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용대] 용서의 자리에서

신앙, 성찰, 그리고 인간의 자유

어릴 적 주일학교에서 들은 이야기는 내 삶에 오래된 물음표로 남았다. 손양원 목사의 일화였다. 그는 자신의 두 아들을 죽인 공산주의자를 양자로 삼았다. 어린 나에게 그것은 인간의 이해 범주를 넘어선 기적이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요?" 선생님은 조용히 말씀하셨다. "그건 사람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사랑이란다."

 

그 이야기는 세월이 흘러도 잊히지 않고, 세상의 부조리 앞에서 내 안에서 울리는 깊은 메아리가 되었다. 핏빛으로 물든 현실 속에서, 그는 복수를 포기한 것이 아니라, 복수보다 더 큰 자유를 택한 것이다.

 

며칠 전, 월스트리트저널(WSJ) 칼럼 번역 기사를 읽으며 그 위대한 영혼을 다시 떠올렸다. 칼럼에는 용서에 대해 극명하게 대비되는 현대의 두 인물이 등장했다.

 

지난달 살해당한 찰리 커크의 아내, 에리카 커크는 남편이 공격당한 사건 후 "나는 그를 용서할 것입니다. 남편이 살아있다면, 그도 그러했을 거예요"라고 공개적으로 선언했다. 그녀의 말은 단순히 뱉어진 문장이 아닌, 깊은 신앙과 관용에서 비롯된 평화의 결단이었다. 반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같은 주제에 대해 "나는 내 적들을 용서하지 않는다. 그들이 잘되길 바라지 않는다"고 단언했다. 트럼프의 세계에는 화해와 관용이 들어설 자리가 희박하며, 오직 적개심과 보복만이 지배한다.

 

이 상반된 두 태도는 단순한 개인 차이를 넘어선다. 한쪽은 용서를 통해 내면의 평화를, 다른 한쪽은 증오와 보복을 통해 고립을 선택한다. 이 대비는 결국 손양원 목사의 위대한 선택으로 이어진다. 진정한 용서는 상대를 향한 관용이기에 앞서, 내 마음을 얽맨 짐에서 해방시키는 행위임을 깨닫게 한다.

 

고해와 성찰

 

천주교의 고해성사는 용서가 작동하는 원리를 섬세하게 보여준다. 신자는 어둠 속 고해실에서 죄를 고백하고, 신부의 사죄 선언을 듣는다. 그 순간 죄가 완전히 소멸되는 것은 아닐 것이지만, 그 죄의 무게가 더 이상 삶의 중심을 짓누르지 않도록 스스로 내려놓는 행위가 바로 용서이다. 나 역시 타인에게 받은 상처의 흔적을 마음속에 굳게 간직했던 시절이 있었다. 때로는 그들이 남긴 고통을 잊지 않겠다고 다짐했고, 그것이 정의라 여겼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용서하지 못함은 그들을 벌주는 일이 아니라, 결국 나 자신을 미움이라는 감옥에 가두는 행위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짐은 나를 끊임없이 피로하게 만들었다. 나는 용서받아야 할 대상은 아니었으나, 용서를 배우지 못한 채 그 짐의 자리에서 머물러 있었다.

 

손양원 목사의 용서는 그 무거운 짐을 완전히 내려놓은 경지였다. 그것은 신앙적 결단이자, 인간적 절망의 끝에서 피어난 희망의 승리였다. 복수를 포기하고 하늘의 평화를 선택한 그는, 용서의 자리에서 가장 큰 자유를 얻었다.

찰리의 관용과 트럼프의 적대적 태도 역시, 우리가 삶의 갈림길마다 용서를 선택할 수 있는 힘이 있음을 일깨운다. 용서는 단순한 미덕이 아닌, 내가 어떤 삶을 살 것인지에 대한 매 순간의 실질적인 선택이다.

 

용서는 평화를 되찾는 행위

 

월스트리트저널 칼럼의 마지막 문장이 마음속에 깊이 남는다.

 

“용서는 정의를 포기하는 일이 아니라, 평화를 되찾는 것이다.”

(Forgiveness is not the surrender of justice, but the reclaiming of peace.)

 

이 짧은 문장은 손양원 목사의 숭고한 삶, 고해성사에서 얻은 자기 성찰의 고요함, 그리고 찰리와 트럼프의 대비된 사례를 하나의 진리로 관통하는 빛이다. 용서는 밖으로 향하는 공격이 아니라, 내 안의 혼란스러운 질서를 바로잡는 행위인 것이다.

 

나는 아직 완벽하게 그 자리에 서지 못했다. 그러나 그 길 위에서, 선인들이 보여준 용서의 힘과 고해성사 속의 침묵과 평화를 떠올리며 조금씩 마음의 짐을 내려놓는다. 용서는 단순한 도덕적 의무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인간으로 온전히 존재하기 위한 가장 본질적인 길이며, 신적인 경지에 닿으려는 가장 인간적인 걸음이다.

 

언젠가 나도 그 자리, 용서의 자리에 온전히 서고 싶다. 그 자리에는 복수도 증오도 아닌, 오직 흔들리지 않는 평화와 자유만이 남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 나는, 그 평화는 세상의 질서나 외부의 정의보다 먼저, 내 안의 성찰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확신한다. 

 

나는 “이젠, 전태일과 화해하고 싶다.”라는 제목의 글쓰기를 마쳤다.

 

 

[문용대]

‘한국수필’ 수필문학상 수상

‘문학고을’ 소설문학상 수상

‘지필문학’ 창립10주년기념 수필부문 대상 수상

‘한국예인문학, 지필문학, 대한문학, 문학고을’ 활동

‘대한문학 부회장’, ‘지필문학’ 이사

‘브레이크뉴스’ 오피니언 필진

‘코스미안뉴스’ 오피니언 필진

수필집 ‘영원을 향한 선택’

‘날개 작은 새도 높이 날 수 있다’

이메일 : myd1800@hanmail.net

 

작성 2025.12.25 10:22 수정 2025.12.25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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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