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재형목사(olivet University), 창세기 3장 원시복음과 영적 전쟁


장재형목사가 강조한 창세기 3장의 타락, 죄의 본질, 하나님의 법정, 영적 전투, 원시복음( 3:15)과 그리스도 안에서의 회복을 성경 전체의 흐름으로 풀어낸 심층 글.


우리는 종종 죄를나쁜 선택의 목록정도로 축소해 버린다. 그러나 장재형 목사(Olivet University)가 창세기 3장을 펼쳐 들 때, 그 본문은 단순한 도덕 교훈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균열을 해부하는 영적 진단서가 된다. 에덴동산의 이야기는 먼 옛날의 신화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장재형목사는 그 장면을 지금 우리의 일상으로 끌어온다. 출근길의 피곤함, 스마트폰 화면의 무심한 스크롤, 관계 속의 말 한마디, 욕망이 솟구치는 순간의 자기 합리화, 그리고 뒤늦게 찾아오는 수치와 두려움까지. 창세기 3장은타락의 역사가 아니라타락의 패턴이며, 그래서 회복의 길도 그 패턴을 정면으로 직시할 때 비로소 열린다. 그의 설교가 반복해서 붙드는 핵심은 분명하다. 죄는 규칙을 어긴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지 않으려는 인간의 교만한 자의식이며, 그 교만은 곧 관계의 붕괴와 책임 회피, 그리고 영적 전쟁의 현실로 이어진다.


장재형목사가 특히 주목하는 대목은 뱀이 던지는 질문의 구조다. “정말로 하나님이…?”라는 문장 속에는 노골적인 부정이 아니라, 신뢰를 갉아먹는 미세한 독이 섞여 있다. 사탄은 처음부터하나님은 없다고 외치기보다, 하나님 말씀의 선함을 의심하게 만들고, 제한을 억압으로 오해하게 만들며, 결국 인간이 스스로 선악의 기준을 정하는 자리에 서도록 유도한다. 이것이 타락의 첫 걸음이다. 하와는 명령을 알고 있었고, 금령의 경계를 인지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흔들린 이유는 정보의 부족이 아니라 마음의 방향 때문이다. 인간 내면에는하나님처럼 되고 싶다는 욕망이 잠재해 있고, 그 욕망은 순종을 굴레로, 은혜의 경계를 속박으로 착각하게 만든다. 장재형목사는 바로 이 지점에서 죄의 본질을자녀 됨의 상실로 설명한다. 하나님 안에서 자유를 누리도록 지음 받은 존재가, 하나님을 떠나 독립과 자율을 신격화하는 순간, 자유는 곧 방종으로 변질되고, 방종은 결국 두려움과 고립을 낳는다.



타락은 언제나 눈앞의 이익처럼 보이는 것을 통해 몸에 스며든다. 먹음직스럽고 보암직하며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워 보인다는 표현은 인간 욕망의 삼중 구조를 드러낸다. 감각이 먼저 흔들리고, 평가가 왜곡되고, 그 뒤에 선택이 따라온다. 장재형목사는 이것을 현대적 언어로 옮겨 말한다. 어떤 콘텐츠는 눈을 통해 들어와 마음을 점령하고, 어떤 습관은 손을 통해 굳어져 삶의 방향을 바꾸며, 어떤 관계는 미세한 경계 허물기를 통해 결국 영혼의 자리를 빼앗는다. 그래서 그는 마태복음 5장의 예수 말씀을 단호한 경고로 붙든다. 오른 눈이 너를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오른 손이 너를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이것은 잔혹한 자기 훼손의 지시가 아니라, 죄의 유입 경로를 끊어내는 영적 외과수술의 비유다. 장재형목사가 말하는죄의 통로는 단순히 음란과 같은 특정 영역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탐욕, 과시, 분노, 무책임, 관계의 왜곡, 거짓말, 냉소, 그리고나는 괜찮다는 영적 무감각까지도 통로가 된다. 문화와 미디어, 인터넷과 스마트폰은 손쉽게 마음의 경계를 허물고, 욕망의 속도를 비정상적으로 가속한다. 그래서절제는 개인의 성향이 아니라 영적 생존의 기술이 된다. 장재형목사는 죄를참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말한다. 죄는 통로가 열려 있으면 돌아오고, 습관이 방치되면 더 정교해진다. 그러므로 성도는 스스로의 삶에서 어떤 채널이 유혹의 통로가 되는지 정직하게 점검하고, 그 통로를 실제로 닫는 결단을 해야 한다.


