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종의 굴레를 벗고 아버지의 품으로: 무슬림의 심장을 울리는 '사랑의 설교'
뜨거운 바람이 살갗을 파고드는 중동의 척박한 땅, 그곳에서 나는 오랜 세월을 보냈다. 매일 새벽 모스크의 미나레트에서 울려 퍼지는 아잔 소리는 그들에게는 경건의 부름이었으나, 내게는 마치 해결되지 않는 갈증을 안고 살아가는 영혼들의 신음처럼 들렸다. 그들은 평생을 '복종'이라는 거대한 짐 아래에서 심판의 공포를 이겨내기 위해 몸부림치며 살아간다. 이제 우리 곁에 다가온 무슬림들에게 전해야 할 복음의 내용이 무엇인지 다시금 묵상한다. 이것은 단순한 종교적 지식의 전달이 아니다. 한 인간의 영혼이 다른 영혼에 건네는, 생명을 향한 뜨거운 초대장이다.
왜 우리는 그들의 '머리'가 아닌 '심장'에 말해야 하는가?
무슬림들에게 하나님(알라)은 거룩하고 위대하시지만, 동시에 너무나 멀리 계신 절대 군주다. 그들이 아흔아홉 가지 신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할 때, 정작 그 이름들 속에서 '아버지'라는 친밀함을 찾기는 어렵다. 이슬람은 철저히 행위와 보상에 기반을 둔 종교적 시스템이다. 자신의 선행이 악행보다 무거워야 천국에 갈 수 있다는 불확실한 소망은 그들의 삶을 끊임없는 영적 긴장 상태로 몰아넣는다.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가장 먼저 부딪히는 벽은 '교리적 논쟁'이다. 하지만 논쟁으로는 영혼을 얻을 수 없다. 우리는 그들이 평생을 지고 온 '종의 멍에'를 벗겨줄 '사랑의 논리'로 접근해야 한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스스로 낮아지셨고, 우리를 종이 아닌 자녀로 부르신다는 충격적인 은혜의 선언이다. 이 설교의 핵심은 그들의 두려움을 공감하고, 그 두려움이 끝나는 지점이 바로 십자가임을 보여주는 데 있다.
무엇을 전하며, 누구의 영혼을 깨울 것인가?
무슬림의 심장을 파고드는 성경 구절들은 그들이 가진 영적 결핍을 정확히 겨냥한다. 설교의 중심에는 언제나 '사랑'과 '안식'이 있어야 한다.
첫째, 요한일서 4장 18절을 통해 심판의 공포를 걷어내야 한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평생을 "내가 지옥에 가면 어떡하지?"라는 불안 속에 사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형벌을 대신했다는 소식은 사막의 오아시스와 같다.
둘째, 마태복음 11장 28절의 안식으로 초청한다.
율법의 의무에 지친 이들에게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라는 말씀은 종교적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한다. 설교자는 이 구절을 통해 기독교가 또 다른 율법이 아니라, 이미 이루어진 구원을 누리는 기쁨임을 선포해야 한다.
셋째, 로마서 5장 8절로 하나님의 자기 비하를 설명한다.
무슬림들은 하나님이 죽는다는 것을 수치로 여긴다. 하지만 우리는 왕이 종을 위해 죽는 것이 수치가 아니라, '사랑의 확증'임을 설교해야 한다. 십자가는 무능함이 아니라, 사랑의 극치라는 사실을 전할 때 그들의 굳게 닫힌 마음 문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어디서든,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이러한 우리의 설교와 전도는 비단 교회 강단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시장 바닥에서, 난민 캠프의 텐트 안에서, 혹은 한국의 이주민 밀집 지역의 작은 카페에서 우리는 이 복음의 문장들을 낭독한다.
어느 날 중동의 뒷골목에서 만난 노인은 내게 물었다. "내가 죽을 때 내 저울이 가벼우면 어떡하나?" 나는 그의 떨리는 손을 잡고 요한복음 14장 6절을 읽어주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그 순간 그의 눈에 고인 눈물을 나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그것은 진리에 대한 목마름이 해소될 때 터져 나오는 영혼의 갈채였다. 우리는 그들이 영적으로 가장 갈급한 순간, 즉 자신의 노력으로 신의 기준에 도달할 수 없음을 깨닫는 바로 '그때'에 이 복음을 전해야 한다.
십자가, 그 영원한 화해의 응답
결국 무슬림을 향한 전도의 결론은 언제나 '십자가'여야 한다. 십자가는 막힌 담을 허무는 화해의 실체다. 우리가 그들에게 전하는 복음은 기독교라는 종교의 우월함이 아니라, 우리가 모두 하나님의 긍휼이 필요한 죄인이라는 겸손한 고백에서 시작된다.
오랜 기간 무슬림들과 함께 보낸 여정 끝에 내가 깨달은 것은, 무슬림들이 가장 그리워하는 건, 어떤 문제에 대한 정답이 아니라, '진정한 아버지의 품'이라는 사실이다. 전도자는 그 품을 자기의 삶과 인격으로 증명해 내는 파수꾼이다. 우리의 복음 전도가 단순한 외침을 넘어 그들의 삶을 보듬는 온기가 될 때, '지하드'의 칼날은 무력해지고 십자가의 평화가 그 땅에 강물처럼 흐를 것이다. 우리는 오늘도 그 새벽을 기다리며 사랑하기를 멈추지 말아야 한다.
"당신은 심판의 공포 앞에 떨고 있는 한 종의 인생을 사시겠습니까, 아니면, 당신을 위해 목숨을 버린 아버지의 품 안에서 사랑 받는 자녀의 인생을 사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