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재형목사(올리벳대학교), 복음의 환대와 하나 됨


장재형목사 설교를 바탕으로 누가복음 15장 탕자의 비유를 깊이 해설합니다. 회개와 용서, 소유와 하나 됨, 아버지의 마음과 교회 공동체의 환대를 복음의 핵심으로 정리합니다. 


장재형목사(장다윗, 올리벳대학교)  누가복음 15탕자의 비유를 붙들고 오래 머무는 이유는, 이 이야기가 단지방탕했다가 돌아온 한 사람의 감동 서사를 넘어 복음의 심장부를 가장 압축적으로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5장은잃은 양잃은 드라크마를 지나 마침내잃은 아들에 이르러, 하나님 나라의 논리가 인간의 공로주의와 얼마나 정면으로 충돌하는지 보여 줍니다. 특히 장재형목사가 강조하듯, 이 비유가 선포된 자리에는 반드시 기억해야 할 공기가 있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원망입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죄인들을 영접하고, 그들과 함께 식탁에 앉아 빵을 떼는 장면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눈에 식탁은정결한 자들이 정결을 확인하는 경계선이었고, 공동식사는거룩을 보존하기 위한 거리두기의 규칙을 어기는 사건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그 원망을 정면으로 받아내며, 하나님이 누구이신지그리고 하나님이 죄인을 어떻게 보시는지를 세 겹의 비유로 해명합니다. 잃은 것을 찾는 손길, 잃은 것을 발견했을 때의 환희, 그리고 그 기쁨에 참여하지 못하는 종교적 결핍까지, 복음이 드러내는 빛과 그 빛을 거부하는 그림자를 한 화면에 포개어 놓습니다.



탕자의 비유가 강렬한 까닭은, 한 인간이 무너지는 방식이 대단히 현실적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에게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요구합니다. 아직 살아 계신 아버지에게 유산을 당겨 달라는 이 요구는 단순한 경제적 거래가 아니라 관계의 붕괴를 뜻합니다. “아버지와의 함께 있음을 상속의 조건으로 보지 않고, 오히려 상속을함께 있음에서 분리해 떼어낼 수 있다고 믿는 순간, 그는 이미 마음에서 집을 떠난 셈입니다. 장재형목사는 이 지점을 소유의 신학, 혹은 소유의 영성으로 밀고 들어갑니다. 죄의 본질이 반드시 어떤 목록화된 악행의 총합으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내 것이라는 관념이 관계를 절단하면서 시작된다는 통찰입니다. 원래 아버지의 집은 풍성함이 전제된 공간인데, 둘째 아들은 풍성함을함께 누리는 실재가 아니라내 몫으로 확정해야 할 자산으로 오해합니다. 그리고 이 오해가 자유의 오해와 결합할 때, 인간은 가장 쉽게먼 나라로 달아납니다. , 사랑의 품을 떠나는 것을 자유라고 착각하고, 자기결정권을 관계의 파괴로 증명하려 합니다.



그러나 비유의 전개는 더 잔혹하게 솔직합니다. 먼 나라에서 그는 허랑방탕하게 재산을 흩어버리고, 마침내 결핍의 맨바닥으로 내려앉습니다. 돼지를 치는 일, 유대적 상징체계에서 가장 부정한 자리로 떨어진 삶, 그리고 주는 이 없는 쥐엄열매의 공허는, 죄가 약속하는 해방이 결국 노예 상태로 귀결된다는 사실을 극적으로 보여 줍니다. 장재형목사가존재론적 귀환이라는 표현으로 탕자의 회개를 설명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탕자의 회개는 단지미안합니다, 다시는 안 하겠습니다같은 도덕적 다짐이 아니라, “나는 아버지 없이 살 수 없었다는 존재의 자각입니다. 그래서 그의 고백은 구체적 죄목을 장황하게 열거하기보다, 본질을 향합니다.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는 하나님을 떠난 삶 전체가 죄였다는 통전적 인식이며, 다시 말해 관계의 단절이 삶의 단절로 이어졌음을 깨닫는 순간입니다.


