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약 한 달여 전쯤, 작가 김영애(1951~2024) 선생의 장례식이 열렸다, 김 작가가 반평생을 이민 생활로 보낸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한 메모리얼 가든에서. 이역만리 머나먼 곳인 탓으로 도저히 한달음에 달려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영상으로만 영결식을 지켜보며 애도하는 도리밖에 없었다. 이 순간은 내 생이 끝나는 날까지 길이길이 잊지 못할 슬픈 장면으로 가슴속에 고이 간직되어 있을 것 같다.
기억의 필름을 되감아 보니, 지금으로부터 열네 해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가을이 깊어가던 어느 날 난데없는 편지 한 통이 날아들었다. 낯선 땅 로스앤젤레스에서 보내온 전자우편이었다. 거기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었다.
“감명 깊은 글 잘 읽었습니다. 저는 미국에 사는 교포인데 내용이 너무 가슴에 와닿아서 이렇게 편지를 띄웁니다. 여건이 허락한다면 선생님께 글쓰기를 배우며 친분을 쌓고 싶습니다. ……”
김영애 작가가 띄운 편지였다. 그가 감명 깊게 읽었다는 글이란, 모 일간신문에 쓴 나의 칼럼 「사랑은 있어도 사랑이 없다」를 두고서 하는 이야기였다. 그 글을 통하여 서로 간에 영혼의 교감이 이루어졌던 모양이다.
평소 낯선 사람과 교분 맺기를 꺼리는 내향적인 성정 탓이리라, 첫 제안에는 선뜻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고맙긴 하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다는 핑계를 둘러대며 조심스럽게 거절의 뜻을 밝혔다. 그러함에도 청은 이어졌고, 거듭되는 부탁에 결국 그 청을 받아들이기로 마음을 바꾸었다.
김 작가와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매월 초하루와 보름께가 되면 어김없이 태평양 바다 건너의 소식을 담은 안부와 함께 손질을 바라면서 조언도 구하는 작품이 도착했다. 그래서 그때만 가까워져 오면 정인의 연서戀書를 기다리듯 이메일 편지가 은근히 기다려지곤 하였다.
느닷없이 맺어진 교분이 날이 지나고 달이 흐르고 해가 바뀌면서 시나브로 깊어졌다. 그 세월 동안 김 작가의 글솜씨는 하루가 다르게 무르익어 갔다. 《수필세계》 신인상 수상을 시작으로 《서울문학》 오늘의 작가상, 경희 해외동포 문학상, 무원문학상, 불교문학상, 국제펜 한국본부 해외 작가상, 크리스천문학상 등 여러 상을 잇달아 받으며 재미 수필작가들 가운데서 돌올한 성취를 보여주었다. 김 작가의 기쁨은 또한 나의 기쁨이었고, 김 작가의 자부심은 동시에 나의 자부심이었다.
그렇게 인연이 깊어져 가던 2019년 봄, 김 작가로부터 우리 부부를 로스앤젤레스로 한번 초청하고 싶다는 편지가 왔다. 처음엔 정중히 사양의 뜻을 밝혔다. 그 후 거듭되는 초청에도 줄곧 훗날을 기약하자는 말과 함께 마음만 받겠다는 답신으로 고마움을 대신했다. 공연스레 폐를 끼칠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로부터 사 년이 흐른 지지난해 여름, 또다시 편지가 날아들었다. 그 편지에는 몸이 너무 좋지 않아서 아마도 이번 만남이 이승에서의 마지막 해후가 될지도 모른다는 것을 암시하는 듯한 내용이 담겨 있었다. 결국 초청을 받아들이기로 한 건 ‘마지막 해후’라는 표현이 절박함으로 다가와 마음을 흔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사실 그전에 이미 한국에서 세 번의 만남을 가졌었다. 한 번은 김 작가가 신인상을 받을 때였고, 한 번은 문학상 수상을 위한 방문 때었으며, 나머지 한 번은 국제 문학 심포지엄에 참가하려고 온 고국 나들이차였다.
지난해 봄, 나는 아내와 함께 마침내 로스앤젤레스 땅을 밟았고, 김 작가와 공항에서 해후했다. 우리는 가벼운 포옹으로 재회의 반가움을 나누었다. 편지에는 몸 상태가 많이 안 좋다고 씌어 있었지만, 얼굴은 생각한 것만큼 크게 축나 보이진 않았다. 표정 역시도 예전과 다름없이 밝았다. 내심 안도의 한숨이 쉬어지면서, 집 떠나올 때 마음속에 드리워져 있었던 염려의 그림자도 금세 걷히었다.
