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용 (수필가/철학자)
나는 천상병의 시 〈귀천〉을 ‘천사의 시’로 명명하기를 좋아합니다. 이 시를 ‘천사의 시’로 명명하는 이유와 관련하여 아직 하고 싶은 말이 많이 남은 듯 하여 새로운 말로 보충하려 합니다.
반복되는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라는 구절과 함께 나의 생각과 의도를 엮어봅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시의 전문입니다. 나는 이 구절들 속에서 아름다운 천사의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돌아가리라’라는 말은 ‘돌아간다’는 동사의 의미 속에 화자의 의지가 담긴 표현입니다.
때가 되면 그럴 것이라는 욕망과 확신이 담겼습니다. 때가 되면 돌아갈 것이라는 얘깁니다.
시인에겐 죽음이 기회가 됩니다. 죽는 순간이 하늘나라로 돌아갈 기회로 돌변합니다.
게다가 ‘돌아간다’는 말에는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간다’는 논리가 엮여 있습니다.
천상병은 ‘귀천’이라는 말을 통해 자신은 ‘원래 하늘나라에서 왔다’는 것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늘에서 왔다, 그래서 하늘로 돌아간다’는 얘깁니다. 시인의 말이고, 시인의 자기소개입니다.
물론 일상에서도 우리는 ‘돌아가셨습니다’라는 말로 슬픈 소식을 전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말은 선의로, 예의로, 양심적으로, 덕담으로 해주는, 상대를 위한 말에 불과합니다. 스스로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바로 여기에 시인의 남다른 의도가 담긴 것입니다.
‘천사의 시’에는 천사의 말이 담겼습니다. 마음의 문을 열고 받아들여야 할 말입니다. 말도 안 되는 말이라고 거부하면 안 됩니다. 괴테의 《파우스트》에도 천사의 말이 수도 없이 담겨 있습니다. 천사의 말에서 천국을 알아보는 것도 능력입니다. 하늘도 하늘 나름입니다.
말이 있습니다. 말의 존재는 이성의 결과물입니다.
이성이 말의 이유입니다. 말은 이성이 있기에 가능합니다.
이성의 도구는 언어입니다. 언어를 운명적으로 가지고 살아야 하는 인간은 말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묵언수행도 결국 진정한 말을 하기 위한 것에 불과합니다.
새벽빛 와 닿으면 순식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이슬처럼 살아도, 그 한 순간에 불과한 삶이어도, 이승에서 보낸 삶에는 무한한 의미가 주어집니다.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 순식간에 돌아가야 할 운명이지만, 그래도 자랑거리가 많은 삶입니다.
천사는 하늘에 돌아가면 반드시 말하겠다고 합니다. 하늘의 주인, 즉 하나님이 그 말을 들어줄 것입니다. 그 하나님 앞에 당당하게 서서 그에게 자랑스럽게 말할 것이라고 다짐합니다.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하늘나라만 아름다운 게 아닙니다. 이 세상도 아름다웠습니다. 삶은 천사의 즐거운 소풍 그 자체였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자신이 있습니까?
자신의 자신감을 드러낼 용기가 있습니까?
용기는 늘 내야 한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아무나 밖으로 드러낼 수 있다면 미덕으로 간주할 이유가 없습니다. 대부분은 드러내지 못하니까 ‘드러내야 한다’는 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1967년 동백림 사건으로 누명을 받아 상상을 초월하는 고문을 받은 시인의 이력을 감안하고 읽으면 비극의 형식이 감지됩니다.
죄 없이 죄인이 되고 혹독한 벌을 받아야 했던 이 세상의 삶이지만 아름다웠다고 인식하는 시인의 인생관 앞에서 비극적인 삶이 인식됩니다.
비극의 주인공이 있습니다. 비극적 인물이 있습니다.
비극의 효과는 카타르시스로 이어집니다. 신선한 인식의 순간으로 나아갑니다. 깨달음으로 펼쳐집니다.
억울함도 원한감정도 분노도 복수심도 개입할 수 없는 해맑은 천사의 이야기가 가슴속에 천둥처럼 진동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