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필자는 2024년 초에 '임진왜란 시기 권관의 위상'이라는 제목의 글을 쓴 적이 있다. 이 글에서 충무공 이순신의 『난중일기』와 『임진장초』 그리고 『명종실록』 등에 나타난 여러 기록을 근거로 들며, 조선 전기·중기 권관은 종9품 품계(品階)에 한정된 관직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그런데 2024년 말에 이를 뒷받침해줄 수 있는 학술 논문이 나와 그 내용의 일부를 소개하고자 한다.
여러분이 인터넷을 통해 역사 관련 사이트를 검색하거나 역사 관련 연구 자료를 찾아보면, '권관'이라는 관직에 대해 대부분 '종9품의 무관직'이라는 의미로 정의하고 있다. 조선 후기 영조 시대에 편찬된 법전 『속대전』이 권관의 품계를 종9품으로 규정한 점이 그 이유일 것이다. 그런데 조선 후기 법전에 있는 규정이 조선 전기나 중기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을까? 또한 이를 뒷받침해주는 사료는 존재하는가? 이러한 의문에 답해주는 연구 자료는 최근까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2024년 말에 이르러서야 조선시대 관직 '권관'에 천착하여 이를 자세히 분석한 학술 논문이 나와 다행이 아닐 수 없다. 필자도 이 논문이 나온 사실을 약 1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우연히 알게 되어 상당히 아쉬웠다. 이 학술 논문은 약 39쪽에 이르는 짧지 않은 분량이므로 일반인들이 읽기에는 조금 부담스럽거나 지루하게 느낄 수 있다. 그러한 까닭으로 해당 논문에서 설명에 필요한 내용만을 뽑아 아래에 인용한다.
이철희, 「조선시대 權管의 제도화와 인사운용」, 『군사』 132, 2024,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306쪽, 316쪽)
당시(16세기) 만호와 권관의 호칭에 대해 관청의 공문서에서조차 혼란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같이 검토한 바에 따라 16세기 사료에 만호로 표기되는 인물의 상당수가 권관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권관의 자급은 9품에서 5품 사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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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관의 관품은 『속대전』에 종9품으로 규정되어 있었으나 실제 그들의 자급이 종9품인 것은 아니었다. 원칙적으로 권관은 당하관이었지만 조선시대에 그들의 자급은 다양하였다. 권관은 조선 중기에는 만호진을 지휘하면서 사료에 만호로 기록되기도 하였고, 조선 후기에는 초급무관을 위한 권관 자리와 경력이 오래된 무관을 위한 권관 자리를 따로 설치하였다. 일부 연구에서 조선시대 사료의 권관을 일괄적으로 종9품으로 단정하거나, 16세기 사료에 기록된 만호를 모두 종4품으로 보는 것은 재고할 필요가 있다.
위 논문은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나 한국학술지인용색인(kci.go.kr) 사이트에 공개되어 있으니 보다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으신 분들은 직접 찾아보시길 바란다. 아무쪼록 이러한 훌륭한 연구 자료가 널리 알려져 "조선시대 관직 권관은 종9품에 한정된 벼슬이다"라는 기존의 잘못된 인식이 조속히 불식되었으면 좋겠다.
참고로 아래는 조선 중기 권관의 품계가 종9품이 아니라는 점을 잘 보여주는 자료이다. 이 자료는 영암 밀양박씨 문중에서 소장하고 있는 1593년 박광춘(朴光春)에게 내려진 고신교지(告身敎旨)로서, 군공에 대한 포상으로 박광춘을 창신교위훈련원판관겸삼천진권관(彰信校尉訓鍊院判官兼三千鎭權官)으로 임명한 문서이다. 창신교위는 종5품의 무신(武臣) 품계로서 종9품과는 8단계의 커다란 품계 차이가 있다.


