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막의 신비와 예수 그리스도, 장재형목사


장재형목사가 전하는 히브리서 9장 묵상으로 성막과 성전의 예표, 단번의 속죄, 새 언약의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양심의 정결과 영과 진리의 예배를 깊이 조명한다.


히브리서 9장을 따라가다 보면, 신앙의 중심이 어디에 놓여야 하는지에 대한 날카로운 질문이 우리 앞에 서게 된다. 장재형목사가 풀어낸 이 본문은제사장논쟁을 넘어성소의 문제로 시선을 옮기며, 흔들리는 공동체의 영혼 한복판을 겨냥한다. 편지의 일차적 수신자였던 예루살렘의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은 로마 제국의 회유와 핍박 속에서 정체성의 뿌리부터 흔들리고 있었다. 그들에게 예루살렘 성전은 단순한 종교 시설이 아니라 민족의 심장, 역사와 언약이 응축된 기억의 요새였다. 그러므로예수 그리스도께서 참 대제사장이시다라는 선언이 끝나는 지점에서 곧바로그렇다면 참된 성전, 참된 성소는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뒤따르는 것은 자연스럽다. 장재형(Olivet University 설립)목사의 해설은 바로 이 연결을 놓치지 않고, 성막과 성전이 지녔던 압도적 상징성을 다시 불러내어 오늘의 독자에게도 동일한 선택을 요구한다. 우리는 무엇을 붙잡고 있는가. 손으로 지은 성소인가, 아니면 하나님이 여신 더 크고 온전한 길인가.


성막의 기원은 광야의 역사와 분리될 수 없다. 하나님은 시내산에서 돌판을 주셨고, 그 돌판은 언약궤 안에 안치되었다. 그리고 그 궤를 모시기 위해 장막이 세워졌다. 히브리어 미쉬칸은거처라는 뜻을 품고 있는데, 이것은 단지 이동식 텐트라는 물리적 형태를 넘어하나님이 당신의 백성 가운데 거하시겠다는 파격적인 약속을 담는다. 눈으로 볼 수 없고 손으로 만질 수 없는 초월의 하나님이, 죄와 상처로 얼룩진 인간 역사 안으로 임재하겠다고 선언하신 것이다. 그래서 성막은 종교적 장식물이 아니라만남의 장소였다. 인간이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를 하나님이 친히 지정하셨다는 사실, 그리고 그 만남이 죄사함의 절차를 통과해야만 가능하다는 사실이 성막 제도의 심층에 놓여 있다. 장재형목사가 반복해서 강조하듯, 성막 의식의 두 축은예물속죄이며, 그중에서도 죄를 씻는 일이 생명의 관문을 연다.


성막의 구조는 단순하지만 그 상징은 깊다. 울타리로 둘러싸인 뜰을 지나면 물두멍이 있고, 장막 안은 성소와 지성소로 갈라진다. 성소에는 등잔대와 떡상이 놓이고, 지성소에는 언약궤가 자리한다. 무엇보다 지성소는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곳이라는 금기 자체로 거룩을 선포한다. 오직 대제사장만이, 그것도 일 년에 한 번, 피를 들고 들어간다. 이 제도가 말해주는 것은 단순히 질서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죄의 무게다. 죄는 가볍게 넘길 수 있는 실수가 아니라, 생명의 값이 지불되어야만 덮일 수 있는 실재다. 히브리서가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다고 말할 때, 그것은 잔혹한 종교적 기호가 아니라 죄와 거룩 사이의 간극이 얼마나 심연인지 드러내는 신학적 언어다. 장재형목사는()’라는 글자에 담긴 제사의 형상학을 소개하며, 고대의 언어 자체가 피의 대가, 생명의 교환을 직관적으로 각인하고 있음을 환기한다. 그것은 문자와 문화까지도 죄사함의 원리를 향해 열린 창문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히브리서 9장의 논지는구약 제사가 틀렸다가 아니다. 오히려 그 제도는 하나님이 마련하신 교육적 장치, 현재까지의 비유였다. 여기서비유는 단순한 이야기 기법이 아니라 모형, 상징, 예표라는 의미에 더 가깝다. 장재형목사는 이 지점을타입(Type)과 실체(Antitype)’의 관계로 설명하며, 성막이 본래 하늘의 원형을 따라 만들어진카피그림자임을 부각한다. 그림자가 있다는 것은 빛이 있다는 증거이며, 모형이 있다는 것은 실체가 곧 온다는 예고다. 그러므로 구약의 장막 제도는마침내 오실 분을 해설하는 거대한 주석이었다. 그 주석의 정점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다. 하늘의 참 성소, 손으로 짓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영역이 그리스도 안에서 열렸다.


