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크라테스가 상담실에 온다면 : 철학이 말하는 청소년 방황의 의미
청소년의 방황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그러나 오늘날 그 방황은 이전보다 복잡하다.
스마트폰, 경쟁, 불확실한 미래 속에서 10대들은 끊임없이 자신을 비교하고 잃는다.
상담실에 앉은 한 아이는 이렇게 말한다.
“저도 제가 왜 이렇게 화가 나는지 모르겠어요.”
심리학은 원인을 분석하고 처방을 제시한다.
하지만 철학은 묻는다. “그 화는 어디서 오는가? 그것은 너의 어떤 부분이 말하고 있는가?”
만약 소크라테스가 이 상담실에 들어온다면, 그는 아이의 문제를 고치려 하지 않고 질문으로 다시 생각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검토되지 않은 삶은 살 가치가 없다"고 말했다.
청소년기의 방황은 바로 ‘검토의 시기’이다.
이 시기에 아이들은 부모와 교사의 말이 더 이상 절대적이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들은 스스로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이런 감정을 느끼는가’를 묻기 시작한다.
이 질문은 철학의 출발점이자, 인간으로서 성숙의 첫 걸음이다.
그러나 사회는 이 방황을 불안정성, 문제행동, 집중력 결여로만 본다.
아이의 사유가 자라나는 순간을 병리적 현상으로 오해하는 것이다.
철학은 그 방황을 “생각이 자라나는 증거”로 본다.
즉, 방황은 미성숙이 아니라, 사유의 성장통이다.
소크라테스의 문답법(산파술)은 ‘정답’을 주는 방식이 아니라 ‘스스로 답을 낳게 하는 기술’이다.
오늘날의 상담 현장은 종종 ‘지도를 위한 대화’로 흘러간다.
그러나 진짜 변화는 ‘이해를 위한 대화’에서 시작된다.
한 청소년 상담사는 이렇게 말한다.
“상담의 목표는 아이를 고치는 게 아니라, 아이가 자기 언어로 자신을 이해하게 돕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철학적 대화의 본질이다.
소크라테스는 대화를 통해 상대방이 스스로 깨닫게 했고,
그 과정에서 ‘지식’이 아닌 ‘지혜’를 얻도록 했다.
청소년 상담에서도 이 방법은 유효하다.
아이들이 자신의 모순을 인식하고, 거기서부터 ‘내면의 소리를 듣는 법’을 배운다.
최근 국내 일부 상담소에서는 ‘철학상담’이 새로운 흐름으로 떠오르고 있다.
이 접근은 심리학적 해석 대신, 대화를 통해 존재의 의미를 탐구한다.
예를 들어 “나는 왜 공부를 해야 하나요?”라는 질문에 상담사는 이렇게 되묻는다.
“너에게 공부란 무엇이라고 생각하니?”
이 단순한 역질문이 아이의 사고를 확장시킨다.
이때 상담자는 해결사가 아니라 ‘동행자’가 된다.
아이 스스로가 자기 내면을 탐색하는 사유의 주체가 되는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말한 ‘산파술’이 바로 이 과정이다.
정답을 낳게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생각하게 돕는 것.
청소년기야말로 이 철학적 대화의 힘이 가장 크게 작용하는 시기이다.
교육은 오랫동안 ‘정답’을 중심으로 움직였다.
하지만 인간의 성장에는 정답보다 사유의 과정이 중요하다.
철학적 상담은 학교 교육에도 시사점을 던진다.
학생이 교사의 질문에 답하는 것이 아니라,
교사가 학생의 질문을 기다리는 수업.
그 속에서 배움은 지식의 축적이 아니라, 이해의 확장으로 바뀐다.
철학이 상담실과 교실에 함께 들어온다면,
아이들은 더 이상 ‘문제아’가 아닌 ‘사유하는 존재’로 인정받게 된다.
그 순간, 교육은 지식을 전달하는 행위에서 벗어나, 인간을 깨우는 철학적 여정이 된다.
소크라테스가 오늘의 상담실에 들어온다면,
그는 조용히 의자에 앉아 이렇게 물었을 것이다.
“너는 지금 네 인생의 주인인가?”
이 한마디의 질문이 아이의 내면을 흔든다.
방황은 잘못이 아니라 깨어나는 징후이다.
불안을 통해 자기를 찾고, 혼란을 통해 존재를 이해하며,
질문을 통해 인간은 성장한다.
청소년의 방황을 멈추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방황 속에서 생각하게 하는 교육,
그것이 바로 철학이 우리 시대의 상담실에 다시 들어와야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