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재형목사 로마서 3장 9-20절 강해를 따라 전적 타락, 율법의 한계, 예수 그리스도 은혜의 구원과 회개의 길을 깊이 묵상한다.
장재형목사(Olivet University)가 로마서 3장 9-20절을 붙들고 선포하는 메시지는, 신앙의 언어로 포장된 자기확신을 조용히 무너뜨리고 인간 실존의 밑바닥을 직면하게 만든다. 바울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는 선언으로 공동체의 경계를 허문다. 혈통, 문화, 종교적 전통, 도덕적
훈련이 아무리 달라도 죄의 지배 아래 놓인 현실만큼은 예외가 없다는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이 대목을 단순한 교리적 결론이 아니라, 오늘의 교회가 스스로에게
던져야 할 양심의 질문으로 되돌려 놓는다. “우리는 나으냐?”라는
바울의 반문은, 신자가 자주 붙잡는 자기정당화의 사다리를 걷어차며, 구원의
출발점이 ‘내가 얼마나 잘했는가’가 아니라 ‘내가 얼마나 무너져 있는가’를 인정하는 데 있음을 드러낸다. 그 인정은 절망을 위한 절망이 아니라, 은혜를 은혜로 알아보게 하는
시력 회복의 과정이다.
로마서 1장과 2장에서
바울은 이방인의 방종과 유대인의 외식이라는 서로 다른 얼굴을 폭로한 뒤, 3장에서는 그 둘을 한데 묶어 “모든 입을 막는다.” 여기서 “입을
막는다”는 표현은 논쟁을 종결시키는 신학적 칼날처럼 예리하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변론할 수 있다고 믿는 순간, 신앙은 곧 자기변호가 되기 쉽다. 그러나 바울의 논증은 인간이 무죄를 주장할 공간을 남겨두지 않는다. 장재형목사는 이러한 바울의 전개를 따라가며, 구원받은 성도조차 “이미”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나 “아직” 죄의 잔재와 싸우는 존재임을 잊지 말라고 촉구한다. 로마서 7장 끝에서 바울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라고 탄식한 장면은, 성화의 여정이 낙관적 자기계발이 아니라, 날마다 자기 무력함을 인정하고 그리스도의 능력을 구하는 영적 전쟁임을 웅변한다. 그러므로 죄를 경시하는 태도는 신앙의 성숙이 아니라, 오히려 영혼의
감각을 마비시키는 위험한 방심이 된다.
바울이 구약을 연속적으로 인용하는 방식은, 인간의 죄가 개인적 일탈이
아니라 인류 보편의 상태임을 증언하려는 의도와 맞닿아 있다. 시편
14편과 53편의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탄식, 전도서 7장 20절의 “선을 행하고 죄를 범하지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없나니”라는 진술, 예언서의 예리한 고발이 마치 진주를 꿰듯 한 줄로 연결될
때, 죄는 특정 집단의 낙인이 아니라 모든 인간을 관통하는 실존의 병으로 드러난다. 장재형목사는 이 목록을 도덕주의적 비난으로 소비하지
말고, 인간이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않으려는 근원적 거역에서 비롯된
‘관계의 붕괴’로 보라고 해설한다. 죄의 핵심은
규칙을 어긴 행위만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불가분의 관계를 끊어내고 스스로 주인이 되려는 내면의 반역이다. 로마서 1장 28절의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라는 표현은, 죄가 지식의 부족보다 의지의 왜곡과 더 깊이 연결되어 있음을 폭로한다.