이 대목에서 히브리서의 독자들은 두 가지 유혹 사이에 서 있었다. 하나는 보이는 안전이다. 예루살렘 성전, 익숙한 제사, 뚜렷한 의복과 계급을 가진 제사장 체계는 위기의 시대에 심리적 피난처가 되기 쉽다. 다른 하나는 보이지 않는 약속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성령의 내적 증언, 그리고한 번에, 단번에이루어진 속죄는 눈에 잡히지 않지만 영원하다. 로마가 원했던 것은 바로 첫 번째 유혹을 자극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예루살렘 교회를 흔들어 옛 질서로 되돌려 놓는 것, 그들의 정체성을 성전이라는 물리적 중심에 묶어두는 것. 장재형목사는 이 역사적 긴장을 배경으로, 히브리서가 단순한 교리 강의가 아니라 생존을 건 변증문임을 상기시킨다. 믿음은 관념이 아니라, 흔들리는 시대에 무엇을 최종 권위로 삼을지 결정하는 실존적 선택이다.


히브리서가 이 논의를 전개하는 방식은, 단순히새것이 좋다는 감각적 비교가 아니다. 오히려 율법이 요구한 조건을 정면으로 통과하며, 그 조건이 가리키는 궁극을 드러내는 치밀한 변증이다. 유대 전통에서 제사장은 레위 지파, 그중에서도 아론의 자손에게만 허락된 직분이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제사장이라 부르는 순간, 혈통이라는 장벽이 즉시 등장한다. 장재형목사의 설명처럼 히브리서는 이 장벽을 회피하지 않고, 시편 110편이 말하는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영원한 제사장이라는 예언을 소환한다. 멜기세덱은 계보가 강조되지 않는 신비한 인물로서, 단지 제사장일 뿐 아니라 왕으로도 묘사된다. 이는 제사장 직분이 단순한 세습 제도가 아니라, 하나님이 친히 세우시는 영원한 중보의 자리임을 암시한다. 결국 예수의 제사장직은 레위의 계보에 기대지 않고, 하나님 자신의 맹세와 약속에 근거한다. 이것이 히브리서가 말하는 새 언약의 견고함이다. 혈통은 역사 속에서 끊기지만, 하나님의 맹세는 끊기지 않는다.


또한 성소의 중심에 놓인 언약궤는, 단지 과거의 유물이 아니라 구원의 언어로 충만한 상징이었다. 궤 안에 들어 있던 만나 항아리는 광야에서의 공급을 기억하게 하고, 싹난 아론의 지팡이는 하나님이 세우신 권위와 생명의 기적을 증언하며, 돌판은 언약의 말씀을 품는다. 그 모든 것을 덮고 있는 속죄소는 말 그대로덮음의 자리이며, 피가 뿌려지는 장소다. 장재형목사가 말하듯, 그룹들이 날개를 펴 속죄소를 가리는 형상은 거룩의 경계가 얼마나 엄중한지를 시각적으로 선포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 덮음은 하나님이 죄인을 멸절시키는 대신, 피의 대가를 통해 만나 주시는 긍휼의 방식이기도 하다. 이 긍휼의 언어는 신약에서 더욱 선명해진다. 예수는 최후의 만찬에서언약의 피를 말씀하시며, 출애굽기 24장에서 모세가 피를 뿌리며이는 언약의 피라선포했던 장면을 자신에게로 끌어오신다. 옛 언약의 피 뿌림이 공동체를 언약 안으로 묶었다면, 새 언약의 피는 공동체를 그리스도 안으로 다시 빚어낸다.


