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듣지 않는 시대, 김정희 작가가 건넨 조용한 외침 『귀가 닫힌 나라』
“우리는 서로의 말을 듣고 있을까, 아니면 단지 말의 틈새를 기다리고 있을 뿐일까?”
『귀가 닫힌 나라』(김정희 저, 두온교육, 2025)는 이 질문에서 출발한다. 이 책은 겉으로는 동화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실상은 ‘소통 부재의 시대’를 정면으로 응시하는 철학적 작품이다.
김정희 작가는 오랫동안 어린이와 청소년을 대상으로 독서·논술 교육을 해온 교육자다. 그러나 이번 작품에서 그는 교육의 영역을 넘어, 인간의 근원적 문제인 ‘듣기’와 ‘이해’를 탐구하는 작가로서의 목소리를 들려준다.
이 책의 세계는 기묘하다. 사람들은 모두 ‘귀가 닫힌’ 상태로 살아간다. 누군가가 말을 해도 그 말은 공기 중에 흩어질 뿐, 상대에게 닿지 않는다. 겉으로는 평화롭고 일상적인 사회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 안에는 깊은 고립과 단절의 그림자가 깔려 있다.
이 세계는 마치 현대 사회의 축소판처럼 느껴진다. 소셜미디어의 타임라인은 활발하지만, 진심이 오가는 대화는 사라진 시대. 『귀가 닫힌 나라』는 그 ‘조용한 비극’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귀가 닫힌 나라』는 언뜻 보면 단순한 동화처럼 읽힌다. 그러나 문장 사이에는 철학적 긴장감이 도사리고 있다.
작가는 “듣는다는 것은 단순히 정보를 받아들이는 행위가 아니라, 존재를 인정하는 행위”라고 말한다. 이는 이 책의 핵심이자, 우리 시대가 잃어버린 인간성의 본질을 일깨운다.
책 속 인물들은 서로에게 끊임없이 말을 건넨다. 그러나 상대는 듣지 않는다. 결국 모든 말은 자기 자신에게 되돌아온다. 작가는 이 반복적인 구조를 통해 ‘소통의 불능’을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독자는 깨닫게 된다.
“듣지 못하는 사회에서, 말은 점점 무의미해진다.”
이 작품의 서사는 느리지만 단단하다. 김정희의 문장은 군더더기가 없다. 짧은 문장 속에서도 감정의 결이 선명히 드러난다. 문체는 절제되어 있지만, 그 절제 속에서 인간의 고독이 진하게 배어 있다.
동화적인 상징 — 닫힌 귀, 잿빛 하늘, 말이 닿지 않는 거리 — 은 모두 현실의 은유로 기능한다. 독자는 그 상징을 해독하는 과정에서 “나는 얼마나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가?”라는 질문과 마주한다.
그러나 『귀가 닫힌 나라』가 절망으로 끝나지는 않는다.
책 후반부에서 등장하는 한 인물은 우연히 ‘다른 사람의 마음속 소리’를 듣게 된다. 그는 혼란스러워하지만, 그 경험을 통해 세상이 완전히 달라 보이기 시작한다. 처음으로 타인의 고통이 들리고, 그 고통에 반응하게 된다.
이 변화는 단순한 ‘기적’이 아니라, 듣는 용기를 회복한 인간의 성장 서사다.
김정희는 이를 통해 “진정한 변화는 소리를 내는 것이 아니라, 듣는 데서 시작된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이 대목은 심리학적 관점에서도 깊은 의미를 지닌다. 현대 사회의 많은 갈등은, 서로의 말을 ‘이해받지 못한 경험’에서 비롯된다.
작가는 그 갈등의 근원을 꿰뚫는다. 그리고 ‘듣기’라는 단순한 행위를 통해, 인간관계의 치유 가능성을 제시한다.
책의 마지막 문장은 짧지만 강렬하다.
“그녀는 이제 귀가 아닌 마음으로 듣기 시작했다.”
이 한 문장은 책 전체의 주제를 응축한다. 그리고 그 순간, 『귀가 닫힌 나라』는 단순한 동화를 넘어, 철학적 명상서가 된다.
김정희 작가의 글쓰기에는 오랜 교육자의 시선이 녹아 있다.
그는 독자에게 교훈을 주입하지 않는다. 대신, 독자가 스스로 질문하게 만든다.
이는 기존의 아동문학이나 교훈적 동화와는 다른 접근이다.
작가는 ‘듣기’라는 주제를 단순히 도덕적 행위가 아니라, 존재론적 문제로 확장한다.
즉, “듣는다는 것은 타인을 통해 나 자신을 인식하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접근은 마르틴 부버의 관계 철학과도 닮아 있다. “나는 너를 통해 나를 안다(I-Thou)”는 부버의 사상을 문학적으로 재해석한 셈이다.
또한 김정희의 서사에는 시각적 이미지가 풍부하다. 닫힌 창문, 들리지 않는 종소리, 입모양만 남은 대화 — 이러한 장면들은 독자의 감각을 자극하며, ‘보이지 않는 소리’의 세계를 시각적으로 체험하게 한다.
이러한 문학적 실험은, 동화적 장르를 빌려 인간 내면의 철학을 탐구하는 방식으로 발전한다.
결국 『귀가 닫힌 나라』는 단순한 이야기책이 아니라, ‘경청의 미학’을 시각화한 예술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귀가 닫힌 나라』는 거대한 메시지를 외치지 않는다. 오히려 작가는 조용히 속삭인다. “이제 그만 말하고, 들어보자.”
이 작품의 진정한 힘은 그 ‘조용함’에 있다.
요란한 슬로건이나 거창한 해답 대신, 그는 독자 스스로의 내면을 들여다보게 만든다.
오늘날 우리는 ‘듣지 못하는 사회’ 속에서 살아간다. 상대의 말보다 자신의 입장을 더 빠르게 내세우고, 이해하기보다는 반박하기에 익숙하다.
그런 시대에 김정희의 『귀가 닫힌 나라』는 가장 느리고, 가장 따뜻한 혁명을 제안한다.
이 책은 묻는다.
“당신은 마지막으로 누군가의 이야기를 진심으로 들은 적이 있나요?”
이 질문은 단순한 문학적 장치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 모두에게 던져진 시대의 숙제이자,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한 최소한의 예의다.
『귀가 닫힌 나라』는 소리 없는 울림으로 말한다.
“듣는다는 것은, 사랑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