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성은 유구한 역사와 문화가 살아 숨 쉬는 고장이다. 넓은 들판이 있고 산이 병풍처럼 감싸고 있으며, 바다와 접한 고성은 예로부터 물산이 풍부하고 인심이 후하기로 소문난 고장이다.
특히 임진왜란과 관련하여 많은 전적지가 있고 의로운 기생 월이의 설화가 전해오고 있다. 한산대첩이나 당포해전 등이 있었던 장소도 임진왜란 당시에는 고성땅이었다.
1592년 음력 5월 4일 이순신 장군이 제1차출전을 개시했을 때, 여수에서 새벽 2시경 출동하여 저녁나절에 도착하여 하룻밤 유박하고 간 곳이 소비포다.
소비포는 솔비포성(所乙非浦城)이 있는 고성군 하일면 춘암리 동화마을이다. 동화마을은 현재 어촌체험마을로 지정되어 있다.

소비포에서 하룻밤을 지낸 이순신함대는 1592년 5월 7일 거제도 옥포에서 최초의 승리를 거두고 그날 오후에는 마산만으로 들어가 합포해전에서 승리했다. 5월 8일 오전 고성땅 적진포로 진출한 이순신 장군은 적선 13척을 격파했다.
적진포해전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사람이 한 명 있다. 그는 이신동이라는 젊은 향화인이다. 일본에서 우리나라로 귀화한 사람으로 추정된다. 조선수군이 압도적 승리를 한 후 잠시 쉬고 있을 때 이신동은 산 위에서 울부짖으며 젖먹이 아이를 안고 달려 내려왔다. 그는 왜군들의 만행을 이순신 장군에게 소상하게 알렸다. 동네 소를 잡아서 배로 가져갔으며, 밤새 술을 마시고 여자들과 함께 노래를 부르는데 그 노래는 전부 조선 노래였다고 했다. 가축은 물론이고 힘없는 아낙들도 왜군에게 잡혀갔다는 말이다.
이 이야기를 들은 조선수군들은 울분을 참지 못했다. 이순신 장군은 이신동을 배에 태워 함께 가자고 했으나, 그는 전날 산속에서 길을 잃고 흩으진 부모와 처자를 찾아야 한다며 눈물을 흘리면서 사양했다. 다시 산으로 올라가는 이신동을 바라보는 이순신 장군의 가슴은 찢어질 것만 같았다. 이것은 이순신 장군의 제1차출전 당시 이야기다.
1592년 음력 5월 29일 이순신 장군이 최초로 거북선 2척을 이끌고 여수에서 경상도 해역으로 출동한 것이 제2차출전이다. 사천해전과 당포해전에서 승리한 이순신 장군은 1592년 6월 4일 당포 근처에서 판옥선 25척을 몰고 온 전라우수사 이억기의 증원군을 만나 합류한 후, 그날 밤 통영대교 아래의 착량에서 하룻밤을 지냈다. 조선수군은 전라좌수군의 판옥선 23척과 거북선 2척, 전라우수군의 판옥선 25척, 경상우수군의 판옥선 3척으로 대규모 연합함대를 편성했다.
6월 5일 이른 아침에 착량에서 거제도민 김모(金毛) 등으로부터 왜군이 당항포로 들어갔다는 정보를 입수한 이순신 장군은 거북선을 앞세우고 곧장 당항포로 향했다. 당항포로 들어가는 좁은 입구를 당목이라고 한다. 이순신 연합함대가 당목 근처에 이르렀을 때, 함안군수 유숭인이 기병 1,100명을 이끌고 진해(마산합포구 진동면 진동리)로 넘어와 왜군과 대치하고 있었다.

이순신 장군이 함안 육군에게 사람을 보내어 물었더니, "당항포 입구는 좁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해전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바다가 넓다"고 했다. 이순신 장군은 즉시 선발 정찰대를 당항만으로 들여보내면서 신기전으로 서로 교신하기로 약속했다. 물론 후방경계를 위해 복병선 4척을 당목 입구에 배치해 두는 것을 잊지 않았다. 당목으로 들어간 선발대가 잠시 후 본대에게 빨리 들어오라는 신호로 신기전을 높이 쏘아 올렸다. 신기전은 자체 탄약통을 달고 로켓 추진 방식으로 날아가는 통신용 화살이다.
그날 적은 당항만 서쪽 끝 속칭 '속싯개'에 집결해 있었다. 속싯개는 고성읍 죽계리 평계마을이다. 지금은 일대가 많이 매립되었지만 임진왜란 당시에는 큰 배들이 들락거릴 수 있는 바다였다. 그날 적선은 총 26척이었다. 적도들은 검은 칠을 한 배를 타고 있었으며 검은 천에 '나무묘법연화경(南無妙法蓮花經)'이라는 흰색 글씨를 쓴 깃발을 달고 있었다. 이것은 함경도로 올라간 가토 기요마사의 육군 부대 문장과 같은 것이다.