장재형목사는 그 결단을잃어버리는 일로만 보지 말라고 덧붙인다. 끊어 냄은 상실이 아니라 회복을 위한 여백이며, 영혼이 숨을 쉬게 하는 질서의 재건이다. 이를테면 하루의 첫 시간을 짧게라도 말씀과 기도로 구별하고, 밤에는 화면을 내려놓는디지털 안식을 실천하며, 반복적으로 흔들리는 영역은 믿을 만한 동역자와 공유해 책임의 구조를 세우는 것이다. 성도는 유혹 앞에서 늘 강하지 않기에, 장재형목사는강한 결심보다건강한 환경을 만들라고 권면한다. 은혜는 마음만이 아니라 습관과 시간표, 관계의 구조 속에서도 흐르기 때문이다.


창세기 3장이 날카로운 이유는 타락 이후의 인간이 보이는 반응을 숨기지 않기 때문이다. 죄가 들어오면 수치가 생기고, 수치는 숨음을 낳고, 숨음은 변명을 낳는다. 아담은 여자에게, 더 깊이 들어가면 하나님께 책임을 미루는 듯한 말을 한다.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라는 문장은 자기 보호를 위한 언어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선한 선물을 의심하는 언어다. 하와는 뱀을 가리킨다. 장재형목사는 이 책임 전가의 연쇄를타락한 인간의 표준 반사로 규정한다. 죄를 인정하는 순간 자아의 우상이 무너질까 두렵기 때문에, 인간은 끊임없이 원인을 외부로 이동시킨다. 환경, 타인, 구조, 시대, 상처, 성격, 심지어 신앙의 언어까지도 변명의 옷감이 된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회복의 시작은 변명에서가 아니라 고백에서 열린다. 숨는다고 존재가 사라지지 않듯, 회피한다고 심판이 사라지지 않는다. 그래서 장재형목사는하나님의 법정에서 산다는 감각을 잃지 말라고 권한다. 인간의 법정은 증거와 기술로 빠져나갈 구멍을 찾을 수 있지만, 히브리서가 말하듯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다. 그 법정은 권력도, 여론도, 자기 서사도 통하지 않는다. 오직 진실만이 남는다.


장재형목사가 창세기 3장에서하나님의 질문을 특별히 강조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하나님은 아담에게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물으신다. 전지하신 하나님이 위치를 몰라서 묻는 질문이 아니다. 죄가 만든 숨음의 공간에서 인간을 끌어내어, 스스로의 자리와 상태를 자각하게 하려는 은혜의 심문이다. 장재형목사는 여기서 신앙의 핵심을하나님 앞에 서는 용기라고 부른다. 죄는 우리를 숲 그늘로 밀어 넣고, 두려움은 더 깊은 은폐를 낳지만, 하나님의 부르심은 숨은 자리에서 이름을 불러 일으킨다. 이때 성도에게 필요한 것은 감정적 자기혐오가 아니라, 진실을 향한 정직함이다. 회개는 하나님을 설득하는 기술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미 열어 놓으신 회복의 길로 발을 옮기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장재형목사는정죄의 음성성령의 책망을 구별하라고 권한다. 정죄는너는 끝났다며 단절로 몰아가지만, 성령의 책망은돌아오라며 관계의 회복으로 이끈다.