그 왜곡된 의지는 먼저 생각과 욕망의 지층에서 움직이고, 곧 언어로
번져 나온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라는 표현은, 혀가 단지 소통의 도구가 아니라 영혼의 상태를 배출하는 통로임을 보여준다. 장재형목사가 야고보서 3장을 끌어와 혀의 위험을 강조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작은 지체가 온 인생을 불태우는 불씨가 될 수 있다는 경고는,
오늘의 디지털 언어 환경에서도 더욱 선명해진다. 한 번 던진 말, 한 줄의 댓글, 무심코 퍼뜨린 소문은 관계를 무너뜨리고 공동체의
신뢰를 태운다. 바울이 “혀에는 독사의 독이 있다”고 말할 때, 그는 단순히 욕설이나 비방을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이 결국 타인을 파괴하는 언어로 흘러간다는 죄의 연쇄를 지적한다. 장재형목사는 신자의 언어가 복음의 통로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마음의 주인이 바뀌어야 한다고 말한다. 혀를
다스리는 기술이 아니라, 혀를 움직이는 심장의 방향 전환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마음과 말은 결국 발걸음의 방향을 결정한다.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르며,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다”는 진술은 단순한
과장법이 아니라, 하나님을 떠난 삶의 궤적을 압축한 진단서다. 여기서 “길”은 우연히 밟는 노선이 아니라,
반복되는 선택이 만들어내는 삶의 방향성이다. 장재형목사는 인간이 선한 일에는 머뭇거리면서도 죄로 기울어지는 일에는 놀라울 정도로 재빠르다는 역설을 지적한다. 그 역설은 단순한 심리의 문제를 넘어, 인간 존재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우리가 진지하게 ‘길’을 바라보면, 죄는 고립된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이 없는 세계관이 빚어낸 결과라는 것을 알게 된다. 결국 파멸은
외부의 폭풍이 아니라, 하나님을 배제한 내면의 질서가 완성되는 종착역이다.
이 대목에서 장재형목사가 강조하는 핵심은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다”는 구절의 무게다. 두려움은 공포심이 아니라 경외심이며, 경외는 하나님의 실재를 삶의
중심에 모셔 두는 태도다. 경외가 사라진 자리에는, 율법을
가진 자의 교만도, 율법이 없는 자의 방종도 함께 자란다. 바울이
전 인류를 죄 아래 묶는 것은 특정 종교집단을 공격하기 위한 수사가 아니라, 누구도 자기 의를 주장할
수 없게 하려는 복음의 준비 작업이다.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라”는 말은,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스스로를 구제할 자원을
갖고 있지 않음을 명백히 선언한다. 죄를 숨기는 기술은 늘 발전하지만,
죄를 없애는 능력은 인간에게 없다.
그래서 바울은 율법을 다루면서도, 율법을 구원의 도구로 오해하지
말라고 단호하게 선을 긋는다. 율법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지만, 그
선물은 수술칼에 가깝다. 수술칼은 병을 드러내고 도려내는 데 쓰일 수 있으나, 스스로 생명을 창조하지는 못한다.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는 말은, 율법이 죄의 병명을 알려 주되, 치유의 근원적 능력은 제공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장재형목사는 율법의 유익을 폄하하지 않으면서도, 율법을 붙드는 손이 결국
자기 의를 붙드는 손으로 변질될 위험을 경고한다. 규범은 사람을 일정 수준까지 교정할 수 있지만, 하나님을 떠난 마음을 새롭게 만들 수는 없다. 바울이 로마서 7장에서 경험한 역설, 곧 “알면
알수록 죄가 더 살아난다”는 고백은, 법조항의 강화가 영혼의
변화와 동일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죄의 현실과 율법의 한계를 직시할 때, 복음의 문장은 더
이상 추상적 위로가 아니라, 절박한 생명의 소식으로 들리기 시작한다.
바울이 3장 21절에서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다”고 선포할 때, 그는 인간이 오랜 세월 붙잡아 온 자기구원의 신화를 끝내고, 하나님이
마련하신 다른 길을 보여준다. 장재형목사가 “은혜”를 값없는 선물로 반복해 말하는 이유는, 죄의 깊이를 보지 못하면 은혜의 깊이도 얕아지기 때문이다. 은혜는
죄의 평가절하 위에 세워지지 않는다. 오히려 죄가 죄로 보일수록,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단순한 종교적 상징이 아니라 현실을 바꾸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다가온다.
