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 배우 조진웅을 둘러싼 ‘두 번째 기회’ 논쟁은 한 개인의 도덕성 문제로만 보기에는 그 결이 훨씬 깊고 복합적이다. 이 사건은 한국 사회에서 정의와 도덕이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는지, 그리고 그 정의가 누구에게 유리하게 설계되어 있는지를 드러내는 하나의 징표이다. 많은 이들이 불편함과 분노를 표하는 이유도 사실 개인의 과거 행적 때문이라기보다, 실패와 회복을 대하는 우리 사회의 태도가 얼마나 불평등하게 계급화되어 있는지를 본능적으로 감지했기 때문이다.
이 논쟁의 중심에는 우선 한국 사회가 상정하는 ‘도덕성’이 있다. 하지만 그 도덕성은 평등을 전제로 작동하지 않는다. 상층의 일탈은 종종 ‘실수’로 치부되며 쉽게 ‘복구’되는 반면 하층의 일탈은 인생 전체를 무너뜨리는 낙인이 되기 때문이다. 동일한 과오가 계급에 따라 전혀 다른 운명을 낳는 이중적 현실은 ‘갱생’을 허락받는 직업군의 차이에서도 드러난다. 연예인, 운동선수, 예술가처럼 대중의 감정을 매개로 서사를 재구성할 수 있는 이들에게 실패는 종종 ‘새로운 이야기’가 된다. 그들의 재기는 감동과 용기의 서사로 포장되고, 대중은 그들을 통해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본다.
그러나 이러한 관대함은 특정한 조건에서만 작동한다. 한 개인의 재기가 어느 순간 도덕적 위선을 정당화하거나, 과잉 칭찬으로 변질되는 순간 대중의 감정은 빠르게 냉각된다. 이 반응은 단순한 시기나 질투라기보다 “왜 어떤 사람은 용서받고 나는 그렇지 못 한가”라는 더 근본적인 불평등 감각에서 비롯된다.
분노의 화살은 개인을 향하지만, 그 감정의 근원은 제도적 불평등과 사회 구조에 닿아 있다. 그렇기에 우리 사회에서 ‘두 번째 기회’는 공정한 갱생의 서사가 아니라 이미 사회적 지위를 증명한 사람에게만 허락되는 특권처럼 작동한다. 그 과정에서 구조적 비리, 권력층의 은폐, 그리고 하층에게는 부여되지 않는 회복의 기회 같은 근본적 문제는 가려진다.
성공도 실패도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인간사다. 그러나 지금의 한국 사회는 이 당연한 사실조차 받아들이기 어려운 불평등의 구조에 갇혀 있다. 누구의 실패는 감동적인 성공 서사가 되지만 누구의 실패는 영원한 낙인으로 남는다. 이런 현실 속에서 대중은 ‘성공 신화’에 지치고, 분노는 종종 잘못된 방향으로 향한다.
정작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그 분노의 근원이자 도덕과 정의가 어떻게 계급적으로 작동하는가에 대한 성찰일 것이다. ‘두 번째 기회’가 일부에게만 허락되는 사회는 결국 누구에게도 안전하지 않다.
[이진서]
고석규비평문학관 관장
제6회 코스미안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