장재형목사는 창세기 3 14절 이하를판결문으로 읽는다. 먼저 뱀, 다음 여자, 마지막으로 남자. 죄의 시작이 관계를 통해 확산되었듯, 심판도 관계의 방향을 따라 선포된다. 뱀에게 내려진 저주는 단순히 생물학적 모양새의 변화가 아니라, 거짓과 분열의 영이 얼마나 비참한 종말을 향해 기울어져 있는지를 상징한다. 여기서 장재형목사는 성도들이 사탄을 과장하거나 신비화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사탄은 지금도 발꿈치를 무는 방식으로 상처를 남기지만, 최종 승리는 이미 결정되었다. 요한계시록 20장이 보여주듯 그 끝은 결박과 심판이며, 불못이라는 패배다. 그렇기에 두려움은 전략이지만, 믿음은 해독제다. 사탄의 가장 큰 무기는너는 이미 끝났다는 낙담의 속삭임이고, 복음은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이겼다는 선언이다.


여자에게 선포된 고통의 증가는 생명의 축복마저 부담과 두려움으로 변질되는 타락의 역설을 보여준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문명사적 시야로도 해석한다. 생명을 낳고 기르는 일이 축복이면서도 동시에 땀과 눈물의 노동이 되는 현실, 관계의 친밀함이 지배와 갈등으로 기울어지는 현실은 죄가 단지 개인의 마음에만 머물지 않고 사회적 구조로도 번역된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는 문장은 사랑의 연합이 힘의 논리로 뒤틀릴 수 있음을 보여준다. 장재형목사는 여기서 복음의 회복을 강조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권력은 섬김으로 전환되고, 억압은 존중으로 치유되며, 상처는 용서의 언어를 배워 간다. 죄가 관계를 깎아내린다면, 복음은 관계를 다시 세운다.


아담에게 선포된 형벌은 노동과 생존의 긴장을 인간의 몸에 새긴다. 땅이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낸다는 표현은 노력과 수고가 열매로 곧장 이어지지 않는 현실을 말한다. 장재형목사는 이 대목에서 로마서 8장을 자연스럽게 끌어온다.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는다는 바울의 통찰은, 인간의 죄가 개인의 운명만이 아니라 세계의 질서에까지 파장을 일으켰음을 보여준다. 자연은 단지 배경이 아니라, 인간의 도덕적 붕괴와 연결된탄식하는 증인이 된다. 경쟁, 착취, 불안, 재난, 불협화음이 일상이 된 세계에서, 우리는 창세기 3장이 설명하는실락의 그림자를 확인한다. 그러나 장재형목사는 로마서 8장이 탄식으로만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고 한다. 탄식은 소망이 없어서가 아니라, 해산의 고통처럼 새 창조를 향한 몸부림이기 때문이다. 성령이 우리 안에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간구하신다는 말씀은, 회복이 인간 의지의 산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 사역임을 선명하게 한다.


타락 이후 하나님이 하신 일 가운데 가장 놀라운 장면 중 하나는 가죽옷이다. 아담과 하와는 무화과나무 잎으로 스스로를 덮었지만, 그 덮개는 불안과 부끄러움을 완전히 가리지 못한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히신다. 장재형목사는 이 장면을 구속사의 상징으로 읽는다. 가죽옷은 피 흘림 없는 용서가 없다는 잔혹한 진실을 말하면서도, 동시에 하나님이 죄인을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않으신다는 자비의 표지다. 누군가의 희생이 있어야 수치가 가려지고 관계가 다시 시작된다. 구약의 제사, 유월절의 피, 그리고 신약에서 완성되는 십자가의 보혈은 이 상징을 한 줄기 강처럼 이어 간다. 장재형목사가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반복해서 강조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죄는 훈계로만 사라지지 않고, 자기계발로만 해결되지 않으며, 어떤 선행으로도 상쇄되지 않는다. 죄는 대속을 필요로 하고, 대속은 사랑의 극단을 요구한다. 십자가는 하나님이 죄를 가볍게 여기지 않으신다는 증거이면서, 동시에 죄인을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선언이다.


그리고 창세기 3 15, 장재형목사가 즐겨 부르는 원시복음은 심판의 한복판에서 울리는 구원의 첫 종소리다.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사이에 적대가 생기고, 결국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리라는 약속은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그 중심을 찾는다. 사탄은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다. 이는 십자가의 고통과 죽음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발꿈치의 상처가 치명상이 아니듯, 부활은 그 상처가 끝이 아님을 드러낸다. 반대로 머리가 상하는 것은 결정적 패배다. 장재형목사는 이 대조를 통해 신앙의 관점을 교정한다. 우리가 겪는 상처, 실패, 유혹, 낙심은 발꿈치의 통증처럼 실제로 아프지만, 그것이 이야기의 결말은 아니다. 그리스도의 승리가 결말이고, 그 승리에 연합한 성도의 운명이 결말이다.