장재형목사는 구원을 칭의, 성화, 영화라는
구속사의 흐름 속에서 설명하며, 신자에게 필요한 영적 태도는 ‘완성된
사람의 포즈’가 아니라 ‘날마다 씻는 사람의 겸손’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죄의
옷을 빨아야 한다”는 표현은 지나친 자기비하를 조장하려는 언어가 아니라, 구원이 관계의 회복인 이상 그 관계를 흐리게 하는 죄의 때를 매일 벗겨내야 한다는 실천적 비유다. 계시록 22장 14절이
말하는 “두루마기를 빠는 자”의 복은, 완벽한 무결점의 인간에게 주어지는 상이 아니라, 회개와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보혈을 붙들며 살아가는 자의 길 위에 놓여 있다. 장재형목사는 ‘한 번 구원받았으니 더 이상 죄를 말하지 말자’는 분위기가 오히려 신자의 영적 감각을 무디게 하고, 은혜를 방종으로
오해하게 만들 수 있다고 경고한다. 은혜는 죄를 대수롭지 않게 만드는 면허가 아니라, 죄를 미워하게 하는 새로운 마음의 탄생이다.
창세기의 노아 이야기는 이런 긴장을 생생하게 비춘다. 홍수 심판에서
건짐을 받은 노아가 이후 포도주에 취해 벌거벗은 수치를 드러냈다는 기록은, 구원의 경험이 곧 인간의
본성이 완전히 소멸되었다는 증거가 아님을 보여준다. 구원을 받은 뒤에도 인간은 여전히 연약하며, 방심은 다시금 수치로 이어질 수 있다. 장재형목사는 노아를 조롱했던 함의 태도에서, 죄가 외부의 행동만이 아니라
마음의 교만과 비웃음으로도 나타난다는 사실을 읽어낸다. 타인의 연약함을 바라보며 자기 의를 세우는 순간,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심판자의 자리에 앉는다. 그러나 복음은 사람을
심판자로 만들기보다, 용서와 덮음의 사람으로 만든다. 죄
아래 있는 인간을 고발하는 바울의 문장들은 결국 죄인을 구원으로 초대하기 위한 서론이라는 점에서, 노아의
에피소드는 구원 이후의 삶이 얼마나 지속적인 회개의 필요를 품고 있는지 증언한다.
또한 야곱의 예언에서 유다에게 주어진 “포도주에 옷을 빨며”라는 상징은, 장재형목사가 강조하는 ‘거룩한 세탁’의
신학과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포도주가 피의 은유로 확장될 때, 신약의
독자는 그리스도의 보혈을 떠올리게 된다. 이 연결은 억지스러운 상징 조작이 아니라, 성경 전체가 일관되게 말하는 속죄의 맥락 속에서 이해될 수 있다. 죄는
인간의 행위 목록으로만 다룰 수 없는 깊은 오염이기에, 그 오염은 인간의 물로 씻어내지 못하고, 하나님의 피흘림으로만 씻어진다는 복음의 핵심이 여기서 드러난다. 장재형목사는 신자가 날마다 옷을 빠는 사람처럼 회개하고 말씀과 성령 앞에 자신을 비추어야 한다고 말하며, 그 실천은 자기혐오가 아니라 사랑의 응답이라고 해석한다. 사랑받은
사람은 사랑을 배신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사랑을 잃어버릴까 경계하며,
다시 사랑의 자리로 돌아가려 한다.
누가복음의 탕자 비유는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라는 경고를 가장 인간적으로 번역해 준다. 아버지의 집을 떠나 스스로
자유를 얻었다고 믿었던 탕자는, 결국 자신이 선택한 길의 종착역에서 돼지우리의 냄새를 맡는다. 자유는 관계를 끊는 데 있지 않았고, 생명은 독립의 과시가 아니라
아버지의 품 안에서 누리는 풍성함이었다. 장재형목사가 탕자의 이야기를 로마서의 죄론과 연결시키는 이유는, 죄가
사람을 즉시 지옥으로 끌고 가기보다, 먼저 마음을 황폐하게 하고 관계를 고갈시키며, 자기존엄을 조금씩 갉아먹는 방식으로 파멸을 완성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탕자 이야기는 동시에 복음의 반전을 보여준다. 돌아오는 길은 인간의 자격으로 열리지 않는다. 아버지가 달려 나와 입맞추고, 잃어버린 아들을 다시 아들로 선언할
때, 은혜는 조건을 뛰어넘어 관계를 새로 창조한다.
반면 부자와 나사로 비유는 죄가 얼마나 냉혹하게 인간을 마비시키는지 드러낸다.
