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당신의 월요일은 안녕하십니까?
주일(일요일) 저녁, TV 예능 프로그램의 끝을 알리는 시그널 음악이 들려올 때 당신의 심장은 어떤 반응을 보이는가? 숨이 가빠오고 가슴 한구석이 답답해진다면 당신은 지극히 평범한 현대인이다. 우리는 일하기 위해 태어난 존재처럼 매일 아침 전쟁 같은 출근길에 오르지만, 정작 일터에서 느끼는 감정은 '소외'와 '피로'뿐이다. "먹고 살려고 하는 짓인데, 왜 일할수록 죽을 것 같을까?"라는 비명 섞인 질문은 이제 대한민국 직장인들의 공통된 독백이 되었다.
우리는 노동을 철저히 '생존을 위한 비용'으로 치부한다. 일하는 시간은 내가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해 저당 잡힌 '죽은 시간'이고, 퇴근 후의 짧은 휴식만이 '진짜 삶'이라고 믿는다. 이러한 이분법적 사고는 우리를 끊임없는 분열로 몰아넣는다. 일터에서의 나(Work)와 집에서의 나(Life)를 억지로 떼어놓으려 애쓰지만, 그 경계가 무너질 때마다 우리는 번아웃이라는 절벽 아래로 추락한다.
하지만 인류 역사의 지혜를 담고 있는 고대 히브리어는 우리에게 전혀 다른 관점을 제시한다. 그들은 노동을 가리켜 '아보다(עֲבוֹדָה, Avodah)'라고 불렀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 단어가 성경의 문맥 속에서 '예배'와 '섬김'으로도 번역된다는 점이다. 노동이 곧 예배이고, 예배가 곧 노동이었던 이 신비로운 단어 속에 우리가 그토록 갈구하던 '행복한 일터'의 열쇠가 숨겨져 있다. 당신이 지금 마지못해 끌려가는 출근길이 사실은 가장 거룩한 찬양의 선율이 될 수 있다면, 당신의 월요일은 어떻게 변하겠는가?
종의 굴레에서 자유의 섬김으로
'아보다'의 어원인 '에베드(עֶבֶד, Eved)'는 본래 '종'이나 '노예'를 의미한다. 이는 노동이 가진 원초적인 고통과 비천함을 부정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고대 근동 사회에서 노동은 가혹한 현실이었고, 특히 이집트에서 노예 생활을 했던 히브리인들에게 노동은 착취와 죽음의 다른 이름이었다. 그러나 이 단어가 히브리인들의 신앙 체계 안으로 들어오면서 놀라운 질적 변화를 겪는다.
창세기 2장에서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신 후 에덴동산을 '경작하며(עָבַד, Abad) 지키게' 하셨다. 여기서 '경작하다'라는 단어가 바로 '아보다(עֲבוֹדָה)'의 동사형이다. 즉, 노동은 타락의 결과로 주어진 형벌이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돌보고 완성해가는 '거룩한 위임'이었다. 노동의 본질이 '착취'에서 '청지기적 돌봄'으로 바뀐 것이다.
사회경제적 관점에서 볼 때, 고대 사회의 계급 구조는 노동하는 계층과 사색(예배)하는 계층을 엄격히 분리했다. 하지만 히브리적 사고는 이 장벽을 허물었다. 제사장이 성소에서 제사를 지내는 행위도 '아보다'였고, 농부가 밭을 갈고 대장장이가 쇠를 두드리는 행위도 동일한 '아보다'였다. 이는 노동의 귀천을 없애고 모든 일상적 행위에 종교적 숭고함을 부여하는 혁명적인 발상이었다. 이러한 배경은 현대인들이 일터에서 느끼는 '계급적 소외'를 극복하고, 자신의 직업이 가진 본질적인 가치를 재발견할 수 있는 역사적 토대를 제공한다.
소명과 성과 사이의 줄타기
'아보다'의 통합적 정신은 역사적으로 다양한 전문가들에 의해 재해석되어 왔다. 종교 개혁가 장 칼뱅(Jean Calvin)은 이를 '직업소명설(Vocation)'로 발전시켰다. 그는 모든 직업이 하나님으로부터 부름받은 거룩한 자리라고 주장하며, 구두 수선공이 최선을 다해 좋은 구두를 만드는 것이 곧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이라고 역설했다. 이는 중세의 금욕적 영성을 일상의 영역으로 끌어내려 근대 자본주의 발전에 윤리적 동력을 제공했다.
