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번에 쓴 글 '한산도대첩 직전 왜선의 규모와 이동 경로'에서 1592년 7월 8일(음력)에 벌어진 한산도대첩에 참전한 일본군 함대의 규모와 이동 경로를 살펴보았다. 이 글에서는 한산도대첩 시기 조선 수군이 쳐부순 왜선 규모에 대해 살펴본다.
충무공 이순신의 장계 「견내량파왜병장」은 한산도대첩의 전투 경과를 자세히 기록한 자료이다. 이 장계에 따르면 왜선은 대선 36척, 중선 24척, 소선 13척(총 73척)이 한산도대첩에 참전했으며, 이 전투에서 조선 수군은 왜선 59척을 분멸하고 나머지 14척은 도주하였다. 「견내량파왜병장」에 기록된 왜선 분멸 규모는 현재 학계에서 거의 정설로 다루어지고 있다. 다음은 그 해당 기록이다.
「견내량파왜병장」
(1592년 7월 7일) 목동 김천손이 신(전라좌수사 이순신) 등의 수군을 바라보고는 급히 달려와서 보고하기를 "적선 대·중·소 총 70여 척이 금일 미시(오후 1~3시)에 영등포 앞바다로부터 거제와 고성 경계인 견내량에 이르러 정박하였습니다."라고 하기에 <<중략>> 대선 36척, 중선 24척, 소선 13척(총 73척)이 진을 벌이고 정박해 있었습니다. <<중략>> 그들의 선발 선박 59척을 한산도 바다 가운데로 끌어내어 남김없이 불태우고 ...
* 영등포: 경남 거제시 장목면 구영리 구영등성 일대
* 견내량: 경남 통영시 용남면 장평리와 거제시 사등면 덕호리 사이 위치한 해협
「견내량파왜병장」은 분멸한 왜선 59척 가운데 17척은 어느 장수가 붙잡았는지 하나하나 자세히 서술하였는데, 그 내용이 너무 많아 위에 나타내지 못하였다. 「견내량파왜병장」은 도주한 왜선 14척이 대선 1척, 중선 7척 소선 6척이라는 점도 서술하였다.
분멸한 왜선 숫자를 더 자세히 따지기에 앞서, 「견내량파왜병장」이 기록한 왜선의 '대선', '중선', '소선'의 의미부터 설명해야 할 것 같다. 아마도 많은 분이, 대선은 아다케부네(안택선-安宅船)이며, 중선은 세키부네(관선-関船)이고, 소선은 고바야부네(소조선-小早船)라고 알고 계실 것이다. 하지만 이는 확실한 근거를 가진 정보가 아니다.
임진왜란 시기 일본은 전국시대가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군용 선박이 통일된 규격을 따르지 않았다. 충무공이 조정에 보내는 장계에 표현된 왜선 크기 '대선', '중선', '소선'은 임의로 구분하여 서술한 것이다. 아마도 충무공은 왜선 크기를 어떻게 구분하여 표현할지 고민했을 것이다. 다음 기록은 이러한 충무공의 고민을 엿볼 수 있는 자료이다.
「당포파왜병장」
사천 선창을 바라보니 산이 7∼8리쯤 구불구불 이어졌는데 <<중략>> 왜선은 누각 같은 모습의 것 12척이 언덕 아래 줄지어 정박해 있었고
[원문] 望見泗川 船滄 則一山逶迤七八里許 <<중략>> 倭船狀如樓閣者十二隻 列泊岸下
『난중일기』 비망록, 「당포파왜병장」 초안
곧바로 사천 선창에 이르니 적의 무리가 무려 300여 명이 산봉우리에 진을 치고 있었고, 봉우리 아래에는 배를 줄지어 놓았는데, 대선 7척, 중선 5척이 많은 기치를 세우고 날뛰며 소리를 질러대므로 <<후략>>
[원문] 直到泗川船倉 則賊徒無慮三百餘名 峯山結陣 列船峯下 大舡七隻中隻五隻 多樹旗幟 踴躍叫噪爲白去乙 (中隻은 中舡의 오기이다)
* 「당포파왜병장」 초안의 번역문과 원문은 각각 『충무공이순신전집』(최두환, 제1권 『완역 초서체 진중일기』, 1999, 우석)에 수록된 번역문과 『이순신의 일기』(박혜일 외 3명, 2016, 시와진실)에 수록된 원문을 참조하여 작성하였다.