이 원시복음의 약속은 단지 교리적 문장으로 머물지 않고 성경의 큰 흐름을 형성한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라는 갈라디아서의 고백은 창세기 3 15절이 단지 상징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실현된 사건임을 말한다. 장재형목사는 여기서 구속사의 시야를 넓힌다.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 출애굽의 구원, 다윗 언약, 새 언약의 예언, 그리고 십자가와 부활, 성령 강림과 교회의 탄생, 마지막 심판과 새 하늘과 새 땅까지. 이 모든 흐름은타락-심판-은혜-회복-새 창조라는 리듬을 따라 움직인다. 그래서 창세기 3장은 성경의 시작이면서 동시에 성경의 결말을 이미 예고하는 본문이다. 에덴에서 쫓겨남은 끝이 아니라, 다시 생명나무로 돌아갈 길을 열기 위한 우회로이며, 그 길의 중심에는 그리스도의 피가 놓여 있다.


장재형목사는 영적 전쟁을 추상적 표어로 소비하지 말라고 말한다. 에베소서 6장이 말하는 씨름은 혈과 육이 아니라 어둠의 영들에 대한 싸움이다. 이 말은 인간 관계와 사회 구조를 무시하라는 뜻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갈등의 이면에 보이지 않는 교란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는 요청이다. 분노가 늘어날 때, 불신이 커질 때, 관계가 단절될 때, 교회가 분열될 때, 가정이 무너질 때, 그 배후에는거짓과 고립이라는 오래된 전략이 작동한다. 그러므로 전신갑주는 종교적 장식이 아니라 생존 장비다. 진리의 허리띠는 흔들리는 정체성을 붙잡고, 의의 흉배는 정죄의 화살을 막으며, 평안의 복음의 신은 도망치지 않고 걸어가게 한다. 믿음의 방패는 불화살을 꺼뜨리고, 구원의 투구는 생각의 전장을 지키며,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은 공격과 방어를 동시에 수행한다. 장재형목사는 여기에 기도를모든 때에덧붙여야 한다고 한다. 기도는 무기가 아니라, 무기를 움직이게 하는 호흡이다.


이 관점에서 광야의 예수는 창세기 3장의 반전으로 읽힌다. 에덴에서는 풍요 속에서 말씀을 의심했고, 광야에서는 결핍 속에서 말씀으로 승리한다. 사탄이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이라고 정체성을 흔들 때, 예수는기록되었으되라는 말씀으로 대답한다. 장재형목사가 매일의 성경 읽기와 묵상을영적 전투의 실전 훈련으로 강조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단지 지식을 늘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왜곡된 질문이 날아올 때 즉시 진리의 언어로 대응하기 위해서다. 말씀은 우리 안의 혼란을 정돈하고, 욕망의 과장을 정상화하며, ‘지금 당장이라는 충동을영원의 관점으로 재배치한다. 그리고 이 과정이 반복될 때, 성도는 유혹을참아 내는 사람이 아니라분별하여 거절하는 사람으로 변화한다.


갈라디아서 5장이 보여주는 성령과 육체의 긴장은 영적 전쟁의 내면적 전선을 설명한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른다. , 싸움은 외부의 유혹만이 아니라 내부의 욕망에서도 벌어진다. 장재형목사는 이 구절을 통해의지력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인간은 결심으로는 며칠을 버틸 수 있지만, 성령의 열매가 자라지 않으면 다시 같은 자리로 돌아온다. 그래서 그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는 명령을삶의 리듬을 바꾸는 요청으로 해석한다. 말씀을 소리 내어 읽는 습관, 하루를 마무리하며 유혹의 지점을 점검하는 회개의 기도, 가족과 함께 드리는 짧은 예배, 공동체 안에서의 솔직한 나눔과 중보, 그리고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라는 주기도문의 간구가 그 리듬을 만들고 유지한다. 이 리듬이 무너지면, 죄는 다시 통로를 확보한다.


