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공공정책신문=최진실 기자]
"간단하게 메신저나 전화로 할 수 있는 일도 굳이 종이로 보고서를 만들어 보고합니다. 국민이 준 노트북과 전기, 종이를 써가며 왜 그래야 합니까?"
최근 공직 내부에서 터져 나온 이 '고백'은 대한민국 공직사회가 직면한 부끄러운 자화상을 그대로 보여준다. 생성형 AI가 인간의 업무를 대신하고 초연결 사회가 도래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공무원 조직은 여전히 80년대식 '형식주의'와 '보여주기식 행정'이라는 늪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다는 비판이 거세다.
■ "보고를 위한 보고, 행사를 위한 행사"... 골병드는 공직사회
공직사회의 가장 큰 고질병은 단연 '형식 중심의 보고 문화'다. 본질적인 정책 기획보다 '폰트 크기'와 '표 테두리'에 더 공을 들이는 보고서 작성 관행은 행정력 낭비의 주범으로 꼽힌다. 현장의 한 공무원은 "윗분들에게 보고하기 위해 밤새워 만든 종이 뭉치가 단 몇 분 만에 쓰레기통으로 향하는 일이 허다하다"며 자괴감을 토로했다.
여기에 '보여주기식 행사'가 기름을 붓는다. 정책의 성과보다는 장·차관의 참석 여부와 기념사진 한 장에 목숨을 거는 전시 행정은 예산 낭비는 물론, 실무자들의 업무 집중도를 심각하게 저해하고 있다. 국가의 미래를 설계해야 할 엘리트 공무원들이 행사 의전과 좌석 배치에 에너지를 쏟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이다.
■ AI 시대의 정답은 'Agile'과 'No-Paper'
전문가들은 이제 공직사회도 '애자일(Agile·민첩한)' 기반의 업무 체계로 완전히 전환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가장 시급한 것은 '노 페이퍼(No-Paper) 원칙'의 전면 도입이다. 대면 보고를 위한 종이 출력물을 금지하고, 클라우드와 태블릿을 활용한 실시간 공유 체계를 확립해야 한다.
특히 텔레그램이나 협업 툴을 통한 '번개 보고'와 비대면 승인을 활성화하여 의사결정 속도를 비약적으로 높여야 한다. AI가 데이터를 분석하고 초안을 잡는 시대에, 인간 공무원은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그 데이터를 해석하여 '결정'하는 본연의 역할에 집중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 "새 일 하려면 낡은 일 버려야"... '업무 일몰제' 도입론 부상
구조적 개선을 위한 또 다른 핵심 키워드는 '워크 다이어트(Work Diet)'다. 해마다 새로운 정책 과제는 쏟아지는데 정작 실효성이 다한 낡은 업무는 그대로 유지되는 '적체 현상'이 심각하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업무 일몰제(Sunset Clause)'가 주목받고 있다. 매년 저효율 업무를 전수 조사해 하위 20%를 강제로 폐지하고, 새로운 업무를 시작할 때 반드시 기존 업무 하나를 줄이는 'One-in, One-out' 원칙을 적용하자는 것이다. 이는 공무원들이 관성에서 벗어나 창의적이고 전략적인 기획에 전념할 수 있는 '시간'을 벌어주는 유일한 길이다.
■ "결국은 리더십의 문제"... 평가 지표부터 바꿔야
혁신의 완성은 결국 '평가'에 있다. 보고서 작성 건수나 행사 개최 횟수 같은 정량적 지표는 과감히 버려야 한다. 대신 실질적인 정책 개선도와 국민의 체감 만족도를 성과 지표(KPI)의 핵심으로 설정해야 한다.
30년간 공직사회를 지켜본 한 원로 기자는 "혁신은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결단"이라며 "장·차관 등 수뇌부부터 종이 보고서 대신 태블릿을 들고, 화려한 행사보다 실무진과의 격식 없는 소통을 즐길 때 비로소 공직사회의 체질 개선이 시작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AI 시대, '형식'이라는 낡은 옷을 벗고 '실질'이라는 새 옷으로 갈아입지 못하는 조직에게 미래는 없다. 이제 공직사회가 국민 앞에 '종이'가 아닌 '성과'로 답해야 할 때다.
이정찬
· (전)서울시의회 의원, 서울시의회독도특위위원장
·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상임위원
· 서울남부지방법원조정위원
· 서울대 인문정보연구소 AI 전문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