그런데 복음의 중심은 탕자의 결심보다 더 멀리, 아버지의 움직임에 놓입니다. 아버지는 아직 거리가 먼데도 아들을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춥니다. 여기에는 심문도, 유예도, 조건부 관찰 기간도 없습니다. 상식의 윤리로는 납득하기 어려운 과잉의 환대가 쏟아집니다. 제일 좋은 옷, 가락지, 신발, 살진 송아지이 상징들은 단지다시 받아들였다가 아니라아들의 지위를 회복시켰다는 선언입니다. 아들이 품꾼의 자리를 청하더라도, 아버지는 그를 품꾼으로 환원시키지 않습니다. 돌아온 순간 곧바로 아들입니다. 장재형목사가 이 장면에서 복음의 정수를 읽어내는 이유는,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태도가교정이전에회복이며, ‘판결이전에포옹이라는 사실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우리의 변명과 정리정돈이 끝난 뒤에 겨우 작동하는 얌전한 시스템이 아니라, 무너진 관계를 단숨에 다시 잇는 하나님의 생명력입니다.


이 비유의 칼날은 그러나 둘째 아들을 넘어 첫째 아들을 향해 돌아옵니다. 형은 떠나지 않았습니다. 겉으로는 성실했고, 규범을 어기지 않았고, 노동을 지속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잔치 소리를 듣고 들어가지 않습니다. 분노는정의감의 얼굴을 쓰고 등장합니다. “저 사람이 재산을 창기들과 함께 삼켜버렸거늘, 어찌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까.” 그의 말에는 사실과 추정이 뒤섞여 있고, 무엇보다아버지의 기쁨이 들어설 자리가 없습니다. 형의 세계에서 관계는 늘 계산으로 환산됩니다. 그는 아버지를 사랑의 대상이라기보다 임금의 분배자로 이해합니다. 자신은충성이라는 노동을 제공했고, 그 대가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장재형목사가 지적하듯, 형의 비극은 집 밖이 아니라 집 안에서 시작됩니다. 공간적으로는 아버지 곁에 있으되, 정서적으로는 아버지와 분리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대답이 복음의 또 하나의 절정을 이룹니다. “,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한 문장은 풍성함의 선언이자 관계의 선언입니다. 이미 함께 있었고, 이미 나누고 있었고, 이미 누릴 수 있었는데형은 그 사실을 모른 채 스스로를 결핍 속에 가둡니다. 여기서 복음은방탕한 죄인의 회복만 말하지 않습니다. ‘의로움을 자부하는 종교인의 고립도 치유해야 할 상처로 드러냅니다.


장재형목사가  이 대목을 한국 교회의 현실과 연결할 때, 그것은 단지 도덕적 훈계가 아니라 공동체의 구조를 묻는 질문으로 확장됩니다. 교회가 커질수록, 자원이 늘어날수록, 사람이 모일수록, “내 몫이라는 언어가 은밀히 공동체를 갉아먹습니다. 탕자가 떠난 이유가소유의 오해에서 출발했듯, 형이 잔치에 들어가지 못한 이유도소유의 오해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탕자는내 몫을 달라고 말하며 분리의 길을 택했고, 형은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지 않았다고 말하며 동일한 분리의 감정을 드러냅니다. 둘은 서로 반대편에 서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같은 질병을 앓습니다. 아버지의 집을함께 누리는 풍성이 아니라쪼개어 소유해야 하는 몫으로 이해하는 순간, 방탕은 밖에서만 생기지 않습니다. 안에서도 생깁니다. 밖에서는 재산을 흩어버리는 형태로, 안에서는 기쁨을 거부하는 형태로. 그래서 장재형목사가청지기 의식을 강조하는 것은 단지 재정 관리의 기술이 아니라, 관계를 지키는 영성의 문제입니다. 모든 것이내 것이 되는 순간 공동체는 분열하고, 모든 것이아버지의 것이라는 인식으로 되돌아갈 때 공동체는 다시 하나 됨의 기쁨을 회복합니다.


