와 비바람이 거세게 몰아치는 광야에 미친 모습으로 뛰쳐나가 거지와 같은 신세가 되고 만다.
서자로 태어난 에드먼드는 자신의 목적을 위해 하에 형도 아버지도 배신해 버리는 사람이다. 이들에게서 사랑의 마음은 없다. 그저 자신을 위한 욕구만 있을 뿐, 사랑이란 자신의 비인간적인 모습을 위장하고 목적 달성을 위한 도구일 뿐 이들의 사람에 대한 태도는 이 이야기가 비극으로 치닫는 원인이 된다. 한편, 타인을 도구가 아닌 존중할만한 인격체로 바라본 사람들이 있다. 정직할망정 비굴하지 않았던 셋째 딸 코딜리아, 주군에게 쫓겨나고도 그를 위해 변장까지 하면서 곁을 지켰던 켄트 백작, 주군의 어려움을 외면하지 않았던 글로스터 백작, 서자인 동생을 아무 의심 없이 믿었던 에드먼드 등 타인을 도구가 아닌 인격으로 대하고 그들의 중심에는 사랑이 있었다. 악인의 삶 속에는 비극으로 치닫는 욕망의 충돌이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독자들에게 어떤 삶을 선택할 것인가를 묻고 있는 작품이다.
17세기에 쓰인 작품이 오늘날 우리에게 돌봄의 주체와 책임에 대해 묻고 있다. 즉 돌봄은 가족에게는 사람 노릇을 하기 위한 의무이다. 작품은 돌봄과 부양의 책임에 대해 국가와 사회, 가족의 책임에 대해 이야기한다. 돌봄은 돌봄 부양자인 가족들에게 많은 것들을 포기하게 만든다. 일상생활, 취업, 취미, 개인적인 사생활까지도 다 내려놓고 돌봄을 하는 사람들의 정신적 피폐와 육체적 노고는 이루 말할 수 없이 크다. 돌봄을 해보지 않은 사람은 돌봄을 모른다. 우리나라에서 돌봄은 거의 가족이 떠맡고 있다.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그러나 돌봄의 의무에서 파생하는 문제는 심각하다. 우선 가족의 돌봄은 경제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초 고령 사회에 접어들면서 주변에 요양원, 요양병원, 주간보호센터 등이 눈에 뜨이게 늘어나고 있다. 거기에 더하여 책의 등장인물처럼 아픈 가족을 돌봐야 하는 처지에 있으면서 경제력이 없다면 어떻게 돌봄의 의무를 행해야 할까. 우리는 이제 돌봄에 대해서 국가적이고 사회적인 화두로 올려놓고 본격적으로 토의할 시간이 되었다.
사람은 누구나 늙고 병든다. 내가 지금 젊다고 해서 이 젊음이 영원하지 않다. 우리 모두 언젠가 돌봄의 대상자이며 순식간에 돌봄의 대상자가 될 수도 있다. 그때 가족 난만이 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현대사회의 노인 돌봄은 어느 개인과 가족의 문제가 아니라 결국 국가와 사회, 국민 우리 모두가 함께 해결해야 할 숙제다. '긴 병에 효자 없다'라는 말이 있다. 돌봄의 무게와 아픔을 새파란 하늘의 맑은 마음으로 나누고 함께하는 그런 나라, 사회, 우리들이었으면 한다.
[민병식]
에세이스트, 칼럼니스트, 시인
현) 한국시산책문인협회 회원
2019 강건문화뉴스 올해의 작가상
2020 코스미안뉴스 인문학칼럼 우수상
2022 전국 김삼의당 공모대전 시 부문 장원
2024 제2회 아주경제 보훈신춘문예 수필 부문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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