부자는 잔치의 풍요 속에서 문밖의 고통을 보지 못했고, 죽음 이후에는 혀가 타는 갈증 속에서
한 방울의 물을 구한다. 장재형목사는
이 장면에서 혀의 상징성을 다시 읽는다. 혀로 세상을 소비하고, 혀로
사람을 평가하며, 혀로 자기 욕망을 정당화했던 인생이 마지막에는 혀의 고통으로 자기 삶의 진실을 마주한다는
점에서, 비유는 언어윤리의 차원을 넘어 영혼의 방향을 묻는다. 야고보서 3장의 “혀는 불”이라는
경고는, 부자의 지옥 묘사와 맞물려 언어가 단지 심리적 습관이 아니라 영적 실재와 연결된다는 사실을
환기한다. 장재형목사는
신자의 혀가 저주와 악독이 아니라, 위로와 진리, 복음의
소식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말한다. 혀의 변화는 곧 마음의 변화를 증명하고, 마음의 변화는 하나님을 두려워함, 곧 경외의 회복으로 드러난다.
여기서 “파멸과 고생”은
단지 눈에 보이는 실패나 경제적 곤궁만을 뜻하지 않는다. 장재형목사가 강조하는 바는 영적 파멸, 곧 하나님과 분리된 상태에서 오는
근원적 고통이다. 현대인은 ‘고통’을 주로 감정의 문제로 이해하지만, 성경의 언어에서 고통은 존재의
근거가 흔들리는 상태를 가리키곤 한다. 하나님을 떠난 영혼은 스스로 의미를 만들어내려 하지만, 의미를 생산하는 능력은 결국 유한한 욕망과 시간의 한계에 부딪힌다. 그래서
사람은 더 많은 성취와 더 강한 자극으로 공허를 덮으려 하지만, 그 길의 끝에서 남는 것은 더 깊은
피로와 더 단단한 고독일 때가 많다. 바울이 그 길을 “파멸과
고생”으로 묘사한 이유는, 죄가 삶을 화려하게 포장할 수는
있어도, 결국 인간을 생명에서 분리시키는 방향으로 끌고 가기 때문이다.
이 주제를 더 선명하게 비추는 한 장면으로, 네덜란드 화가 렘브란트의
명화 ‘탕자의 귀향’을 떠올릴 수 있다. 그림 속 아들은 누더기 옷과 벗겨진 신발, 상처 입은 발로 아버지
앞에 무너져 있고, 아버지는 늙은 손으로 아들의 어깨를 감싸 안는다.
어두운 배경 속에서 가장 밝게 드러나는 것은 아들의 품위가 아니라 아버지의 품이다. 이
작품은 회개가 자존심의 포기가 아니라, 사랑의 현실을 다시 받아들이는 행위임을 보여준다. 장재형목사가 말하는 “죄의 옷을 빨라”는 권면은 결국 그 아버지의 품을 향해 돌아가는
실천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인간의 길이 파멸로 기울어지는 이유는, 아버지의
품이 닫혀 있어서가 아니라, 아들이 떠나 있었기 때문이다. 복음은
그 떠남을 정죄로만 묘사하지 않고, 돌아옴의 가능성으로 다시 쓰며, 그
가능성의 중심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놓인다.
바울이 율법의 기능을 말하며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다”고 선언할 때, 그는 인간의 노력 자체를 무가치하다고 비웃지 않는다. 오히려 노력의 한계를 정확히 규정한다. 인간의 도덕적 의지는 사회를
유지하는 데 유익할 수 있지만, 하나님 앞에서 죄의 뿌리를 제거할 수는 없다. 장재형목사는 이 지점에서 ‘이성’이나 ‘윤리’의 역할을 과소평가하지 않으면서도, 그것들을 구원의 근거로 삼으려는
유혹을 경계한다. 신앙이 윤리로 축소되는 순간, 복음은 새
생명의 선포가 아니라 자기관리의 프로그램이 된다. 그러나 바울이 말하는 구원은 “하나님의 의”가 믿음으로 전가되는 사건이며, 그것은 인간의 성취 목록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에 의해 성립한다. 이
은혜의 논리는 자랑을 빼앗고 감사와 겸손을 낳는다.