이 흐름을 더 깊게 비춰 주는 구약의 메아리로 예레미야 31장이 종종 함께 읽힙니다. 멀리 떠난 에브라임의 탄식과, 그를 향해내 마음이 요동한다반드시 불쌍히 여기리라라고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진술은, 누가복음 15장에서달려가는 아버지의 마음과 맞닿아 있습니다. 복음은 어느 날 갑자기 신약에서 발명된 감상적 인류애가 아니라, 구약에서부터 끈질기게 이어져 온 하나님의 자기 계시입니다. 하나님은 잃은 자를 찾으시는 분이며, 찾았을 때 기뻐하시는 분이며, 그 기쁨에 자녀들이 참여하기를 바라시는 분입니다. 장재형목사 설교는 결국 이 지점에서 교회의 방향을 묻습니다. 교회는 누구를 향해 문을 열어두는가. 그리고 그 문턱을 실제로 낮추는 방식은 무엇인가. 죄인을 환대한다는 말이 단지좋은 말로 끝나지 않으려면, 돌아오는 이에게가락지신발이 상징하는 존엄의 회복을 실제로 제공해야 합니다. 동시에 이미 안에 있는 이들에게는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었다는 복음의 풍성을 다시 들려줘야 합니다. 밖에서 돌아오는 사람만 회개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안에 머무르며 스스로 의로움을 축적하던 마음에도 회개가 필요합니다. 아버지의 집에서 아버지를 오해하는 것만큼 깊은 가난은 없기 때문입니다.


복음서의 편집 흐름을 따라가면, 누가복음 15장 직후 16장에 등장하는불의한 청지기 비유가 의미심장하게 다가옵니다. 원래 성경은 장 구분 없이 읽혔기에, ‘소유를 오해해 떠난 아들의 서사와소유를 다루는 청지기의 지혜는 서로를 비추는 거울처럼 맞물립니다. 탕자의 비유가소유를 내 것으로 확정하려는 욕망이 관계를 파괴한다는 진단이라면, 청지기의 비유는그렇다면 남은 삶에서 소유를 어떤 방향으로 운용해야 하는가라는 처방처럼 들립니다. 장재형목사 관점에서 교회가 진정으로 성숙해진다는 것은, 단지 규모가 커지는 것이 아니라 소유에 대한 태도가 복음적으로 정렬되는 것입니다. 가진 것이 많아질수록 더 낮아져야 한다는 역설, 더 풍성해질수록 더 나눌 수 있어야 한다는 자유, 그리고 그 나눔이 단순한 도덕적 선행이 아니라아버지의 집이 원래 그런 곳이라는 정체성의 발현이라는 깨달음이 필요합니다.


이때, 탕자의 비유를 시각적으로 한 번 더 붙잡아 주는 명화가 있습니다. 렘브란트의 17세기 작품돌아온 탕자는 이야기의 한 장면을 그림으로설명하기보다, 인간 내면의 결을 빛으로드러내는방식으로 전환해 놓습니다. 이 그림은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에르미타주 미술관 소장으로 알려져 있으며, 1660년대에 제작된 것으로 소개됩니다. 화면 중심에서 아들은 무릎으로 내려앉아 있고, 아버지는 그 등을 감싸 안습니다. 놀라운 것은, 그 포옹이 승리자의 과시가 아니라 상처 입은 이를 품는 조용한 중력처럼 보인다는 점입니다. 빛은 관객의 시선을 아버지의 손과 아들의 등을 향해 자연스럽게 이끕니다. 한쪽에 서 있는 형의 존재는, 단지나쁜 인물로만 정리되기 어렵게 묘사됩니다. 그는 어둠 속에서 빛을 바라보고, 잔치의 문 앞에서 기쁨의 논리를 판단하려 합니다. 렘브란트가 남긴 이 정지된 순간은, 장재형목사가 설교에서 강조하는 두 갈래의 회복돌아온 자의 회복과, 남아 있던 자의 회복이 동시에 필요하다는 사실을 감각적으로 일깨웁니다. 그리고 이 작품이 18세기 후반 예카테리나 2(캐서린 대제) 시기 소장 컬렉션으로 들어온 경위까지 전해지면서, 한 개인의 회개의 서사가 시대와 제국의 이동을 넘어 계속 회자되어 왔다는 사실 또한 상징적으로 다가옵니다. 탕자의 비유가 한 시대의 교훈담이 아니라 인간 역사 전반을 관통하는 복음의 언어라는 점을, 예술은 이런 방식으로 증언합니다.