* 『충무공이순신전집』은 「당포파왜병장」 초안에 기록된 사천 선창에 있던 왜군 숫자를 '350여 명'으로 서술하였다. 이 책의 역자는 나중에 '350여 명'이 '300여 명'을 잘못 쓴 것이라고 밝혔다.
위 두 기록은 1592년 5월 29일(음력)에 벌어진 사천해전 상황을 묘사한 자료이다. 「당포파왜병장」은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충무공이 1592년 조선 수군의 제2차 출전 시기 전투 경과를 조정에 보고한 장계이다. 이 장계에는 사천해전, 당포해전, 당항포해전, 율포해전 4개 해전의 전투 경과가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당포파왜병장」 초안은 『난중일기』에 비망록 형태로 수록된 기록들 가운데 하나로서, 충무공이 「당포파왜병장」을 조정에 올리기 전에 작성한 초안으로 생각된다.
『난중일기』는 일기 이외에 편지, 장계 초안, 선물 목록 등 여러 종류의 글을 포함한 비망록도 기록되어 있다. 시중에 출간된 많은 『난중일기』 번역본 가운데 이들 비망록을 소개한 번역본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러한 『난중일기』 번역본 가운데 『충무공이순신전집』(제1권 『완역 초서체 진중일기』, 1999, 우석)은 비망록 번역문을 실었고, 『이순신의 일기』(박혜일 외 3명, 2016, 시와진실)는 비망록 원문을 실었으므로 비망록에 관해 보다 자세히 알고 싶으신 분들은 이들 책을 참고하시길 바란다.
「당포파왜병장」은 사천해전 때 사천 선창에 정박한 왜선 규모를 누각과 같은 것 12척이라고 기록하였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그 규모를 '대선 12척'으로 알고 있다. 이에 비해 「당포파왜병장」 초안은 그 규모를 대선 7척, 중선 5척으로 기록하였다. 「당포파왜병장」과 그 초안에 기록된 왜선 크기가 서로 다른 점을 고려하면, 충무공이 사천 선창에 정박했던 왜선 크기를 어떻게 구분하여 서술할지 고민했음이 틀림없다.
한산도대첩 시기 왜선 규모는 대선 36척, 중선 24척, 소선 13척인데, 아마 이때도 충무공은 왜선 크기를 구분하는 것에 대해 골머리를 앓았을 것이다. 필자는 저번에 쓴 글 '한산도대첩 직전 왜선 규모와 이동 경로'에서 『정만록』에 실린 한산도대첩 기록을 소개하였는데, 이 기록에는 한산도대첩 시기 왜선 규모에 대해 '왜선 70여 척 안에 대선 1척과 함께 그 나머지 중선·소선이 뒤섞여'라고 묘사되어 있다. 또한 『난중잡록』은 그 규모를 ‘대선 10척, 중·소선 70여 척’으로 서술하였다. 즉, 임진왜란 시기 왜선 크기는 보는 사람에 따라 서로 달라질 수 있다. 『난중잡록』의 경우는 전체 왜선 규모를 80여 척으로 기록한 특이점도 있다.
특히 왜선 가운데 소선에 관한 부분은 추가로 언급해둘 점이 있다. 앞에서 말했듯이 소선을 고바야부네(소조선-小早船)로 알고 계시는 분들이 많다. 하지만 한산도대첩 시기 전투 상황을 들여다보면, 이는 잘못된 정보임을 발견할 수 있다.
한산도대첩 당시 일본군은 조선 수군의 유인책에 걸려 조선 수군을 쫓아가다가 한산도 부근 바다에서 많은 왜선이 분멸을 당했다. 이 말은, 왜선 70여 척이 모두 전투에 적극적으로 참전했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고바야부네 급으로 알려진 왜선은 주로 정찰용이나 연락용으로 사용되던 소형 선박이다. 이런 소형 선박을 이용하여 130~140여 명이 탑승한 조선 수군의 대형 선박인 판옥선을 쫓아가서 공격한다는 것이 과연 상식적인 이야기인가?