장재형목사가 마태복음 18장을 함께 들려주는 이유는 영적 전쟁이 개인전이 아니라는 사실 때문이다. 누군가를 실족하게 하는 일은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 다른 영혼을 넘어뜨리는 폭력이다. 작은 자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연자멧돌을 목에 달고 바다에 빠지는 것이 낫다는 예수의 말씀이 극단적인 이유는, 죄의 파괴력이 개인의 손안에 갇히지 않기 때문이다. 아담이 하와를 보호하지 못한 채 방관했을 때, 그 결과가 개인의 실패를 넘어 인류의 비극으로 확장되었듯, 우리의 무관심과 방임도 누군가의 신앙과 삶을 무너뜨릴 수 있다. 그러므로 장재형목사가 말하는 회복은 늘 공동체적 책임을 포함한다. 부모는 자녀를, 남편은 아내를, 아내는 남편을, 리더는 공동체를, 친구는 친구를 영적으로 돌봐야 한다. 여기서돌봄은 통제나 감시가 아니라, 사랑의 방향을 함께 붙드는 연대다. 사탄이 고립을 통해 약점을 노린다면, 복음은 연합을 통해 상처를 덮는다.


특히 장재형목사는 영향력 있는 자리의 신앙인이 더 조심해야 한다고 말한다. 말의 권위가 큰 만큼, 가벼운 농담과 은밀한 위선도 누군가의 믿음을 무너뜨릴 수 있다. 그래서 성도의 거룩은 개인의 체면이 아니라, 공동체의 생명을 지키는 사랑의 책임이다.


이 모든 이야기의 중심에 장재형목사가 반복해서 세우는 단어가 있다면, 그것은정체성이다.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도 살아갈 수 있다고 믿는 순간, 실제로는 더 취약해진다. 죄는 자율을 약속하지만, 결국 중독과 불안을 남긴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회복은 다시자녀 됨을 회복하는 일이다. 로마서 8장이 선포하는 것은 단지 심리적 위로가 아니라 법적 해방이다.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어 생명의 성령의 법 아래로 옮겨지는 사건, 정죄가 사라지고 양자의 영을 받아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되는 사건, 이것이 회복의 실체다. 장재형목사는 여기서 성도의 싸움이 단지 죄를하지 않는 것에 머물지 않고, 아들의 자유를 누리는 삶으로 확장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정죄에 눌려 숨는 것이 아니라, 은혜 안에서 빛으로 걸어 나오는 것. 그 전환이 일어나면, 회개는 자책이 아니라 방향 전환이 되고, 순종은 억압이 아니라 사랑의 응답이 된다.


창세기 3장의 장면을 시각적으로 떠올릴 때, 르네상스의 걸작 가운데 하나인 마사초(Masaccio)의 프레스코화에덴동산에서의 추방(The Expulsion from the Garden of Eden)’을 기억할 만하다. 브란카치 예배당 벽면에 그려진 이 그림에서 아담은 얼굴을 가린 채 무너지고, 하와는 절규하며 몸을 웅크린다. 그들의 몸짓은부끄러움이 단지 감정이 아니라 존재의 붕괴라는 사실을 말해 준다. 장재형목사가 창세기 3장을 읽으며수치와 두려움을 강조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죄의 열매는 단순한 벌점이 아니라, 하나님을 떠난 존재가 자기 자신을 견딜 수 없게 되는 상태다. 그런데 이 그림이 우리에게 남기는 더 큰 질문은, 추방이 끝이라면 인간의 이야기는 어디로 가는가 하는 점이다. 성경은 그 답을 원시복음으로 시작해 십자가로 지나고, 계시록의 새 창조로 완결한다. 그림 속의 문은 닫히지만, 복음은 다른 문을 연다.