결국 장재형목사가  우리를 설득하는 핵심은 단순합니다. 복음은돌아오라는 초대이며, 그 초대는 언제나이미 너를 향해 달려오는 아버지의 속도로 우리에게 도착해 있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은 늘 두 가지 방식으로 길을 잃습니다. 하나는 노골적인 방황이고, 다른 하나는 규범 속에 숨어 있는 냉소입니다. 하나는 먼 나라의 돼지우리에서, 다른 하나는 아버지 집 마당에서. 그러나 아버지는 둘 다를 향해 말합니다. “돌아오라.” 그리고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었다.” 이 두 문장이 하나로 겹쳐질 때, 교회의 언어는 공격성과 배제에서 멀어지고, 환대와 회복이라는 본래의 결로 돌아옵니다. 예수께서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신 장면이 당시 종교 엘리트들에게 불편했듯, 오늘도 복음은 우리 안의 공로주의를 불편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그 불편함은 파괴가 아니라 치유를 위한 수술에 가깝습니다. 잔치가 열리는 이유는, 누군가가 자격을 입증해서가 아니라 누군가가죽었다가 살아났기때문입니다. 잃었다가 얻은 생명 앞에서, 하나님은 계산이 아니라 기쁨으로 응답하십니다.


오늘의 현실은 결핍의 언어를 부추깁니다. 더 가져야 안전하다고 말하고, 더 이겨야 가치가 증명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다 보면 공동체는 쉽게의 전쟁으로 변합니다. 그러나 탕자의 비유가 제시하는 아버지의 경제학은 전혀 다릅니다. 아버지의 집은 잔치를 벌일 만큼 넉넉합니다. 문제는 자원의 총량이 아니라, 우리가 그 풍성을함께 있음으로 읽어내느냐, 아니면내 것으로 쪼개어 읽어내느냐입니다. 장재형목사가 반복해서 건드리는 지점도 여기에 있습니다. 교회가 정말 복음을 말하고 싶다면, 설교의 수사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돌아오는 이에게는 실제로 돌아올 공간을 제공해야 하고, 남아 있는 이에게는 실제로 기뻐할 이유를 회복시켜야 합니다. 누구든 탕자가 될 수 있고, 누구든 형이 될 수 있습니다. 복음의 성숙은나는 어느 쪽이냐를 가르는 데 있지 않고, 결국아버지의 마음을 배우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아버지의 마음은 죄를 가볍게 여기는 방임이 아니라, 죄를 이길 만큼 큰 사랑이며, 정의를 무너뜨리는 특혜가 아니라, 정의를 더 깊은 차원에서 완성하는 은혜입니다. 그러니 복음 앞에서 우리가 할 일은 한 가지입니다. 돌아온 이를 껴안는 잔치에 참여하는 것. 그리고 그 잔치가 남의 잔치가 아니라원래 내 집의 언어였음을 뒤늦게라도 깨닫는 것. 그 깨달음이 일어나는 곳마다, 교회는 다시아버지의 집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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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2026.01.27 20:56 수정 2026.01.27 2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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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