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충무공 이순신이 쓴 『난중일기』는 그의 문학적 소양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자료이다. 이는 『난중일기』의 내용을 연구한 여러 학자들의 평가이다. 충무공의 둘째 형 이요신이 서애 유성룡과 함께 퇴계 이황의 문인이었던 점을 생각하면, 충무공의 집안은 학문과 무예, 양쪽을 모두 갖추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던 것 같다.
『난중일기』에는 충무공 이순신이 갖춘 학문의 수준을 보여주는 문장이 많이 등장한다. 이러한 문장들 가운데 일부는 문학적 표현을 포함하고 있는데, 종종 현대인들이 그 의미를 잘못 파악하곤 한다. 우선 다음에 나오는 일기의 내용부터 살펴보자.
『난중일기』, 1592년 2월 23일
늦게 배를 출발하여 발포에 이르니 역풍이 많이 불어 배가 나아갈 수 없었다. 간신히 성 근처에 이르러 배에서 내려 말을 타고 갔다. 비가 많이 내려 일행이 모두 꽃비에 흠뻑 젖었다.
[원문] 晩彂船至鉢浦 逆風大吹 舟不能行. 艱到城頭 下船馬行. 雨勢大作 一行上下 盡濕花雨.
* 발포: 지금의 전남 고흥군 도화면 발포리
충무공은 1592년 2월 19~27일 동안 전라좌수영에 속한 진포(鎭浦)를 순시하였다. 위 기록은, 충무공 일행이 발포에 있던 수군진에 도착했을 때의 상황을 묘사한 것이다. 이 내용 중에는 '꽃비(花雨)'라는 문학적 표현이 등장한다.

인터넷에서 '꽃비'를 검색해보면 '꽃잎이 비처럼 흩날리는 모습을 묘사한 비유적 표현'이라는 설명이 나타난다. 많은 분들이 용어 '꽃비'를 이러한 의미로 이해하고 계실 것이다. 그런데 위 『난중일기』에 등장하는 '꽃비'의 의미를 이와 같이 해석하면, 문장의 의미가 조금 이상해진다. '충무공 일행이 소나기를 맞고 나서 꽃비에 흠뻑 젖었다.'라는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용어 '꽃비(花雨)'는 현대와 조금 다른 의미를 지닌다. 한국고전종합DB 사이트에서 조선시대 문헌을 검색해보면, ‘催花雨’라는 용어가 발견된다. 이는 ‘꽃을 재촉하는 비’라는 뜻으로서 '봄비'를 문학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꽃비(花雨)'가 등장하는 『난중일기』의 날짜는 시기상 봄에 해당하는 2월 23일(음력)이다. 『난중일기』에 언급된 '꽃비(花雨)'가 ‘꽃을 재촉하는 비(催花雨)’의 약자로서 '봄비'를 의미함을 짐작할 수 있다.
다음은 의미를 잘못 파악하기 쉬운 『난중일기』의 또 다른 문학적 표현이다.
『난중일기』, 1594년 5월 5일
세 겹 지붕이 조각조각 높이 날아가고 빗발이 삼대처럼 내렸는데, 몸을 막을 수가 없어서 우스웠다.
[원문] 捲屋三重 高飛片片 雨脚如麻 不能護身 可笑.
위 일기는 충무공이 한산도에 머물 때의 사건을 기록한 것으로서, 거주하던 초가집 지붕이 큰 비바람 때문에 날아간 일을 묘사하였다. 일기 내용에 '세 겹 지붕'이라는 표현이 있기 때문에 시중에 출간된 몇몇 『난중일기』 번역서는 충무공이 거주하던 초가집의 구조가 세 겹으로 되었다고 설명하였다. 인터넷 등에서 초가집 구조에 관한 자료를 찾아보면, 초가 지붕을 얹는 이엉을 세 겹으로 겹치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이는 그럴듯한 설명으로 느껴진다.
하지만 해당 문장이 차용한 글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그 내용을 살펴보아야 한다. 해당 문장 가운데 ‘빗발이 삼대처럼 내렸는데(雨脚如麻)’라는 문구는 중국 당나라의 시인 두보(杜甫)가 지은 「모옥위추풍소파가(茅屋爲秋風所破歌)」에 나오는 '빗발이 삼대처럼 내려 끊이자 않는다(雨脚如麻未斷絶)'라는 구절과 거의 일치한다. 게다가 ‘세 겹 지붕(捲屋三重)’이라는 표현 또한 같은 시에 나오는 ‘봄날 지붕에 세 겹 이엉을 덮었다(春城屋上三重茅)’라는 구절과 상당히 유사하다.
충무공은 한산도의 초가집 지붕이 날아간 상황을 두보의 시를 인용하여 『난중일기』에서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 초가집 지붕이 실제로 세 겹이었는지 그렇지 않았는지는 알 수 없는 문제이다.