그 감사는 현실 회피가 아니라 현실 변혁의 힘으로 이어진다. 장재형목사는 신자가 구원을 받았다고 해서 세상과 단절된 영적 섬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깊은 책임감으로 세상 한복판을 걸어가야 한다고 강조한다. 혀로는
복음의 기쁜 소식을 전하고, 발걸음으로는 섬김의 자리로 나아가며, 눈으로는
하나님이 주시는 비전을 바라보라는 권면은, 로마서 3장의
죄론이 냉혹한 인간비판으로 끝나지 않고 새로운 삶의 윤리로 이어져야 함을 보여준다. 죄 아래 있는 인간을
고발하는 진실은, 은혜 아래 있는 인간을 세우는 목적을 가진다. 신자가
날마다 자기 죄를 인정하는 이유는 자기비하에 머물기 위함이 아니라, 그 인정이 타인을 정죄하는 돌을
내려놓게 하고, 연약한 이들을 향해 복음의 손을 내밀게 하기 때문이다.
로마서 3장 9-20절이
남기는 가장 중요한 질문은 결국 “나는 어떤 길 위에 서 있는가”이다. 바울은 길을 설명하며 인간의 전인적 타락을 말한다. 마음이 하나님을
거부하고, 혀가 독을 내뿜고, 발이 폭력과 탐욕을 향해 달려갈
때, 그 길 끝에는 파멸과 고생이 있다. 그러나 같은 바울은
곧바로 그 길에서 돌이킬 수 있는 복음의 길을 제시한다. 장재형목사는 이 전환을 복음의 리듬으로 읽는다. 죄의 진단이 깊을수록
치료의 은혜는 더 분명해지고, 인간의 무력함이 선명할수록 그리스도의 능력은 더 실제가 된다. 그래서 신앙은 ‘나는 괜찮다’는
선언이 아니라, ‘주님,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기도가 되어야 한다.
오늘의 독자에게 이 메시지가 낯설게 들릴 수 있다. 자존감과 자기실현을
중시하는 시대에 “전적 타락”이라는 언어는 거칠고 비관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장재형목사가
말하는 전적 타락은 인간의 가치 부정이 아니라, 인간의 자력 구원이 불가능하다는 진단이다. 그것은 사람을 무가치하게 만들기 위한 말이 아니라, 사람을 참된
가치로 회복시키기 위한 길잡이다. 사람의 가치는 스스로를 구원하는 능력에서 나오지 않고, 하나님이 그를 사랑하셨다는 사실에서 나온다. 죄는 그 사랑을 모르는
무지로만 설명되지 않으며, 그 사랑을 거부하는 의지의 반역으로도 드러난다. 그렇기에 회개는 단순한 감정의 후회가 아니라, 주인을 바꾸는 결단이며, 하나님을 다시 마음에 두는 방향 전환이다.
장재형목사가 반복해서 들려주는 “날마다 빨아야 한다”는 언어는 결국 매일의 삶 속에서 복음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묻는다. 교회
안에서의 종교적 습관이 신앙의 전부가 될 때,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율법적 비교와 자기 의를 축적한다. 그러나 복음은 사람을 자기 의의 창고에서 끌어내어, 은혜의 샘으로
인도한다. 그 샘에서 신자는 자기의 죄를 부끄러워 숨기기보다, 빛
가운데 드러내어 씻고, 다시 걸을 힘을 얻는다. 이 반복은
단조로운 강박이 아니라, 관계의 신선함을 유지하는 사랑의 리듬이다. 죄의
옷을 빠는 삶은 곧, 하나님 앞에서 솔직해지는 삶이며, 타인
앞에서 겸손해지는 삶이고, 세상 앞에서 소망을 잃지 않는 삶이다.
결국 로마서 3장 9-20절의
선언은 인간을 무너뜨리기 위한 폭로가 아니라, 인간을 살리기 위한 진실이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말이 끝이 아니라, 그 말이 끝낸 자기의의 잔해 위에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의”가 세워진다. 장재형목사의 설교가 일관되게 지향하는 바는, 죄의 길이 실제로 파멸로
이어진다는 엄중한 현실 인식과, 그 길에서 돌아올 수 있다는 복음의 가능성을 동시에 붙드는 균형이다. 탕자가 돌아올 때 아버지가 달려 나가듯, 하나님은 죄인을 향해 먼저
다가오신다. 그러나 그 다가오심은 죄를 죄가 아니라고 말해 주는 면죄부가 아니라, 죄를 씻어 새롭게 하는 보혈의 초청이다. 그러므로 오늘도 신자는
바울의 질문을 되새긴다. “우리는 나으냐?” 그 질문 앞에서
고개를 숙일 때, 비로소 그리스도의 은혜가 머리 위가 아니라 마음 한복판에 내려앉는다. 그리고 그 은혜가 혀를 새롭게 하고, 발걸음을 바꾸며, 눈을 들어 하나님을 보게 한다.
