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용 (수필가/철학자)
“나를 이해했는가?” 니체는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담아놓은 자서전 《이 사람을 보라》에서 조건문까지 합하여 모두 여섯 번이나 이 문장을 반복했습니다. 단단한 돌멩이로 박혀 있는 징검다리 같습니다.
사람들은 다 똑같은 문제로 자신의 삶을 어렵고 힘들다고 느낍니다.
잔인한 사람은 상대가 상처를 받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똑같은 자리를 후벼대는 짓을 거듭합니다. 그런 짓을 하면서도 스스로는 깨닫지 못합니다. 상대가 상처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도 못합니다. 자신의 입장에서만 사물을 바라보고 있으니 사태는 악화될 뿐입니다.
그러다가 상대가 떠나가면 떠난 사람이 잘못이라고 주장합니다. 잔인한 주장입니다. 눈물을 흘리면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잘못이라는 얘깁니다. 아프다고 말하면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잘못이라는 논리입니다. 자기는 그런 상황과는 아무런 연관도 없다고 말합니다.
오늘 아침엔 두 개의 문장이 읽혔습니다.
“눈물로 세상을 버티려고 하지 마라.”
“눈물 따위로 버틸 생각은 처음부터 하지 마.”
이 두 개의 문장이 화살처럼 눈에 꽂혔습니다. 눈물은 흘려도 사물은 똑바로 보려 했습니다.
한강이 〈아기 부처〉라는 단편 소설 속에 이쑤시개처럼 남겨놓은 말입니다.
여기서 저기로 옮겨가는 징검다리의 돌들처럼 읽히기도 했습니다.
울어도 소용없습니다. 상대가 깨달아주지 않으면 만사가 소용없습니다. 상대가 인정해주지 않으면 무슨 짓을 해도 소용없습니다.
‘넌 왜 그러냐?’ ‘이러면 안 되는 거 아냐?’ 이런 식으로 말을 해대는 사람하고는 그 어떤 의미 있는 소통도 불가능합니다.
말 따로 생각 따로, 그런 식으로 서로가 겉도는 그런 존재가 되어 멀어질 뿐입니다. 말을 하면 할수록 멀어지는 그런 사이가 되고 말 것입니다. 이해보다는 오해가 사이에 끼어들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생각이란 것을 가집니다. 자기생각에서 뻗어나가는 개념들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자기의견, 자기믿음, 자기신앙, 자기주장 등, 그 내용과 형식은 자유의 범주로까지 이어집니다.
그래서 사람은 자기소개가 필요합니다. 신에게는 요구되지 않는 사안입니다.
근대 르네상스인들은 초상화를 선호했습니다. 자신의 모습을 담아내는 것이 유행이었습니다. ‘이게 바로 나다’, ‘이게 바로 내 얼굴이다’라는 인식이, 자신의 얼굴을 알아보고 또 보여주는 것이 좋았습니다.
최근에는 논술이라는 개념이 공부의 내용으로 간주되는 일도 벌어졌습니다.
설득력에만 신경을 썼을 뿐, 정의, 진실, 그런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개인입니다. 모두가 자기소개라는 분야에서 잘 정제된 존재가 되어 있습니다.
대학에서도 이런 제목의 과목이 교양과목으로 설정되어 있기도 합니다. 공공의 입장이나 상대를 위한 배려나 약자를 배려한 처사 따위는 고려하지 않습니다.
‘나만 잘 되면 된다’, ‘나만 아니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공부한 정신은 그들만의 현실을 만듭니다.
현실이 있습니다.
늘 새로운 세대의 현실은 낯설기 마련입니다. 그들의 현실이 현실로 인정받고 시대의 증상으로 굳어지기까지는 시간이 걸립니다. 혼란과 갈등이 지속됩니다. 세대갈등이 이런 것입니다. 온갖 비극의 현장은 이런 장면과 함께 실현됩니다.
한쪽은 억울하고 한쪽은 이해를 못합니다.
한쪽은 좋은 뜻에서 펼친 일이고 한쪽은 자기 뜻과는 맞지 않은 처사입니다.
말을 하지 않으면 상대는 무슨 일인지 깨닫지도 못합니다. 물론 말을 한다고 해서 상대가 말을 알아들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착각입니다. 해결이 안 됩니다.
민주주의의 시작 지점에부터 등장한 꽃은 비극입니다. 민주주의라는 수면 위에 피어난 꽃입니다. 윤슬이 빛나는 곳에 어김없이 피어난 꽃입니다. 인식이, 깨달음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피어난 꽃입니다. 하지만 견뎌야 피어나는 꽃입니다. 줄기 없는 연꽃은 없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