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5년의 어느 봄날, 너를 처음 만났다. 사십대 후반의 나는 건설회사의 현장을 누비는 치열한 삶을 살고 있었고, 너는 푸른빛이 감도는 늠름한 모습으로 내 앞에 섰다. 그때부터 우리는 한 몸이나 다름없었다. 너는 내게 단순한 이동 수단이 아니었다. 하루의 시작과 끝을 함께하는 든든한 파트너였고, 때로는 나 홀로 쉼을 얻는 비밀스러운 공간이었다.
우리는 전국을 누볐다. 경상남도 진해의 짭조름한 바닷바람이 너의 차창을 감싸고, 울산의 거대한 공장지대 불빛이 너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신라 천 년의 역사가 깃든 경주에서는 황금빛 노을을 함께 바라보기도 했다. 때로는 폭우가 쏟아지는 밤길을 뚫고 달렸고, 때로는 끝이 보이지 않는 고속도로를 묵묵히 달렸다. 10년이라는 시간 동안, 나는 너에게 쉼 없이 일만 시켰다. 그렇게 쌓인 주행 거리가 24만 킬로미터. 너의 바퀴 자국에는 나의 땀과 고단함, 그리고 수많은 추억들이 새겨져 있었다.
10년간의 회사 생활을 정리하고, 너는 나의 온전한 소유가 되었다. 너와의 동행은 계속되었지만, 우리의 삶은 예전처럼 속도전을 펼치지 않았다. 갈 곳이 많지 않았고, 주행 거리는 전보다 천천히 늘어갔다. 지난 15년간 겨우 4만 킬로미터를 더 달렸을 뿐이다. 사람들은 종종 내게 물었다. “그 차, 아직도 타세요?” “소형차로라도 바꾸시죠?” 그때마다 나는 딱히 대답할 말이 없었다. 너는 말썽을 부리지 않았고, 나는 이 낡고 정직한 차를 떠나보낼 명분을 찾지 못했다.
물론, 너는 요즘 차들과는 다르다. 후방 카메라나 내비게이션은커녕, 백미러를 접으려면 창문을 열고 손으로 직접 접어야 한다. 차 안에는 CD를 넣는 곳도, USB를 꽂는 곳도 없다. 내가 배우는 색소폰 선생님의 멋진 연주곡이 담긴 USB를 아무리 만져 봐도, 너는 그 소리를 들려주지 못한다. 하지만 나는 너의 이런 투박함이 좋다. 첨단 기능은 없어도, 너는 그 자체로 완전하다. 너의 부족한 부분은 가족들의 따뜻한 마음이 채워주었다. 작은 딸이 선물해 준 후방 카메라 덕분에 주차할 때 한결 마음이 편해졌고, 큰 사위가 달아준 블랙박스는 너의 곁을 든든하게 지켜준다. 내비게이션은 스마트폰으로 사용하지만, 나는 그것마저 너 투싼만의 특별한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어릴 적 지지리도 가난했던 시절, 나는 물건 하나라도 허투루 버리지 않았다. 그 마음은 지금까지도 이어져, 나는 낡은 것을 버리지 못한다. 36년 동안 내 여름을 시원하게 책임졌던 선풍기를 실수로 넘어뜨려 날개를 부러뜨렸을 때, 나는 고장 나서가 아니라 나의 부주의 때문에 너를 보내게 되었다는 사실에 한참을 미안해했다. 그때부터였다. 물건 하나하나에도 삶의 이야기가 깃들어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나는 다짐한다. 언젠가 너를 떠나보내야 할 때가 오면, 폐차장에 보내기 전 깨끗하게 목욕을 시켜줄 것이다. 그리고 너의 손잡이, 대시보드, 운전석에 손을 얹고 지난 25년 넘는, 훨씬 넘을지도 모르는 세월의 이야기들을 속삭여줄 것이다. ‘이별 예식’이라는 거창한 이름으로, 너와 함께 쌓아온 모든 추억에 감사와 존경을 표할 것이다. 나의 젊은 날을 오롯이 기억하고 있는 유일한 증인이자, 나의 든든한 동반자였던 너에게.
“나의 투싼아! 너는 낡지 않았다. 단지, 나의 삶을 품고 깊어진 것뿐이다. 고맙고, 사랑한다.”
[문용대]
‘한국수필’ 수필문학상 수상
‘문학고을’ 소설문학상 수상
‘지필문학’ 창립10주년기념 수필부문 대상 수상
‘한국예인문학, 지필문학, 대한문학, 문학고을’ 활동
‘대한문학 부회장’, ‘지필문학’ 이사
‘브레이크뉴스’ 오피니언 필진
‘코스미안뉴스’ 오피니언 필진
수필집 ‘영원을 향한 선택’
‘날개 작은 새도 높이 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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