속싯개에서 퇴로가 막힌 왜군들이 혹시라도 배를 버리고 육지로 상륙하면, 우리 민간인들을 괴롭힐 것이 뻔했다. 이를 간파한 이순신 장군은 적의 퇴로를 일시적으로 열어주고 당항포 앞으로 나오도록 유인했다. 적장이 탄 대장선은 양쪽에서 호위를 받으며 탈출을 시도했다. 거북선의 공격을 받은 적 대장선은 침몰하기 시작했고 적장은 수많은 화살을 맞고 고꾸라졌다. 대장이 죽자 일순간 지휘체계가 무너진 왜군들은 앞다투어 도망치기 시작했다. 상당수가 배에서 뛰어내려 마암면 두호리 속칭 '머릿개'로 상륙했고, 일부는 거류면과 동해면 경계 지점에 있는 속칭 '도망개' 쪽으로 도망쳤다.
조선수군이 당항포 앞바다에서 계속 포위 공격을 펼치자 적선 4척이 북쪽 회화면 배둔리 남단의 속칭 '잡안개' 쪽으로 도주했다. 이 일대도 지금은 매립이 되어 논으로 변했다. 조선수군은 머릿개 쪽으로 상륙한 적을 추격하여 적의 머리 47급을 베었고, 도망개와 잡안개 쪽의 적들도 일망타진했다.

6월 5일 당항만 일대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이순신 연합함대는 적선 26척 중 25척을 불태워 없애거나 격침시켰다. 이날 이순신 장군은 "적선 1척은 온전히 남겨 두어 적 패잔병들이 타고 도망가게 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물에 빠진 패잔병들과 산으로 도망친 적들이 우리 백성을 죽이거나 괴롭히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애민정신의 발로였다.
이순신함대는 6월 5일 밤 당목을 빠져나와 '머루장(亇乙于場)'에서 밤을 새웠다. 머루장은 조선 후기에 포도면이었던 현 동해면 용정리 매정마을이다. 우리말 '머루'는 한자로 표기하연 '포도(葡萄)'가 된다. 다음날 아침 100여 명의 패잔병들이 남겨둔 1척의 배를 타고 당항만을 빠져나왔다. 이를 예상한 방답첨사 무의공 이순신은 당목 근처의 궁도 일대에 복병선을 배치하고 있다가 최후의 1척마저도 불태워 없앴다. 이날 24~25세 정도 되는 적장은 화살 10여 발을 맞고 짐승 같은 울음소리를 내며 바다로 떨어져 죽었다.

이상은 제1차 당항포해전의 경과다. 여기서 우리는 꼭 기억해야 할 것이 하나 있다. 다름 아닌 기생 월이의 활약이다. 월이에 대한 이야기는 설화로 자세히 전해오므로 더 이상 이야기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다만 이 설화가 너무 구체적이라 역사적 사실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필자는 확신한다. 무기산 아래 무기정이 있었고 그 근처에 기생집이 있었다는 것은 동여도를 비롯한 여러 고지도에서 확인할 수 있다.

월이 설화와 비슷한 의기들의 이야기는 진주 논개와 해남의 어란을 들 수 있다. 진주 의암에서 적장을 안고 남강으로 뛰어들었던 논개와, 명량해전 직전 적장의 애인이었던 어란이 이순신 장군에게 왜군의 출정 사실을 알리고 여낭이라는 벼랑에서 몸을 날려 생을 마감한 이야기가 전해 온다. 세 고장이 의논하여 의기축제를 공동으로 개최하는 것도 교려해볼 만하다.
고성은 임진왜란과 관련하여 당항포, 적진포, 어선포, 머루장, 소비포, 당목, 벽방산 등의 전적지가 있고 속싯개, 머릿개, 도망개, 잡안개, 군징이, 망대끝 등의 구전 지명이 남아 있다. 벽방산 망장 제한국과 적진포의 피란민 이신동 등은 정사에 기록된 인물들이지만 이 고장 구전 설화의 백미는 월이라고 생각된다. 앞으로 향토사학자들이 이 설화를 정사화하는 작업을 계속하여 세계적인 스토리텔링 소재로 발전시키기 바란다.
-이 글은 고성향토문화선양회가 출범 10주년을 맞아 출간한 '월이 문학' 창간호에 기고한 내용입니다.
[이봉수]
고성향토문화선양회 자문위원
이순신전략연구소 소장
전) 한국토지주택공사 박물관장
전) 순천향대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