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복과 인내의 미학을 담은 한 장의 그림 〈뻘짓〉

반복 속에서 피어난 예술 — ‘뻘짓’이라는 단어의 재해석

갯벌의 질감처럼 쌓인 시간, 그리고 인간의 흔적

‘하루의 무게’를 그린 예술, 우리 삶을 비추는 거울

 

<뻘짓> 20호. 아크릴, 옻, 황토

 

 

 

‘뻘짓’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보통 웃음이 난다. ‘헛수고’나 ‘무의미한 노력’을 뜻하는 그 단어는 우리 일상에서 종종 자조적인 표현으로 쓰인다. 그러나 작가 로빈의 붓끝에서 태어난 〈뻘짓〉은 이 단어의 의미를 완전히 뒤집는다. 작품 속 인물은 고개를 깊게 숙이고, 갯벌을 파헤치고 있다. 그는 무언가를 찾거나, 혹은 되찾으려는 듯 부지런히 움직인다. ‘결과’를 위한 행위지만 그 반복 자체도 목적이다.

이 작품은 ‘헛된 수고’처럼 보이는 반복된 노동 속에서 인간이 어떻게 시간을 견디고, 존재의 의미를 만들어내는지를 묻는다. 작가는 ‘반복’을 통해 ‘지속’을 이야기하고, ‘노동’을 통해 ‘존엄’을 그린다. 그래서 이 작품은 단순한 풍경화가 아니라 인간의 생을 은유하는 철학적 캔버스다.


〈뻘짓〉의 첫인상은 표면의 질감이다. 화면 전체를 덮은 거친 마티에르는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시간의 기록이다. 갈라지고 쌓인 황토층은 마치 오래된 논바닥이나 메마른 갯벌을 닮았다. 그 표면 위에 한 인간이 있다. 화면의 주인공은 존재하지만, 결코 중심을 차지하지 않는다. 그는 대지의 일부처럼 그려져 있다. 이러한 화면 구성은 “노동의 흔적”을 예술의 언어로 번역한다. 작가는 붓질 대신 긁고, 덧입히고, 다시 벗겨내는 행위를 반복한다. 그 과정 자체가 작품의 주제인 ‘반복과 인내’를 상징한다. 물감이 겹겹이 쌓이며 만들어낸 두께는 ‘시간의 무게’이자, ‘사람의 무게’다. 작품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그 안에 오래 묵은 바람과 손의 온기가 남아 있는 듯하다.


이 그림이 특별한 이유는 시선의 위치다. 작가는 인물을 내려다보지 않는다. 관람자는 인물과 거의 같은 높이, 같은 눈선에서 작품을 마주하게 된다. 이는 단순한 구도적 선택이 아니라 ‘존엄의 복원’이다. 흔히 ‘노동’을 그릴 때 인간은 작아지고, 풍경은 거대해진다. 그러나 〈뻘짓〉에서는 그 반대다. 인물은 작지만, 결코 하찮지 않다. 그가 마주한 갯벌은 배경이 아니라 삶의 무대다. 푸른색과 붉은색이 제한적으로 쓰인 옷의 색감은 이 인물이 단순한 ‘노동자’가 아니라 ‘인간 그 자체’임을 강조한다. 그의 구부린 자세는 굴복이 아니라 집중의 자세다. ‘무의미해 보이는 행동’ 안에 ‘인간의 존엄’이 숨어 있다는 사실을 작가는 조용히, 그러나 확실히 보여준다.


〈뻘짓〉은 처음에는 가볍게 다가오지만, 오래 바라볼수록 묵직해진다. 아침의 빛 아래에서는 표면의 균열이 두드러지고, 저녁이 되면 색감이 가라앉으며 인물의 자세가 더 무겁게 느껴진다. 그것은 마치 하루의 흐름 속에서 느끼는 인간의 피로와 닮았다. 이 그림은 “헛된 하루”처럼 느껴지는 우리의 일상에 질문을 던진다. 정말로 헛된 일은 존재하는가? 아니면, 의미를 부여하지 못한 우리의 시선이 문제일 뿐인가? 작가는 답을 내리지 않는다. 다만, 그림을 통해 “멈춰 서서 다시 보라”고 말한다.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도 인간은 여전히 의미를 만든다. 그 의미가 바로 ‘예술의 시작’이다.

〈뻘짓〉은 그렇게 오래 남는다. 처음엔 웃음을, 그다음엔 침묵을, 그리고 시간이 지난 후엔 자기 이야기로 변한다. 그래서 이 그림은 결국 ‘인내의 미학’이자, ‘삶의 초상화’다.

 

 

 

 

작성 2026.01.27 15:31 수정 2026.01.27 15:31

RSS피드 기사제공처 : 더위즈덤 / 등록기자: 윤남호 무단 전재 및 재배포금지

해당기사의 문의는 기사제공처에게 문의

댓글 0개 (1/1 페이지)
댓글등록- 개인정보를 유출하는 글의 게시를 삼가주세요.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