지성소로 들어가는 길을 막던 휘장은, 죄로 인해 단절된 인간의 현실을 상징한다. 그 휘장 뒤편은 거룩의 심장부이지만, 동시에 접근 불가의 금지 구역이다. 이 금지는 하나님의 배타성이 아니라, 죄를 품은 인간이 거룩 앞에서 소멸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비극적 진실을 드러낸다. 복음서가 예수의 죽음 순간에 성전 휘장이 찢어졌다고 증언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 사건은이제 길이 열렸다는 선포이며, 히브리서가 말하는 바, 그리스도의 몸이 곧 새롭고 산 길이 되었다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장재형목사의 강조처럼, 우리는 더 이상 빈손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다만 그 손에 쥐는 것은 공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에 대한 신뢰다. 그러므로담대함은 무례가 아니라, 은혜가 허락한 자녀의 권리다.


이 담대함은 교회를 향한 실제적 요청으로 이어진다. 예배당이라는 공간은 여전히 소중하지만, 그것이 하나님을 가두는 성전이 될 수는 없다. 오히려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새 언약의 표지로서, 말씀과 성례와 공동체적 섬김을 통해 성령의 임재를 증언하는 자리여야 한다. 장재형목사 설교가 현대 신자에게 던지는 경고는 분명하다. 형식이 실체를 대신하기 시작할 때, 우리는 다시 성소를 우상화한다. 반대로 실체를 붙들 때, 형식은 살아난다. 성찬은 종교적 의례가 아니라 언약의 피를 기억하는 사건이 되고, 회개는 자기비하가 아니라 양심이 씻기는 해방이 되며, 섬김은 의무가 아니라 새 생명의 자연스러운 호흡이 된다. 이렇게 복음이 중심이 될 때, 교회는 로마의 압력이나 시대의 조롱 앞에서도 자기 정체성을 잃지 않는다. 그 정체성은우리는 성전이 무너져도 무너지지 않는 분을 의지한다는 고백에서 나온다.


히브리서 9장은 대제사장의 출입 규례를 언급하며, 옛 제도가 지닌 한계를 정확히 지적한다. 구약의 예물과 제사는 섬기는 자를양심상온전하게 할 수 없었다. 여기서 양심은 단지 도덕적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인식하는 내적 법정이다. 죄는 외부 행동으로만 환원되지 않고 마음의 영역에서 증식한다. 십계명의 마지막이 탐심을 다루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외면의 규율이 내면의 욕망을 제어하지 못하면, 인간은 결국 경건의 껍데기 속에서 자기 의를 축적하며 하나님을 이용하려 들기 쉽다. 그래서 예수는 음욕을 품는 마음 자체를 간음이라고 하셨고, 미움의 씨앗이 살인의 뿌리라고 가르치셨다. 장재형목사가구약은 겉을 씻었지만 양심을 근본적으로 씻지는 못했다고 말할 때, 그것은 율법을 폄하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한계를 통해 복음의 심연을 드러내는 방식이다. 물로 씻는 정결을 넘어, 성령으로 씻기는 새 질서가 열려야 했기 때문이다.


개혁할 때까지라는 표현은 시대의 전환을 암시한다. 히브리서가 말하는 개혁은 취향의 개선이 아니라 질서 자체의 교체다. 성막과 제사의 세밀한 규정이새로운 질서가 올 때까지맡겨졌다는 말은, 하나님이 역사를 통해 단계적으로 당신의 구원 계획을 계시해 오셨음을 보여준다. 장재형목사는 이 점을개혁(Reformation)’의 정신과도 연결한다. 교회의 개혁은 새 종교를 창안하는 일이 아니라, 성경이 말하는 실체로 돌아가는 회귀의 결단이다. 인간이 세운 제도의 권위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단번의 속죄가 신앙의 토대가 될 때, 교회는 비로소 본령을 회복한다. 그러므로손으로 지은 성소를 절대화하는 유혹은 고대 유대인에게만 있었던 문제가 아니다. 오늘의 신앙인도 여전히보이는 종교성보이지 않는 복음사이에서 갈등한다. 성전이든, 제도든, 전통이든, 그것이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표지판을 넘어 목표가 되는 순간, 우리는 다시 그림자에 매달리게 된다.


