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하루가 빠르게 흘러갈수록 마음이 어디에서 흔들리고 어디에서 잠시 멈추는지 알지 못한 채 지나갈 때가 있다. 차갑게 느껴지는 말 한 줄에도 마음이 움츠러들고, 반대로 따뜻한 눈빛 하나가 괜스레 위로가 되는 순간도 있다. 그래서 가끔은 삶의 속도를 천천히 늦추고 마음의 결을 조용히 살펴보는 시간이 필요하다. ‘전준석의 ON 시(詩)그널’은 그런 시간 속에서 독자와 함께 머물기 위해 만들어진 칼럼이다.
35년 동안 경찰 현장에서 약자를 보호하고 인권과 조직문화를 지켜온 시선으로, 일상에서 쉽게 놓치고 지나가는 감정의 온도를 시(詩)를 통해 다시 비춰보고자 한다. 시가 전해오는 작은 떨림이 하루의 방향을 부드럽게 바꿔줄지도 모른다는 기대와 함께 이 글을 시작한다.

하루가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르게 정신없이 흘러간 날, 지친 몸을 이끌고 지하철 승강장에 선다. 덜컹거리는 열차 소리와 사람들의 바쁜 발걸음 소리가 뒤섞인 그곳은 어쩌면 도시에서 가장 삭막한 공간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서울의 제기동역, 당고개역, 영등포역, 암사역을 지나는 시민들에게는 조금 특별한 위로가 기다리고 있다. 차가운 스크린도어 유리창 너머로 따뜻한 달빛처럼 스며드는 시, 권영조 시인의 '어머니'가 바로 그것이다.
어머니
제 기억 속 보름달은
당신 얼굴입니다
언제가 보름달을 보다
당신 생각이 나
가슴에 걸어둔 달
달을 볼 때마다
당신 생각이 납니다
오늘따라 더 그리습니다.
_권영조
어린 시절 밤하늘을 올려다보면 둥실 떠 있던 보름달은 어둠 속에서도 세상을 환하게 비춰주곤 했다. 시인은 그 둥글고 모난 데 없는 달에서 어머니의 얼굴을 떠올린다. 고단한 삶의 밤길을 걸을 때마다 넘어지지 않도록 묵묵히 빛을 비춰주던 어머니의 사랑이 저 달과 닮았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가슴에 걸어둔 달'이라는 표현이 마음 깊은 곳을 건드린다. 하늘의 달은 시간이 지나면 기울고 구름에 가려지기도 하지만, 시인이 가슴 속에 걸어둔 달은 결코 지는 법이 없다. 눈을 감아도 떠오르고, 숨을 쉴 때마다 차오르는 그리움은 시인의 내면에 영원히 박제된 빛이다. 지하철을 기다리는 짧은 순간, 이 시를 마주한 사람들은 저마다 가슴 속에 품고 있던 각자의 '달'을 꺼내어 보게 된다.

이 시가 지하철 안전문에 전시되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만남과 헤어짐이 교차하고, 수많은 군중 속에서 오히려 고독을 느끼기 쉬운 플랫폼이라는 공간. 그곳에서 마주친 '어머니'라는 단어는 바쁜 일상에 파묻혀 잊고 지냈던 가장 본질적인 감정을 일깨운다. '오늘따라 더 그립습니다'라는 시인의 고백은 집으로 돌아가는 우리 모두의 마음속 독백이 되어 울린다.
오늘 밤, 귀갓길에 잠시 밤하늘을 올려다보시는 건 어떨까. 비록 도심의 불빛에 가려 달이 보이지 않더라도 괜찮다. 시인의 말처럼 우리의 가슴 속에는 이미 지지 않는 달, 어머니의 얼굴이 환하게 걸려 있으니까. 삭막한 일상 속에서도 그 따뜻한 '시(詩)그널'을 놓치지 않길 바란다.
시인 프로필

권영조 시인은 1989년 한국생명공학연구원 입사 후 35년간 공공기관에서 근무해왔다. 현재 한국보건의료연구원에서 기관 운영 업무를 담당하고 있으며, 2006년부터 국립환경인재개발원과 한국보건복지인재원에서 중앙부처 공무원과 직장인을 대상으로 스피치 교육과 퇴직 준비 교육을 진행하고 있다. 20여 년간 스피치 강사로 활동하며 3천여 명의 교육생을 배출했다.
주요 저서로는 '그대 생각으로 피운 꽃'(시집, 슘출판사, 2021), '내 삶의 또 다른 30년'(녹인이디컵, 2020), '여기가 당신의 행복 포인트'(춘추, 2017), '당신을 읽다'(매일경제신문사, 2015), '윤보영 시인처럼 감성시 쓰기'(책임편집, 이지출판, 2023) 등이 있다. 이 작품 '어머니'는 서울 지하철 시민 공모전에 당선되어 2022년부터 2년간 시민들과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