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키나와역사] 51. 대교역 시대-류큐의 번영과 해상 무역의 거점 역할

류큐 왕국 대교역 시대,동아시아 바다를 지배한 해양국가의 탄생

1429년 쇼하시왕의 통일과 해양 왕국의 출현

중계 무역으로 번영한 오키나와의 황금기

AI생성이미지

 

14세기부터 16세기에 이르는 시기는 류큐왕국(琉球王國)이 동아시아 해역에서 독보적인 존재감을 드러낸 대교역시대이다. 이 시기의 출발점은 1429년 쇼하시왕(尚巴志)에 의한 삼산통일이다. 북산(北山),중산(中山),남산(南山)으로 분열돼 있던 오키나와 본도는 이 통합을 통해 중앙집권적 구조를 갖춘 단일 국가로 재편되었고, 류큐는 해양왕국으로서 새로운 진로를 선택하게 된다.

 

류큐대교역시대의 국가정신은 1458년 주조된 만국진량의종(万国津梁之鐘)에 집약되어 있다. 이 명문은 류큐가 남해의 요충지로서 중국 명나라와 질서를 같이하고,일본과 우호를 맺으며,배를 만국의 가교로 삼아 번영하는 나라임을 선언한다. 류큐는 단순한 운송국이 아니라 문화와 기술,물자의 중개자라는 역할을 스스로 규정했다.

 

이 비전은 나하항의 성장으로 구체화되었다. 나하항은 중국,조선,일본,동남아시아에서 도착한 선박과 상인들로 붐비는 국제항으로 발전했고, 슈리의 왕권과 직결된 경제핵심지로 자리 잡았다.

 

류큐의 경제적 토대는 명나라(明)와의 책봉(冊封)·조공체제였다. 국왕은 명황제로부터 정통성을 승인받는 대가로 조공무역이라는 독점적 교역권을 확보했다. 류큐는 말,유황,조개류,바초후를 비롯해 일본과동남아시아에서조달한물품을 명에 바쳤고, 답례로 도자기,비단,철기,서적을 하사받았다. 이 고부가가치 상품들은 다시 주변국으로 유통되며 왕실재정을 지탱했다.

 

류큐의 항로는 북쪽의 일본·조선을 넘어 남쪽의 마나반(真南蛮),즉 동남아시아로 이어졌다. 샴(태국),자와(인도네시아),말라카,파타니 등은 주요 교역 상대였다. 15세기에서 16세기 사이 류큐선단은 샴에만 수십 차례 파견되었고, 후추,소목,상아,남방주 같은 물품을 중계하며 막대한 이익을 창출했다.

 

포르투갈과 스페인 상인들은 류큐인을 레키오(Lequio)라 불렀다. 동방제국기에 등장하는 류큐상인은 정직하고신뢰할수있는상인, 동포를 노예로 팔지않는 민족으로 기록된다. 이는 류큐가 단순한 무역국을 넘어 독자적 윤리와 정체성을 가진 국가였음을 보여준다.

 

무역으로 축적된 부는 문화로 환원되었다. 삼신(三線),아와모리,빙가타 염색은 모두 대교역시대에 완성된 문화유산이다. 슈리성의 확장,용담(龍潭)연못과 원각사(円覚寺) 건립 역시 국제교류로 유입된 기술과 자본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16세기 중반 이후 서구세력의 진출과 명나라 해금완화,일본상인의 직접진출은 류큐중계무역의 기반을 약화시켰다. 그러나 이 시기에 형성된 해양정체성과 국제감각은 1879년 류큐처분까지 왕국을 지탱한 정신적 근간으로 남았다.

류큐의 대교역시대는 작은 섬나라가 국제질서 속에서 선택과 전략으로 번영할 수 있음을 증명한 사례이다. 만국진량의 정신은 오늘날 오키나와가 지닌 개방성과 다문화성을 이해하는 핵심열쇠다.

작성 2026.01.19 12:12 수정 2026.01.19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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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