거기서 보낸 보름 남짓한 시간은 하루하루가 꿈 같은 나날이었다. 피오피코 코리아타운 도서관에서 재미교포 작가들을 대상으로 강연을 펼치고, 서부 일대의 이름난 관광지들을 두루 유람하기도 하였으며, 김 작가의 부군이신 김성환 박사님의 안내로 게티 미술관이며 게티 빌라를 비롯한 곳곳의 의미 깊은 명소들에 들러 귀한 안복眼福도 누렸다.
김 작가는 우리 부부가 로스앤젤레스 일대에 머무는 동안 관광지 여행을 다닌 날들 빼고는, 숙소를 따로 정하지 않고 자신의 보금자리에서 함께 지내도록 세심히 배려해 주었다. 그 속 깊은 마음 씀씀이에 나도, 아내도 그만 감동하고 말았다. 요즈음처럼 개인주의가 넘쳐나고 이기주의가 팽배하여 일가친척조차 집에 들이기를 달가워하지 않는 메마른 세상에서, 며칠간씩이나 일상을 함께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잘 알기에 참으로 마음이 느꺼워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귀국하는 날 아침, 우리는 오래오래 추억 속에 간직해 두기 위해 김 작가의 댁을 배경으로 나란히 서서 사진을 찍었다. 김 작가의 집이 마치도 고국의 이웃집처럼 포근하게 느껴졌다. 그리고는 김 박사님께서 손수 운전하는 승용차를 타고 로스앤젤레스 공항으로 향했다. 처음 미국 땅을 밟으며 시내로 들어갈 때 줄지어 늘어서서 환영 인사를 보내주던 보랏빛 자카란다 나무들이 훗날 다시 만나자며 일제히 손을 흔들고 있었다.
우리는 탑승 수속을 마친 뒤 헤어지는 아쉬움에 한참 동안 서로 말이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떠나야 할 시간이 왔다. 나는 김 작가의 두 손을 부여잡고 어쨌든지 운동 부지런히 하며 건강 잘 챙기라는 신신당부를 잊지 않았다. 대합실을 빠져나오면서 김 작가와 김 박사님 부부의 모습이 시야에서 흐릿하게 멀어져 갈 때까지 자꾸만 뒤를 돌아다보았다.
귀국하여 반년 남짓 시간이 흐른 어느 날, 새로 전자우편이 날아왔다. 반가운 마음으로 열어 보았을 때 망치로 머리를 쾅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그 편지에 이런 내용이 씌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 편지는 아마도 교수님과 저와의 마지막 사연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 그동안 교수님과 문학적으로 교류를 할 수 있어서 참으로 영광이었고 아름다움이었습니다. 혹시나 제게 무슨 일이 있더라도 자책이나 걱정은 하지 말아 주십시오.”
‘마지막 사연’이라는 구절이 자꾸만 마음에 걸려 줄곧 불안 불안해하며 나날을 보내고 있던 차였다. 아니나 다를까, 김성환 박사님으로부터 김 작가가 끝내 우리 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게 된 건 그 편지가 온 뒤 일주일이 채 지나지 않아서였다. 순간 너무도 덧없고 허망해져서 멍하니 허공만 바라보았다. 우리가 그동안 주고받은 수많은 편지의 구절구절들이 파노라마처럼 머릿속을 스치며 지나갔다.
하긴 네 해 전 몸이 너무 안 좋다는 편지가 왔을 때부터 김 작가가 무슨 암인진 모를 암으로 투병하고 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알아차리고는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이제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영원한 이별이 이다지도 서둘러 찾아올 줄은 미처 몰랐다. 나는 저 아득한 태평양 바다 건너 쪽을 향해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서 김 작가의 왕생극락을 빌고 또 빌었다.
이역만리로 맺어진 인연의 꽃은 이렇게 피었다 이렇게 졌다. 김 작가와의 이승에서의 인연은 여기까지였던가 보다. 하지만 내 마음속 인연의 꽃은 이 세상 하직하는 날까지 영원히 피어 있을 것임을 믿는다.
[곽흥렬]
1991년 《수필문학》, 1999년《대구문학》으로 등단
수필집 『우시장의 오후』를 비롯하여 총 12권 펴냄
교원문학상, 중봉 조헌문학상, 성호문학상,
흑구문학상, 한국동서문학 작품상 등을 수상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기금 받음
제4회 코스미안상 대상 수상
김규련수필문학상 수상
유혜자수필문학상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