그런데 권관의 품계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의문을 제기하는 분이 계실 수도 있을 듯하다. "조선시대 권관이 종9품이든 그렇지 않든, 그것이 그렇게 중요한 문제인가?"라고 말이다. 권관의 품계는 권관이 부임하는 진포(鎭浦)의 위계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만일 권관의 품계를 단순히 종9품으로 인식한다면, 조선시대에 권관이 부임하던 진포(鎭浦)의 위계 또한 그러한 수준으로 인식하게 되는 중대한 오류를 일으키게 된다. 여러분의 이해를 돕기 위해 아래에 인용한 연구 자료의 내용을 살펴보자.
『조선시대수군진조사3 - 경상우수영편』, 2016,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186쪽)
『선조수정실록』에는, 1592년에 원균이 율포 만호(栗浦萬戶) 이영남(李英男)을 이순신에게 보내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율포진은 1530년에서 1643년 사이에 권관진에서 만호진으로 승격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輿地圖書』와 『선조실록』을 보면, 여전히 율포진을 권관진으로 소개하고 있다. 따라서 『선조수정실록』의 내용이 잘못되었거나, 혹은 『선조수정실록』 작성이 시작된 1643년 즈음해서 율포진이 만호진으로 승격된 것으로 보이나 자세한 내용은 알기 어렵다.
조선시대 경상우수영의 수군진(水軍鎭)에 대해 조사한 연구 자료 『조선시대수군진조사3』에 언급된 위 내용은 수군진 율포(栗浦)에 관한 것이다. 율포진은 조선 전기에 지금의 거제시 장목면 율천리 326번지 일대에 있었으며, 조선 후기에는 지금의 거제시 동부면 율포리 율포 마을 일대에 있었다.
위 연구 자료는 '율포 만호'가 언급된 『선조수정실록』의 기사를 근거로 하여, 율포진이 1530년에서 1643년 사이에 권관진에서 만호진으로 승격된 것으로 추정하였다. 또한 『輿地圖書(여지도서)』와 『선조실록』에 율포진이 권관진으로 소개된 점을 근거로 하여, 1643년 즈음해서 만호진으로 승격되었을 가능성도 있다고 언급하였다. 즉, 율포에 부임하는 수령이 권관과 만호 어느 쪽인가에 따라 수군진 율포의 위계를 권관진 또한 만호진으로 판단하고 있다.
하지만 앞에서 살펴본 논문 「조선시대 權管의 제도화와 인사운용」에 따르면, 조선 전기 권관의 품계는 5~9품으로 다양하였고 또한 권관이 만호진을 지휘하면서 사료에 만호로 기록되기도 하였다. 조선 전기 수군진에 권관과 만호 누가 부임하느냐에 따라 해당 수군진의 위계가 바뀌는 것이 아니었다. 다시 말하자면 위에 나타난 『조선시대수군진조사3』의 내용은 명백한 오류이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현 국립해양유산연구소)가 발간한 『조선시대수군진조사』에 나타난 연구 내용의 오류까지 굳이 들춰가면서 설명한 까닭이 있다. 『조선시대수군진조사』는 국가유산청 산하 기관인 국립해양유산연구소에서 많은 시간과 인원을 투입하여 발간한 뛰어난 학술 자료이다. 현재까지 조선시대 전라우수영, 전라좌수영, 경상우수영, 경상좌수영, 경기지역에 이르는 5책의 수군진조사보고서가 나와 있는데, 우리나라 공공 연구 기관에서 발간된 '대표적'인 수군진 연구 자료라고 할 수 있다. 필자도 이 자료를 수시로 참고하고 있으며, 그때마다 자료의 높은 수준과 내용의 풍부함에 혀를 내두른다.
그런데 이러한 훌륭한 학술 자료조차 조선 전기 권관의 품계와 권관이 부임하는 수군진의 위계에 대해 오류를 보이고 있으니, 다른 연구 자료들은 어떠하겠는가? 앞으로 권관 품계에 관한 잘못된 인식이 하루 빨리 고쳐지길 바랄뿐이다.
[참고자료]
이철희, 「조선시대 權管의 제도화와 인사운용」, 『군사』 132, 2024,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조선시대수군진조사3 - 경상우수영편』, 2016,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현 국립해양유산연구소)
[윤헌식]
칼럼니스트
이순신전략연구소 선임연구원
저서 : 역사 자료로 보는 난중일기
이메일 : thehand8@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