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비라는 이름의 위선, 혹은 위대한 오해
"착하면 호구 된다." 이 문장은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거부할 수 없는 진리처럼 들린다. 우리는 타인에게 친절을 베풀었다가 이용당하고, 양보했다가 뒤처진 경험을 한 번쯤은 가지고 있다. 그래서일까. 오늘날 '자비'(慈悲)라는 단어는 박물관에 박제된 도덕책 속의 고루한 훈화 말씀 정도로 치부된다. 사람들은 자비를 나약함의 징표로, 혹은 경쟁력을 상실한 자들의 자기합리화로 여긴다. 하지만 단언컨대, 우리가 알고 있는 자비는 가짜일 확률이 높다. 진정한 자비는 상대방에게 휘둘리는 비겁한 순응이 아니라, 생명을 잉태하고 지켜내는 가장 강력하고도 파괴적인 힘이기 때문이다.
히브리어로 자비를 뜻하는 '라하밈(רַחֲמִים, Rachamim)'은 단순히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가장 깊은 곳, 즉 장기가 뒤틀리는 듯한 고통을 동반하는 반응이다. 성공한 1%의 리더들이나 역사적 위인들이 가졌던 공통점은 바로 이 '라하밈'의 감각이 살아있었다는 점이다. 그들은 타인의 고통에 반응함으로써 세상을 움직이는 동력을 얻었다. 당신은 정말로 자비로웠는가, 아니면 거절하지 못하는 비겁함에 자비라는 가면을 씌웠는가? 이제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우리는 3,000년 전 히브리인들이 발견한 생명의 근원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자궁(Rechem)에서 피어난 생존의 언어
히브리어의 독특함은 그 어근(Root)에 있다. 자비를 뜻하는 '라하밈'은 '라함(Racham)'이라는 어근에서 파생되었는데, 이 단어의 원형은 놀랍게도 여성의 '자궁(רֶחֶם, Rechem)'을 의미한다. 고대 히브리인들에게 자비란 관념적인 철학이 아니라, 어머니가 자신의 태중에 있는 아이를 향해 느끼는 본능적이고 물리적인 연결감이었다. 자궁은 생명이 보호받고 양분을 공급받는 가장 안전한 처소이며, 동시에 어머니의 생명력을 나누어 주는 희생의 공간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유목 생활을 하던 고대 근동 사회에서 자비는 단순한 감정이 아닌 사회적 생존 전략이었다. 광야라는 척박한 환경 속에서 타인의 고통에 반응하지 않는 공동체는 반드시 몰락했다. 사회적 경제의 관점에서 보자면, '라하밈'은 신뢰 자본의 시초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이 역동적인 단어는 종교적 의례 속으로 숨어들었고, 현대에 이르러서는 '조건 없는 양보'라는 기형적인 형태로 왜소화되었다. 고대인들이 이해했던 자비는 침입자로부터 생명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자신을 던지는 강인함을 내포하고 있었다. 즉, 자비는 생존을 위한 가장 공격적인 사랑의 형태였던 셈이다.
과학과 심리학이 증명하는 '라하밈'의 효능
현대 심리학과 뇌과학은 이 고대의 통찰이 옳았음을 증명하고 있다. 타인의 고통을 보고 내 내장이 뒤틀리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 것은 단순한 기분 탓이 아니다. '미러 뉴런(Mirror Neuron)' 시스템은 우리가 타인의 감정을 자신의 것처럼 느끼게 하며, 이때 분비되는 옥시토신은 유대감을 형성하고 스트레스를 낮춘다. 심리학자들은 이를 '공감적 고통'이라 부르는데, 흥미로운 점은 성공적인 리더십을 발휘하는 이들일수록 이 공감의 수치가 일반인보다 정교하게 작동한다는 사실이다.
사회학적 견해에 따르면, 현대 사회의 극심한 양극화와 혐오의 근본 원인은 '라하밈(자비)'의 결핍에 있다. 서로를 '자궁'에서 나온 형제로 보지 않고, 제거해야 할 경쟁자로만 인식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구글이나 마이크로소프트 같은 글로벌 기업들이 최근 '공감(Empathy)'을 핵심 역량으로 꼽는 이유를 주목해야 한다. 협력을 이끌어내고 창의적인 솔루션을 만드는 힘은 결국 타인의 필요와 고통을 정확히 읽어내는 '라하밈'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데이터는 말한다. 타인을 돕는 행위가 뇌의 보상 회로를 자극하며, 이는 장기적인 업무 효율성과 창의성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결국 '라하밈'은 도덕적 선택이 아니라 지능의 문제다.

왜 자비가 '호구'를 넘어 '권력'이 되는가
우리가 흔히 말하는 '호구'는 자비로운 사람이 아니라 '경계(Boundary)'가 없는 사람이다. 진정한 '라하밈(자비)'은 단호함을 전제로 한다. 어머니의 자궁이 태아를 보호하기 위해 외부의 균과 싸우고 독소를 걸러내듯, 진짜 자비는 파괴적인 요소로부터 소중한 가치를 지키기 위해 '아니오'라고 말할 줄 아는 힘이다. 1%의 리더들은 이 차이를 명확히 안다. 그들은 타인의 성장을 돕기 위해 쓴소리를 마다하지 않으며, 공동체의 생존을 위협하는 요소에는 단호하게 대처한다. 이것이 바로 히브리어 성경이 묘사하는 자비의 입체적인 모습이다.
실제로 자비로운 리더가 이끄는 조직은 '심리적 안전감(Psychological Safety)'이 높아져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혁신을 일궈낸다. 반면, 공포로 다스리는 조직은 단기적인 성과는 낼지언정 인재의 이탈과 창의성 고갈로 무너진다. '라하밈'은 타인을 통제하려는 욕망을 내려놓고, 그가 스스로 꽃피울 수 있도록 공간을 내어주는 고도의 정치적 기술이기도 하다. 이는 약자가 구걸하는 동정이 아니라, 강자가 베푸는 전략적 배려다. 따라서 자비는 나약함의 증거가 아니라, 타인을 수용할 수 있을 만큼 내면의 공간이 넓다는 '압도적 강함'의 증표다.
당신의 내장은 지금 무엇에 떨리고 있는가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자비는 단순히 좋은 말을 건네는 수준이 아니다. 그것은 타인의 고통 앞에서 내 창자가 끊어지는 것 같은 아픔을 느끼고(라하밈의 근본적 의미), 그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 내 '공간(자궁)'을 내어주는 구체적인 투신이다. '라하밈', 즉 '자비'야말로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가장 신성한 생존 본능이 아닐까? 우리가 누군가에게 자비를 베풀 때, 우리는 단순히 선행을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존재의 근원인 '생명의 태'를 회복하는 것이다.
최근 당신의 마음을 흔든 타인의 고통은 무엇이었는가? 당신은 그 고통 앞에서 당신만의 공간을 내어줄 용기가 있는가? "착하면 호구 된다"는 세상의 거짓말에 속아 당신 안에 깃든 위대한 본능인 '라하밈'을 거세하지 말길 바란다. 진정으로 강한 자만이 자비로울 수 있고, 그 자비야말로 차가운 AI 시대를 넘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최후의 보루가 될 것이다. 이제 당신의 자비를 증명하라. 그것은 당신을 손해 보게 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을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거인으로 만들어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