히브리서의 놀라운 전복은 여기서 절정을 이룬다. 그리스도는 염소와 송아지의 피가 아니라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다. 단번이라는 말은 단순한 횟수의 절감이 아니다. 그것은 구원의 효력이 시간의 마모를 받지 않는다는 선언이며, 죄사함이 반복적 거래가 아니라 확정된 언약임을 뜻한다. 장재형목사의 언어로 말하자면, 십자가는 저주가 아니라 속량의 대가다. 유대 전통이나무에 달린 자는 저주받았다는 규정을 통해 십자가를 해석하려 들 때, 그 해석은 배도의 씨앗이 되기 쉽다. 그러나 복음은 동일한 사건을 정반대로 읽는다. 저주의 상징처럼 보이는 십자가가 사실은 죄를 대신 짊어진 사랑의 극치이며, 그 사랑이 죄의 빚을 갚아 자유를 선물한다. ‘()’이 조개 패와 매매의 형상으로 이루어졌다는 문화적 관찰은, 구원이 값싼 면제가 아니라, 실제로 값을 치르는 해방임을 더욱 선명하게 만든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성령의 역할을 놓칠 수 없다. 그리스도의 피는 단지 역사적 사건으로서만 효력을 갖지 않는다. 그 사건이양심을 씻는 능력으로 침투하려면, 영원하신 성령이 마음의 문을 여셔야 한다. 장재형목사가 말하는 선행적 은총은 바로 이 비밀을 가리킨다. 우리가 믿는다고 말할 때, 그 믿음은 자력으로 생산된 결심이 아니라, 성령이 사랑의 깊이를 알아보게 하시는 조명 속에서 탄생한 응답이다. 그래서 복음은 인간의 업적을 축소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의 의를 해체하고, 은혜의 실제를 확장한다. 구약의 정결 규례가 육체를 거룩하게 했다면, 그리스도의 피는 양심을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여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한다. 여기서 죽은 행실은 죄악의 행위만을 뜻하지 않는다. 하나님 없이 의로워 보이려는 모든 자기 과시, 구원 없이 종교성을 쌓아 올리려는 모든 분주함까지 포함한다. 양심이 씻긴다는 것은, 삶의 동력이 두려움과 체면에서 사랑과 감사로 바뀐다는 의미다.


히브리서 9장은유언이라는 법적 비유를 들며, 왜 메시아가 죽어야 했는지 논증한다. 유언은 유언자가 죽은 후에야 효력을 가진다. 이 단순한 상식은 복음의 심오한 구조를 설명하는 열쇠가 된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속량의 지불일 뿐 아니라, 영원한 기업을 상속하게 하는 언약의 발효다. 우리는 구원받아 단지 죄의 형벌에서 벗어난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는 자로 호명되었다. 이 사실은 신앙을 수동적 면죄부로 오해하는 태도를 무너뜨린다. 상속은 신분의 변화이며, 신분의 변화는 새로운 삶의 방식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히브리서가 반복하는단번에, 구원의 확실성을 말하면서 동시에 삶의 소명성을 부른다. 단번의 구원은 반복적 제사가 필요 없다는 뜻이면서, 그 구원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섬김과 거룩이 지속되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장재형목사가 설교 속에서 끌어온 요한계시록 21 22절의 장면은, 성전 논쟁의 종착지처럼 빛난다. 새 예루살렘에 성전이 없다는 선언, “주 하나님과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는 말은 건축물 중심의 신앙을 근본에서 해체한다. 우리는 더 이상 특정 공간에 하나님을 가두지 못한다. 동시에 우리는 어디서나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값싼 낙관으로 흐를 수도 없다. 하나님을 만나는 길은 무한히 분산된 것이 아니라, 오직 한 분 중보자,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열려 있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4장에서 예수는 사마리아 여인에게이 산도 말고 예루살렘도 말고예배할 때가 온다고 선포하셨다. 그 선언은 공간의 상대화가 아니라, 예배의 본질에 대한 회복이었다. 예배는 장소의 권위를 소비하는 행위가 아니라, 영과 진리로 하나님을 만나는 사건이다. 진리이신 그리스도와, 그 진리를 마음에 새기시는 성령이 만나 예배를 가능케 한다.