현대 사회학자 한병철은 그의 저서 『피로사회』에서 노동의 현대적 비극을 꼬집는다. 그는 우리가 타인에 의해 착취당하는 단계를 넘어, 스스로를 끊임없이 착취하는 '성과 주체'가 되었다고 진단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아보다'는 강력한 해독제가 된다. 내가 하는 일이 단순한 성과 지표를 위한 것이 아니라, 우주적 질서에 기여하는 '섬김'이라는 인식을 가질 때, 비로소 자기 착취의 고리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심리학자 미하이 칙센트미하이(Mihaly Csikszentmihalyi, 1934-2021)의 '몰입(Flow)' 이론 역시 이와 맥을 같이한다. 그는 사람이 자신의 기술과 과제의 난이도가 적절한 균형을 이룰 때, 시간이 가는 줄 모르는 황홀한 몰입 상태에 빠진다고 말했다. 히브리인의 '아보다'는 이 몰입의 상태를 영적인 차원으로 승화시킨 개념이라 할 수 있다. 몰입이 심리학적 현상이라면, 아보다(노동=예배)는 그 몰입에 '의미'와 '목적'이라는 영혼의 숨결을 불어넣는 작업이다. 자신의 일이 사회에 긍정적인 가치를 기여한다고 믿는 직장인들이 그렇지 않은 그룹에 비해 직무 만족도가 3배 이상 높다는 통계는 '아보다'의 실질적인 힘을 증명한다.

워라밸은 분리가 아니라 통합이다
우리는 흔히 '워라밸(Work-Life Balance)'을 일과 삶의 물리적 시간을 반반으로 나누는 것이라 착각한다. 하지만 이는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일하는 시간이 지옥이라면, 퇴근 후의 시간이 아무리 천국이라 해도 인생의 절반은 여전히 지옥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의미의 워라밸은 일과 삶의 '통합(Integration)'에서 온다. 그리고 그 통합의 중심에 바로 '아보다'가 있다.
노동과 예배가 분리될 때 발생하는 가장 큰 비극은 '인격의 파편화'다. 회사에서의 나는 독하고 냉혈한 사람인데, 교회나 집에서의 나는 선량하고 따뜻한 사람일 수 없다. 이러한 괴리는 내면의 갈등을 유발하고 정신적 에너지를 소진시킨다. 하지만 우리가 일을 '아보다(섬김)'로 인식하기 시작하면, 일터는 나의 가치관과 신념이 실현되는 거대한 실험실이 된다.
당신이 만드는 제품, 당신이 작성하는 보고서, 당신이 고객에게 건네는 서비스는 누군가의 불편을 해소하고 삶을 이롭게 하는 행위다. 이것이 바로 '아보다'가 말하는 섬김의 본질이다. 일터에서 만나는 동료와 고객을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고귀한 존재로 대하며, 그들을 위해 최상의 가치를 제공하려 노력하는 과정 자체가 가장 숭고한 예배가 된다.
통계에 따르면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을 넘어서, 개인의 업무 자체에서 '의미(Meaning)'를 찾는 구성원들이 많은 조직일수록 이직률은 낮아지고 창의성은 높아진다. 이는 '아보다'적 관점이 단순히 개인의 마음 수양을 넘어, 기업의 지속 가능한 성장을 돕는 가장 강력한 경영 전략임을 시사한다. 노동은 결코 돈을 벌기 위해 견뎌야 하는 형벌이 아니다. 그것은 나의 존재를 통해 세상을 이롭게 하는 가장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방식이다. 이제 우리는 일터에서의 땀방울을 고통의 증거가 아닌, 거룩한 헌신의 흔적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당신의 책상은 무엇을 위한 제단인가?
초두에 던졌던 질문으로 다시 돌아가 보자. 왜 우리는 일할수록 불행한가? 그것은 우리가 일을 '아보다'에서 분리하여 메마른 숫자로만 취급했기 때문이다. 영혼이 빠져나간 노동은 껍데기에 불과하며, 그 껍데기를 채우기 위해 소비하는 돈은 결코 우리를 치유할 수 없다.
3,000년 전 히브리인들이 광야에서 성막을 지을 때, 그들은 기술적인 정교함뿐만 아니라 온 마음을 다한 '아보다'의 자세를 가졌다. 그들에게 노동은 신의 창조에 동참하는 거룩한 초대였다. 오늘날 AI와 로봇이 인간의 노동을 대체하는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 기술이 노동의 '양(Quantity)'을 가져갈 때, 인간에게 남은 최후의 보루는 노동의 '질(Quality)'과 '의미'다. 기계는 작업을 할 수 있지만, '아보다'를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당신이 사무실 책상 앞이나 업무 시간에 임할 때 잠시 눈을 감고 생각해보라. 이 자리는 단지 월급을 받기 위해 잠시 머무는 정거장이 아니다. 당신이 만지는 서류, 당신이 노동하는 시간, 당신이 나누는 회의의 대화 속에 타인을 향한 진심 어린 섬김을 담아낼 수 있다면, 그곳은 곧장 지성소가 된다. 일과 삶의 균형은 퇴근 시간을 앞당기는 기술이 아니라, 일을 대하는 당신의 태도에서 시작된다. 당신의 노동이 곧 당신의 예배가 될 때, 비로소 당신은 자유로워질 것이다. 당신의 책상은 무엇을 위한 제단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