임진왜란 당시 판옥선은 크기가 거대하여, 일반적인 왜선으로는 일본군의 주요 전투 전술인 등선육박전술(登船肉薄戰術-적의 배에 올라타서 백병전을 벌이는 전술)을 사용하기가 쉽지 않았음은 널리 알려진 이야기이다. 이러한 까닭으로 정유재란 이전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아다케부네 급의 거대 왜선을 다수 건조했다는 사실도 널리 알려져 있다. 해전에 관해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도 고바야부네 같은 작은 크기의 선박으로 판옥선을 쫓아가 전투를 벌이는 행위는 하지 않을 것이다.
왜선 크기에 대해 너무 장황하게 설명하였는데,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자. 충무공은 「견내량파왜병장」에 한산도대첩에서 분멸한 왜선을 59척이라고 기록하였다. 그런데 『선조실록』에는 이와 조금 다른 기록이 있다. 다음은 그 해당 기록이다.
『선조실록』 권27, 선조25년-1592년 6월 21일 기유 4번째 기사
7월 6일 이순신과 이억기가 노량에서 모였는데, 원균은 부서진 배 7척을 수리하여 먼저 와 정박해 있었다. 적선 70여 척이 영등포에서 견내량으로 옮겨 정박하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8일에 수군이 바다 가운데 이르니 <<중략>> 예기(銳氣)를 이용하여 그들을 무찌르고 화살과 포환을 함께 발사하여 적선 63척을 불살라버리니(焚賊船六十三艘), 남은 적 400여 명이 배를 버리고 육지로 올라 달아났다.
위 내용은, 1592년 조선 수군의 제1차~제3차 출전 시기에 벌어진 주요 전투를 간략히 서술한 『선조실록』 기사에서 한산도대첩에 관한 기록의 일부를 옮겨놓은 것이다. 위 기록을 살펴보면 한산도대첩이 벌어지기 직전 내용은 「견내량파왜병장」의 내용과 대체로 일치한다. 그런데 분멸된 왜선의 숫자가 63척으로 기록되어 「견내량파왜병장」에 기록된 59척보다 4척이 많다. 63(六十三)과 59(五十九)는 한자 모양이 크게 다르므로 충무공의 장계 내용을 조정에서 단순히 오기했다고 보기도 어렵다.
위 『선조실록』의 기사는 날짜가 6월 21일로 되어 있어서 한산도대첩이 벌어진 날짜보다 더 이르다. 아마 『선조실록』이 편찬될 때 해당 사초를 너무 앞쪽의 날짜에 집어넣은 듯하다. 이 기사 아래쪽에는 사관(史官)이 기록한 사론(史論)이 실려 있는데, 충무공이 장계를 들려 보낸 군관이 선조의 질문에 대답한 내용이 그 안에 기록되어 있다. 이점을 고려하면 해당 사초는 한산도해전 직후 충무공의 장계가 조정에 도착했을 즈음 작성된 것으로 보인다.
『선조실록』과 「견내량파왜병장」 가운데 어느 쪽이 옳은가를 묻는다면, 아마 『선조실록』보다는 「견내량파왜병장」이라고 답하시는 분이 대부분일 것이다. 전투 현장을 직접 경험한 충무공이 작성하고 그 내용 또한 자세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금만 더 깊이 생각해보면, 이는 쉽게 단정하기 어려운 문제이다.
한산도대첩은 전라좌수영, 전라우수영, 경상우수영이 참전한 전투이다. 당시 전라좌수사였던 충무공 이순신이 「견내량파왜병장」을 작성한 것처럼, 전라우수사 이억기와 경상우수사 원균 또한 각각 장계를 작성하여 조정에 올렸음이 거의 분명하므로 『선조실록』의 기사에 기록된 한산도대첩 시기 분멸된 왜선 숫자 63척은 수군절도사 3명의 장계를 종합한 결과로 보인다.