역사 속에서 이 전환은 단지 신학적 논쟁에 머물지 않았다. 로마의 압제 아래 예루살렘은 결국 비극적 결말을 맞이한다. 서기 70, 티투스가 이끄는 로마 군대의 예루살렘 함락과 성전 파괴는 유대인들에게 상상할 수 없는 상처였고, 성전 중심 종교 체계의 붕괴를 현실로 만들었다. 만일 히브리서의 수신자들이 그 불길을 목격했다면, “손으로 지은 성소에 의지하려던 마음은 얼마나 잔인하게 부서졌겠는가. 그러나 동시에 그 사건은 히브리서가 말하던 진리를 역설적으로 확증했을지도 모른다. 하나님을 만나는 길은 더 이상 돌과 금으로 치장된 건물에 매이지 않는다. 그리스도께서 참 성소에 들어가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셨다는 선언이, 무너진 성전의 재 위에서 더욱 선연해졌을 것이다. 역사적 사건은 신앙의 대상을 옮기는 잔혹한 도구가 되기도 하지만, 그 잔혹함 속에서 복음의 실체는 더욱 견고하게 드러난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전통을 경멸할 수 없다. 히브리서가 구약 제도를 존중하며 그 의미를 해설하듯, 장재형목사 역시 성막의 디테일을 소홀히 다루지 않는다. 등잔대와 떡상, 언약궤와 속죄소, 그룹의 날개와 휘장의 경계는 모두하나님이 어떻게 죄인을 만나시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정교한 교과서였다. 그 교과서의 목적은 정보 축적이 아니라, 하나님이 마련하신 길을 따라가도록 인간을 인도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성막을 공부하는 일은 고고학적 호기심을 만족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된 은혜를 더 깊이 아는 통로가 된다. 구약의 상징을 해체해 실체를 바라볼수록, 복음은 얕아지지 않고 오히려 더 입체적으로 다가온다. 우리가 십자가를이 정도면 충분하다는 상식으로 소비할 때, 믿음은 식어간다. 반대로 성막의 장엄한 체계 속에서 십자가의 필연성을 발견할 때, 믿음은 경외로 다시 타오른다.


또한 히브리서 9장은 이미 구원받은 자의 정결이 어떻게 지속되는지도 암시한다. 구약의 피 뿌림이 외적 정결을 상징했다면, 신약의 공동체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닮아 서로의 발을 씻기는 방식으로 정결을 실천한다. 요한복음 13장에서 예수는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며, ‘높은 자가 낮은 자를 향해 허리를 굽히는거룩의 문법을 몸으로 가르치셨다. 이것은 단지 겸손의 미덕이 아니라, 성전이 건물에서 인격으로, 의식에서 사랑으로 옮겨갔다는 표시다. 장재형목사는 이 장면을 통해하늘에 속한 것들은 더 좋은 제물로 정결케 된다고 말한다. 더 좋은 제물이란 그리스도의 단번의 희생이 근원이며, 그 희생을 본받는 섬김이 열매다. 우리는 속죄를 스스로 추가할 수 없지만, 속죄받은 자로서 서로를 씻어주는 삶을 선택할 수 있다. 그 선택이 교회를 교회 되게 한다.



현대의 신앙인이 마주하는 유혹은 종종 고대의 형태를 바꾸어 반복된다. 새로운 질서 안에 있으면서도, 점술과 미신, 두려움을 거래하는 종교적 시장으로 되돌아가려는 충동은 여전히 강하다. 장재형목사가 한자의()’을 예로 들며우상단지 같은 것에 마음을 두는 것이 악이라고 설명한 대목은, 신앙이 단지 윤리적 단정함이 아니라마음의 방향이라는 사실을 다시 상기시킨다. 그리스도의 피로 열린 길은 두려움을 먹고 사는 영적 상업주의를 끊어낸다. 우리는 더 이상 불안에 값을 지불하며 안전을 사는 사람이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값을 치르셨고, 그 값이 피였으며, 그 피의 효력은 영원하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경건은 공포의 관리가 아니라 사랑의 확신에서 흘러나오는 자유다. 자유는 방종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해방이다.