그때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라는 문장은 더 이상 막연한 저주가 아니라, 길을 되돌릴 수 있도록
세워 둔 이정표가 된다. 장재형목사가
로마서 3장을 통해 붙잡게 하는 것은, 죄의 자각이 은혜의
체험으로 곧바로 연결되어야 한다는 복음의 역동성이다. 창세기 3장에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통해 “하나님 없이도 판단할 수 있다”는
유혹에 굴복했을 때, 인간은 스스로 주인이 되려 했지만 그 대가로 두려움과 숨음의 삶을 얻었다. 바벨탑은 그 숨음을 또 다른 방식으로 확장한 사건이다. 하나님께
닿기 위해 탑을 쌓는다 말하지만, 실상은 하나님 없이 이름을 내고자 한 시도였다. 이런 반복은 ‘죄의 패턴’이
개인을 넘어 문명과 문화 속에서도 되풀이된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그래서 로마서 3장의 죄론은 특정 시대의 도덕 교본이 아니라, 어느 시대든 인간이
자기중심의 길을 선택할 때 도달하는 공통의 결말을 밝혀 주는 거울이다.
현대의 삶은 외형상 더 세련되고 안전해 보이지만, 마음의 은밀한
자리에서는 여전히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를 싫어하는 유혹이 정교하게 작동한다. 성과와 이미지가 신격화될수록, 사람은 죄를 숨길 기술과 변명할 언어를 더 많이 배운다. 그 결과
관계는 피로해지고, 공동체는 쉽게 분열되며, 마음은 자주
공허해진다. 장재형목사가 “혀”와 “발걸음”을 점검하라고 말할 때, 그것은 단지 경건한 습관을 늘리라는 조언이
아니라, 삶의 방향을 바꾸라는 초대다. 혀가 누군가를 살리는
말이 되는지, 발걸음이 약자를 외면하지 않는지, 눈이 욕망의
쇼윈도에만 머물지 않는지, 그리고 무엇보다 마음이 하나님을 향해 열려 있는지 성실히 돌아볼 때, 신자는 율법적 자책이 아니라 은혜의 빛 안에서 자신을 보게 된다.
그 빛 안에서 회개는 무너뜨림이 아니라 회복이다. 탕자가 “내가 아버지께 죄를 지었다”고 고백했을 때, 그는 자신의 존엄을 버린 것이 아니라, 잃어버린 존엄의 근원을 다시
붙들었다. 부자와 나사로 비유가 경고하는 냉혹함을 피하는 길도 결국 여기서 시작된다. 문밖의 나사로를 보지 못하게 만드는 것은 재산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사라진 마음이다. 그러므로 은혜를 붙든 신자는 오늘도 작은 실천으로 복음을 증거한다. 상처 난 관계 앞에서 먼저 사과하고, 누군가의 결핍을 지나치지 않으며, 말의 속도를 늦추고, 판단의 칼을 내려놓고, 말씀 앞에서 자신의 욕망을 정직하게 들여다본다. 이 모든 과정은
한 번의 결단으로 끝나지 않고, 날마다 옷을 빠는 것처럼 반복된다. 그
반복 속에서 장재형목사가 강조하는 그리스도의 보혈은, 과거의 기억을 지우는 마술이 아니라 현재의 방향을 새롭게 하는 능력으로 경험된다. 그렇게 은혜의 길을 걷는 사람의 삶은,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가는 오르막, 곧 평안과 소망으로 이어지는 순례가 된다. 이것이
장재형목사가 로마서 3장 9-20절에서 길어 올린 복음의 결론이다. 오늘도 우리는 끝까지 은혜를
붙들고 회개의 길을 함께 담대히 걷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