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벼랑 끝의 거래, 혹은 평화라는 이름의 폭탄
세상은 때로 아주 얇은 종이 한 장 위에 적힌 몇 줄의 문장으로 인해 요동친다. 도널드 트럼프, 그 이름만으로도 이미 태풍을 몰고 다니는 미국 대통령이 던진 '우크라이나 평화 계획'이라는 문서는 단순한 제안서가 아니었다. 그것은 차라리 뇌관이 제거되지 않은 불발탄에 가까웠다.
붕괴 직전의 위태로운 상황, 그 속에서 미국과 우크라이나, 그리고 유럽이라는 거대한 세 대륙의 기류가 맹렬하게 충돌하고 있다. 이것은 단순히 땅을 나누는 문제가 아니다. 피로 쓰인 역사와 자존심, 그리고 무엇보다 '정의'라고 믿는 가치들이 정면으로 부딪치는 지점이다. 우리는 지금, 현대 외교사가 기록될 가장 뜨거운 페이지를 목격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피 묻은 땅은 거래될 수 있는가?
협상 테이블에 올려진 조건은 너무나도 명확해서 오히려 잔인했다. 핵심은 하나, 바로 '영토'였다. 트럼프의 계산기 속에서 돈바스(도네츠크와 루한스크)는 협상을 위한 매물일지 모르나, 젤렌스키에게 그곳은 단순한 행정 구역이 아니다. 그곳은 수많은 젊은이가 조국의 깃발을 지키기 위해 피를 뿌린 성소(聖所)와도 같다. "러시아에 땅을 떼어주고 평화를 사라"는 제안은, 전쟁으로 상처 입은 우크라이나의 영혼에 소금을 뿌리는 것과 다름없었다. 젤렌스키가 이 제안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등을 돌린 것은 오만이 아니라, 살아남은 자가 짊어진 무거운 책임감 때문이었다. 영토 할양은 곧 패배를 인정하는 것이며, 그 어떤 지도자도 자신의 손으로 국가의 팔다리를 잘라내는 문서에 서명할 수는 없는 법이다. 트럼프가 "실망했다"라고 말할 때, 젤렌스키는 아마도 "비통하다"라고 속으로 삼켰을 것이다.
모욕을 넘어선 각성, 유럽이 뭉치다
바다 건너 들려온 트럼프의 독설은 유럽의 잠든 자존심을 건드렸다. 그는 유럽을 향해 "나약한 자들이 이끄는 쇠퇴하는 공동체"라고 조롱했다. 나토(NATO)를 자신의 보호 아래 있는 어린아이 취급하며 "나를 아빠라고 부른다"라는 농담 섞인 비하를 던졌을 때, 유럽의 공기는 싸늘하게 식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 모욕은 유럽을 하나로 묶는 접착제가 되었다. 젤렌스키는 런던으로 날아가 영국의 키어 스타머, 프랑스의 마크롱, 그리고 독일의 프리드리히 메르츠와 손을 맞잡았다. 이것은 단순한 회동이 아니었다. "우리는 미국의 부속물이 아니다"라는 무언의 항변이자, 트럼프의 일방적인 '거래'에 맞서 '가치'를 지키려는 공동 전선의 구축이었다. 누군가에게 무시당할 때 비로소 자신의 힘을 확인하게 되는 것, 그것이 지금 유럽이 겪고 있는 역설적인 성장통이다.
거래자, 수호자, 그리고 자립하려는 자
이 사태를 깊이 들여다보면, 단순히 정치적인 다툼을 넘어 세 가지 거대한 세계관이 충돌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모든 것을 이익과 손해의 대차대조표로 바라보는 트럼프의 '거래적 세계관', 피와 흙으로 맺어진 주권은 타협할 수 없다는 우크라이나의 '결사적 항전', 그리고 더 이상 미국의 그늘에만 머물 수 없음을 깨달은 유럽의 '전략적 자율성' 추구가 그것이다. 독일 야당 대표 메르츠가 "미국이 구해주지 않아도 좋다, 우리 스스로 해결하겠다"라고 쏘아붙인 장면은 상징적이다. 이것은 과거의 동맹이 해체되는 소리가 아니라, 새로운 질서가 태동하는 산통(産痛)의 소리다. 세상은 변하고 있고, 각자는 자신의 생존 방식을 치열하게 모색하고 있다.
평화는 종이 위가 아닌, 사람의 마음에 있다
결국 이 모든 소란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젤렌스키의 거절도, 트럼프의 분노도, 유럽의 결집도 결국은 '평화'라는 단어를 향해 있다. 하지만 그 평화의 정의가 서로 너무나 다르다는 것이 비극의 시작이다. 누군가에게 평화는 '총성이 멈추는 것'이고, 누군가에게는 '정의가 바로 서는 것'이며, 또 누군가에게는 '자존심을 지키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묻지 않을 수 없다. 진정한 평화란 강대국의 펜 끝에서 그려지는 국경선인가, 아니면 그 땅에 사는 사람들의 안온한 삶인가? 붕괴 직전의 평화안은 우리에게 묻고 있다. 당신이 생각하는 정의로운 평화는 과연 얼마짜리냐고. 이 혼란 속에서도 분명한 것은, 헐값에 넘겨진 평화는 결코 오래가지 못한다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