히브리서가 마지막에 말하는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다는 구절은, 신앙을 현실로 끌어내린다. 죽음은 모든 인간의 공통 운명이며, 심판은 그 운명에 의미를 부여하는 하나님의 주권이다. 그러나 그 심판을 앞두고 그리스도인은 공황에 빠지지 않는다. 그리스도께서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28절의 역설적 표현, “죄와 상관없이두 번째 나타나신다는 약속이다. 이미 속죄가 완결되었기에, 주의 재림은 죄 문제를 재협상하기 위한 방문이 아니라 구원의 완성을 선포하기 위한 나타나심이다. 마치 대제사장이 지성소에서 나와속죄가 이루어졌다고 선언하던 순간처럼, 재림은 바깥에서 기다리던 백성이 환호할 종말의 예배다. 그래서 교회는 재림 신앙을 공포의 시나리오로만 소비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사랑의 결론, 약속의 성취를 향한 간절한 소망이다.


장재형목사의 히브리서 9장 메시지가 오늘 유효한 이유는, 그것이 신앙을 추상적 체계로 봉인하지 않고 역사와 양심, 예배와 삶의 결합으로 풀어내기 때문이다. 성막과 성전, 제사장과 피, 예표와 실체, 개혁과 새 질서는 모두 하나의 질문을 향한다. 우리는 누구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는가. 어디에서 하나님을 만나는가. 무엇이 죄를 씻는가. 그리고 그 씻김을 받은 삶은 어떤 모양으로 열매 맺는가. 이 질문들 앞에서 우리는 더 이상전통이냐 혁신이냐같은 피상적 선택을 하지 않는다. 복음이 요구하는 선택은 더 급진적이다. 그리스도를 붙잡느냐, 그림자를 붙잡느냐. 보이는 성소에 기대느냐, 하늘의 참 성소에 담대히 나아가느냐. 우리의 시대가 아무리 요동쳐도, 우리의 정체성을 지탱하는 것은 돌로 세운 건물이 아니라, 피로 세워진 새 언약이다.


따라서 히브리서 9장은 교회가 스스로에게 던져야 할 자기 점검의 거울이기도 하다. 우리는 예배를 장소로 환원하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신앙을 외적 규례로 치환해 양심의 회심을 미루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십자가를 사랑의 증거로 찬양하면서도, 실제 삶에서는 여전히 불안을 다스리기 위한 종교적 거래를 반복하고 있지 않은가. 장재형목사가 강조하는단번의 속죄는 이런 이중성을 끊어낸다. 단번의 속죄는더 보태야 안전하다는 강박을 무너뜨리고, “이미 이루셨다는 복음의 현재성을 회복한다. 그 회복은 감정의 흥분이 아니라, 양심의 평화와 삶의 방향 전환으로 드러난다. 하나님 앞에서 더 이상 숨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서 담대히 나아가며, 서로의 발을 씻어주는 공동체적 거룩을 선택하는 것, 그것이 새 언약 백성의 언어다.


결국 성막의 텐트는 광야를 이동했고, 예루살렘의 성전은 시대의 격랑 속에서 무너졌지만, 그 모든 이동과 붕괴는 한 가지를 가리킨다. 하나님은 건물 속에 갇히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 안에서 우리 가운데 거하시고, 그 아들의 피로 우리를 씻으시며, 성령으로 우리 안에 성소를 세우신다. 이것이 히브리서 9장이 제시하는 최종 결론이며, 장재형목사가 오늘의 교회에 건네는 중심 메시지다. 신앙은 과거의 유산을 지키는 일이면서도 동시에, 실체이신 그리스도께로 매 순간 돌아가는 현재의 결단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흔들림의 시대에 더 깊이 붙들어야 한다.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 참 성전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그분의 피로 세워진 새 언약의 영원한 효력. 그 길 위에서만, 어떤 유혹과 핍박도 우리의 믿음을 뿌리째 흔들 수 없다. 오늘도 이 복음의 확실함이 우리 일상의 숨결을 끝까지 새롭게 한다.

 

davidjang.org
작성 2025.12.14 18:59 수정 2025.12.14 18:59

RSS피드 기사제공처 : 굿모닝매거진 / 등록기자: 최우석 무단 전재 및 재배포금지

해당기사의 문의는 기사제공처에게 문의

댓글 0개 (1/1 페이지)
댓글등록- 개인정보를 유출하는 글의 게시를 삼가주세요.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