다음 살펴볼 『난중일기』 기록도 의미를 잘못 파악하기 쉬운 문학적 표현을 싣고 있다.
『난중일기』, 1596년 2월 30일
느지막이 우수사(전라우수사 이억기)가 보고하기를 “이미 바람이 온화해졌으므로 계책을 세워 대응할 일이 시급하여 소속 군사를 이끌고 본도(전라도)로 가려고 한다.”라고 하였다. 그가 생각한 바가 놀라워서 그의 군관과 도훈도에게 장 70대를 때렸다.
[원문] 日晩 右水使報曰 已當風和 策應時急 率所屬欲赴本道云. 其爲設心 極爲駭恠 其軍官及都訓導 决七十杖.
위 일기는 조선 수군이 한산도에 주둔했을 때의 일을 기록한 것이다. 전라우수사 이억기가 한산도에 주둔했던 그의 휘하 전라우수군을 데리고 전라도로 되돌아가려고 하자, 통제사를 겸임했던 충무공이 화를 내며 이억기 대신 휘하의 군관과 도훈도를 처벌한 일을 서술한 것이다. 이 내용에 보이는 '바람이 온화하다(風和)'라는 용어는 '봄'을 의미하는 문학적 표현으로서, 조선시대 문헌에 자주 등장하는 말이다.
용어 '風和'를 『선조실록』에서 검색해보면 19차례 등장하는데, 대부분 1~4월 봄의 시기 전후로 나타난다. 비록 '風和'는 문학적 표현이지만 또한 상용구에 가까웠던 말이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風和'가 나타나는 『선조실록』의 해당 기사를 살펴보면 대부분 문학적인 내용이 아닌 정무적인 내용이기 때문이다. '風和'는 조선시대 지방 관아의 등록류 문서를 모아 편찬한 『각사등록(各司謄錄)』에도 종종 등장하는데, 그 해당 내용은 거의 예외 없이 문학적 표현과는 거리가 멀다.
위 『난중일기』 기록 또한 마찬가지이다. '바람이 온화해졌으므로 시급히 계책을 세우기 위해 전라우수군이 전라도로 되돌아간다'라는 말은 언뜻 보기에도 상당히 어색하다. '바람이 온화해졌으므로'라는 부분을 '봄이 되었으므로'로 바꾸면 내용이 보다 자연스러워진다. 즉, '風和'는 상용구가 된 문학적 용어로 보아야 한다. 참고로 위 『난중일기』의 며칠 뒤인 3월 5일 일기에 따르면, 전라우수사 이억기는 그의 잘못을 충무공에게 사과하였다.
마지막으로 살펴볼 다음의 『난중일기』 기록 또한 의미가 모호한 문학적 표현을 담고 있다.
『난중일기』, 1596년 9월 4일
나주에 머물렀다. 어두워질 무렵 목사(나주목사 이복남)가 술을 가지고 와서 권하였다. 일추도 술잔을 들었다.
[원문] 留羅州. 昏 牧使佩酒而勸. 一秋亦持盃.
위 일기는 충무공이 1596년 윤8월 중순부터 9월 말까지 전라도 지역을 순시하던 시기에 있었던 일을 기록한 것이다. 대부분의 『난중일기』 번역본들이 이 일기에 등장하는 '일추(一秋)'를 미상의 인물로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一秋'는 사람의 이름치고는 상당히 특이할 뿐만 아니라 이날을 제외한 다른 날짜의 일기에는 전혀 언급이 없으므로 정말 사람의 이름인지 의문이 생긴다.
'一秋'를 사람의 이름이 아니라 글자 그대로 '한가을'로 해석하면 어떨까? 위 일기가 쓰인 날짜는 음력 9월 4일로서 한가을 또는 늦가을에 해당한다. 이 시기 나라 곳곳에 단풍이 들어 울긋불긋한 풍경이 펼쳐져 있었을 것이다. '한가을이므로 울긋불긋한 단풍이 펼쳐졌다'라는 문장을 '一秋亦持盃(한가을도 술잔을 들었다)'라는 시적인 표현으로 대신한 것이 아닐까? 참고로 한국고전종합DB 사이트에서 '一秋'를 검색해보면, 이 용어가 '한가을'의 의미로 사용된 사례가 여럿 발견된다.
지금까지 의미를 잘못 파악하기 쉬운 『난중일기』의 문학적 표현 몇 가지를 살펴보았다. 주관적인 생각이 들어갈 수밖에 없는 주제이므로 반론을 제기하시는 분도 계시리라 생각된다. 이에 대해 많은 이해를 부탁드린다.
[참고자료]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한국고전종합DB
[윤헌식]
칼럼니스트
이순신전략연구소 선임연구원
저서 : 역사 자료로 보는 난중일기
이메일 : thehand8@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