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폭삭 주저앉은 기분으로 넷플릭스 신작을 들여다보던 그녀다. 믿고 보는 배우 박보검과 아이유의 감성에 스며들었다. 화면 속 로맨스가 반짝이는 순간, 문득 여고 시절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 시절, 그녀는 불투명한 진주 같았지만, 나는 조용히 주시하고 있었다.
‘거기 누구 없어요?’ 교실 한곳에서 터져 나온 고요 속의 외침은 올림포스산까지 울릴 듯했다. 벽을 튕겨 돌아온 소리는 소녀의 가슴에 부메랑으로 박혔고, 속삭임은 빠져나갈 수 없는 올무 같았다. 허무에 굴복하고 싶지 않은 새내기의 열망이 그것을 주물럭거렸다.
교실 뒤에 앉아 그녀를 지켜보던 ‘나’는 할리퀸 로맨스 책이다. 학급 문고의 책꽂이에서 나를 발견한 소녀의 눈빛은 순식간에 불타는 갈망으로 번뜩였다. 나를 품에 안고 그리스 로마 신화처럼 매력적인 활자의 세계로 빨려 들어갔다.
칠흑 같은 현실에 갇힌 소녀에게 나는 태양 같은 존재였다. 상상하며 위안을 찾는 그녀에게 하데스 같은 신은 어울리지 않았다. 태양이 사랑한 나는 아폴론, 한송이 백장미를 보듯 그녈 귀히 여겼다. 그녀는 나를 통해 가난을 벗어던지고 로맨스의 여왕으로 군림했다. 할리퀸의 세계에서 소녀는 언제나 해피엔딩을 꿈꿀 수 있었다.
어느 날, 급우들이 돌려보던 잡지 속 펜팔 명단에서 그녀가 눈길을 멈췄다. 유럽을 꼼꼼히 훑던 그녀는 그리스나 이탈리아 이름이 없다는 사실에 실망했다. 차선책으로 고른 영국의 ‘Kenneth Storry’, ‘Storry’를 ‘Story’로 잘못 읽었다. “이야기라니, 이건 운명이야!”라며 설레는 소녀가 모처럼 소녀다웠다.
백지에 색연필로 싱그러운 녹색 식물을 그리고, 한 글자 한 글자 정성껏 영어 편지를 써 내려갔다. 금빛 머리칼과 푸른 눈동자를 가진 미소년을 상상하며, 향기 나는 작은 돌에 답장이 온다는 주문을 봉투에 붙이고 우체통에 넣었다. 그 모습이 평소답지 않게 십 대 같아 마음이 짠했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한 달이 지나도 답장은 오지 않았다. 친구들은 이미 답장이 왔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그녀는 매일 우편함을 붙잡고 말했다. “편지가 왔는데 네가 숨긴 거지? 어서 내놔!” 억울한 우편함은 그녀의 조바심을 견뎌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우편함이 외쳤다. “학생, 왔어! 왔다고!”
가방을 팽개친 그녀가 편지봉투를 조심스레 뜯었다. “글씨체 통과! 꼬불꼬불 악필이 아니네.” 환한 표정으로 편지를 읽는 그녀이다. 그는 정원사로 책을 사랑한다. 그녀가 정성껏 그린 식물 그림과 고운 글씨체에 감동했다는 편지에 그녀는 확신했다. “내 정성이 대양을 건너 영국에 닿았어. 이건 천생연분이야.”
바다를 사이에 두고 둘은 편지를 주고받았다. 전지가위를 쥔 손으로 정원을 가꾸는 그의 모습을 상상하며 그의 일상을 추측했다. 짧은 영어 탓에 마음을 온전히 전하지 못할 때면 아쉬웠지만, 편지를 주고받는 기쁨은 그녀를 점점 더 또래답게 물들이며 가슴에 박힌 부메랑을 뽑아냈다.
어느 날, 반장이 그녀를 교무실로 불렀다. 영어 편지 쓰기 대회 안내문을 받은 그녀는 펜팔에게 쓴 편지를 그대로 베껴 제출하고는 까맣게 잊어버렸다. 올림포스 의 신, 나 아폴론은 편지가 돋보일 빛을 소량 뿌렸다. 그녀는 장려상에 뽑히고, 예쁜 손목시계도 받았다. 신화에 빠진 소녀에게 나는 상상도 가끔은 현실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싶었다.
신도 때로는 어쩔 수 없는, 현실이 가혹했다. 소녀의 집주인 아줌마는 당뇨 합병증으로 쓰러졌다. 병원비와 치료비를 감당하기 위해 집을 처분해야 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소녀의 엄마는 날벼락 같은 상황에 무거운 침묵으로 한숨을 쉬었다. 산소가 소진된 잿더미 같은 집의 공기는 텁텁했다. 퇴근길에 엄마는 새 보금자리를 찾아 헤맸다. 나는 고단한 엄마에게 마음씨 고운 동료를 붙여주었다. 두 사람이 힘을 모은 덕분에 더 나은 집을 얻게 되었다. 소녀의 집에 다시 산소가 흘렀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신인 나는, 인간과의 접점에서 하나를 주면 하나를 거두어야 했다. 이삿짐을 싸는 와중에 Ken의 새 주소가 적힌 편지를 그녀 몰래 내 몸에 감췄다. 새집에서 아무리 뒤져 보아도 그 편지만은 찾을 수 없으리라. 올림포스 신전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소녀와의 짧은 만남은 한여름 밤의 꿈처럼 짧았지만 짜릿했다.
메마른 여고 시절 그녀가 학급 문고에서 발견한 할리퀸은 유일한 일탈이었다. 소녀들의 로맨스와 환상을 활자로 채워주던 할리퀸은 당시 소녀들의 종교였다. 시대는 변했다. IT 광풍과 6G 속도로 퍼지는 K-웹소설이 할리퀸의 자리를 꿰찼다. 버터 바른 활자 대신, 된장 묻은 글자가 소녀들의 새로운 신앙으로 자리매김했다. 변화의 광풍에 직격탄을 맞은 할리퀸은 얼마 전 폐간되어 과거에 묻혔다.
십 대 소녀들의 가슴을 뛰게 하는 로맨스물은 가파르게 변했다. 한때 할리퀸의 활자가 그려준 금빛 머리칼의 아폴론은 이제 스마트폰 화면 속 K-드라마 배우로, 웹소설 속 운명적인 사랑으로 다시 태어났다. 그들은 더 이상 우편함을 붙잡고 기다리지 않는다. 한 손에 든 화면을 스크롤 하며 한 편의 웹소설, 쇼츠 영상으로 마음을 순식간에 적신다.
K-로맨스는 국경을 넘어 실시간으로 전 세계 소녀들의 상상을 사로잡고 있다. 그녀는 만감이 교차했다. 현실과 상상의 경계에서 알고리즘과 팬덤이 짜낸 새로운 꿈이 소녀들의 심장에 로맨스의 다리를 놓는다. 더 화려하고, 더 빠르며 더 상상에 가까운 해피엔딩이 낚시해 두근거리는 밤이다.
[민은숙]
시인, 칼럼니스트
제4회 코스미안상
제3회 문학뉴스 &시산맥 기후환경문학상
2024 중부광역신문신춘문예
청주시 1인 1책 펴내기 지도 강사
꿈다락학교 시 창작 강사
문화재단 & 예술재단 창작지원금 수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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