『난중잡록』은 한산도대첩 시기 도주한 왜선 숫자를 10척으로 기록하였는데, 이는 「견내량파왜병장」에 기록된 도주한 왜선 14척보다 4척이 적다. 만일 왜선이 14척이 아니라 10척이 도주한 것이 사실이라면 분멸된 왜선은 「견내량파왜병장」에 기록된 59척에 4척을 더하여 63척이 되는데, 이는 『선조실록』에 기록된 숫자와 일치한다. 단순한 우연이라고 말하기에는 매우 공교롭다.
어느 사료를 취하여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한산도대첩 시기 분멸 왜선 규모가 달라질 수 있다. 최소한 「견내량파왜병장」의 기록이 100% 옳다고 단정하기 어렵다.

임진왜란 시기 경상감사의 참모였던 이탁영(李擢英, 1541~1610)의 일기 『정만록』에도 한산도대첩 시기 분멸된 왜선 숫자를 밝힌 기록이 있다. 다음은 그 해당 기록이다.
『정만록』
진주판관 김시민의 급보에서 복병장이 보고하기를 "7월 8일에 전라수사와 본도 수사(경상도 수사) 등이 당포(唐浦) 경내에서 전투를 벌여 왜선 55척을 부수니 익사자도 많았고, 적선 대략 20여 척이 세력이 약해져 도주하니 양수사(兩水使)가 추격하여 가덕진 방향으로 갔다고 하며 ..." <<후략>> 양수사(兩水使)가 50여 척을 부수었다는 소식은 비록 수사의 급보가 없다고 하더라도 확실한 것 같습니다.
* 참고자료: 『역주 정만록』(이호응 역주, 1992, 의성문화원)
위 『정만록』의 기록은 한산도대첩 시기 분멸된 왜선을 55척으로 서술하였다. 이는 「견내량파왜병장」의 기록보다 오히려 4척이 더 적은 숫자이다. 게다가 도주한 왜선은 20여 척으로 서술하였다. 『정만록』의 기록은 진주판관 김시민 휘하 복병장의 보고 내용을 옮긴 것으로서, 전투 전과와 관련이 없는 제3의 인물에게서 나온 '객관적'인 자료라고 할 수 있다.
「견내량파왜병장」, 『선조실록』, 『정만록』 가운데 어느 기록이 한산도대첩 시기 분멸된 왜선 숫자를 정확히 밝혔다고 말할 수 있을까? 어느 사료를 선택하든 반론의 여지가 생기므로 그 숫자를 단정하기는 어렵다. 단, 이들 복수의 기록을 서로 비교하여 그 숫자가 55~63척 또는 그에 가깝다고 결론지을 수는 있겠다.
일본 측 사료인 『고려선전기(高麗船戰記)』는 한산도대첩 때 불에 탄 왜선 규모를 39척으로 기록하였다. 위에서 살펴본 우리나라 여러 자료에 나타나는 기록을 통해 『고려선전기』의 기록은 사실에 조금 못 미치는 숫자임을 입증할 수 있다.
[참고자료]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한국고전종합DB, 『난중잡록』
조성도 역, 『임진장초』, 2010, 연경문화사
이호응 역주, 『역주 정만록(征蠻錄)』, 1992, 의성문화원
최두환, 『충무공이순신전집』, 제1권 『완역 초서체 진중일기』, 1999, 우석
최두환, 『새 번역 진본 초서체 난중일기』, 2022, 한국문학방송
박혜일·최희동·배영덕·김명섭, 『이순신의 일기』, 2016, 시와진실
김시덕 역, 『고려해전기(高麗船戰記)』, 『문헌과 해석』 제57호, 2012, 태학사
(이 책의 역자는 한국어로 뜻이 잘 통하도록 책 제목 '高麗船戰記'를 '고려해전기'로 옯겼다고 밝혔다.)
[윤헌식]
칼럼니스트
이순신전략연구소 선임연구원
저서 : 역사 자료로 보는 난중일기
이메일 : thehand8@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