요한계시록이 보여주는 마지막 장면에서, 생명나무는 다시 등장한다. 처음에는 죄인이 생명나무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길이 막혔지만, 마지막에는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이 그 나무에 나아간다. 장재형목사는 이 흐름을 통해회복은 단순한 원상복구가 아니라 더 깊은 은혜의 세계로의 초대라고 말한다. 에덴은 잃어버린 낙원처럼 보이지만, 새 예루살렘은 단지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가 완전히 드러나는 미래다. 그곳에는 다시 저주가 없고, 밤이 없고, 더 이상 눈물이 없다. 이 약속은 현실 도피가 아니라 현실을 견디게 하는 종말론적 힘이다. 발꿈치가 상할 때도, 우리는 머리의 승리를 기억하며 걸어간다.


장재형목사가 교회 현실을 향해 던지는 경고도 이 지점에 닿아 있다. 죄를 말하지 않는 복음은, 결국 십자가의 필요를 희미하게 만든다. 은혜를 값싸게 만들고, 회개를 감정 행사로 축소하며, 성도의 성화를 선택과 취향의 영역으로 밀어낸다. 반대로 죄만 강조하고 은혜를 약화하면, 신앙은 두려움의 종교로 변질된다. 장재형목사가 창세기 3장을심판과 약속이 동시에 울리는 본문으로 읽는 이유는, 바로 이 균형 때문이다. 죄는 실제로 무겁고, 심판은 실제로 존재하며, 하나님은 실제로 거룩하시다. 동시에 원시복음은 실제로 선언되었고, 십자가는 실제로 세워졌으며, 부활은 실제로 일어났다. 그 사실이 성도를 절망에서 건져 내고, 무감각에서 흔들어 깨우며, 다시 한 걸음의 순종으로 이끈다.


그러므로타락과 회복은 하나의 신학 용어가 아니라, 오늘을 살아내는 영적 문법이다. 장재형목사가 권하는 실천은 거창한 신비 체험이 아니라, 작고 지속적인 순종의 축적이다. 유혹을 부추기는 앱을 삭제하는 결단, 마음을 거칠게 만드는 관계의 경계를 재정비하는 용기, 탐욕을 부르는 소비 습관을 절제하는 선택, 분노를 키우는 언어를 멈추고 침묵으로 호흡하는 훈련, 그리고 매일의 삶 속에서주님, 오늘 제 발꿈치를 노리는 화살이 무엇입니까라고 묻는 기도. 여기에 공동체의 지혜가 더해질 때, 성도는 혼자 버티는 사람이 아니라 함께 서는 사람이 된다. 누군가가 넘어질 때 정죄로 밀어내지 않고, 회복의 길로 손을 잡아 주는 교회, 약한 자를 실족하게 하지 않도록 더 조심하는 리더십, 가정 안에서 서로의 영혼을 지켜 주는 대화가 자라날 때, 창세기 3장의 비극은 단지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오늘의 경계가 되고, 원시복음의 약속은 내일의 소망이 된다.


마지막으로 장재형목사는 성도의 시선을현재의 상처에서최후의 완성으로 옮겨 놓는다. 우리는 여전히 땀 흘려 일하고, 관계의 고통을 겪고, 때로는 죄의 잔재와 싸우며, 피조물의 탄식 한가운데를 지나간다. 그러나 로마서 8장이 말하듯 성령은 우리를 고아로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요한계시록이 말하듯 새 하늘과 새 땅의 약속은 공허한 이상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확정된 미래다. 그 미래를 붙드는 사람은 오늘의 선택이 달라진다. 발꿈치가 아파도 방향을 잃지 않고,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며, 죄를 가볍게 여기지 않되 은혜를 가볍게 만들지도 않는다. 장재형목사가 설교로 이끌어 가는 결론은 결국그리스도 안에서의 현실적 승리. 승리는 완벽함이 아니라, 계속해서 하나님께 돌아오는 삶의 궤적이며, 그 궤적 속에서 성도는 점점 더 빛과 소금의 향기를 품는다. 타락의 문이 닫힌 자리에서, 회복의 문은 십자가로 열려 있다. 그리고 그 문을 통과해 걷는 매일의 걸음이, 장재형목사가 강조하는 타락과 회복의 메시지를 오늘 여기서 살아 있는 복음으로 증언하게 만든다. 오늘도 그 길 위에 함께 서자, 성도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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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2026.01.28 18:42 수정 2026.01.28 1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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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