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仁祖反正은 망국의 광란이었다
당신은 왕이 되어선 안 될 위인입니다. 어떻게 임진왜란이란 치욕사를 겪어 모든 백성이 고통스러운데 권력의 사욕에 눈이 멀어 인조반정을 일으켰습니까? 국제정세에 현명하지 못한 근시안으로 전쟁의 폐허에서 나라를 되살리려는 광해의 큰 뜻을 반정으로 뒤엎어 불행한 병자호란을 불러온 망나니짓은 역사가 두고두고 평설할 것입니다.
은평구 구산동 예일여자고등학교 앞에 조선 16대 인조왕 별서 유기비가 있다. 그가 능양군 시절에 머물렀던 아버지 별서 터에 1695년 증손자 숙종이 증조부의 업적을 기려 엉뚱하게 세운 비석이다. 서울시 유형문화재 보물 제1462호 지정되어 있다. 별서는 없어지고 유기비만 남았는데 증손자 숙종은 왜 인조의 유기비를 세웠을까? 아무래도 이해가 안 간다.
역사는 후대의 평가로 그 정의를 음미할 수 있다. 함량 부족의 어리석은 왕이 모자란 참모들과 국정을 운영한 결과 가장 비참한 국가를 만들었다는 사실은 역사를 바르게 보는 사람은 다 알고 있다. 인조는 무능한 두뇌로 권력욕에 불타 명목 없는 어리석은 반정을 일으켜 병자호란을 자청하고 말았다. 야욕을 채우려고 반정을 일으켜 정권을 잡았으나 국제정세를 파악 못 해 병자호란을 자청하였다. 능력도 명분도 없는 반정으로 신하들에게 휘둘려 나라를 망친 어리석은 임금이었다.
光海를 폭군으로 몰아죽였다.
능양군은 권력의 환상을 그리며 광해군의 폭정을 빌미로 반정을 일으켰다. 광해는 외로운 왕이었다. 급변하는 국제정세를 파악하여 친화 정책을 펴려 했으나 친명배청 사상의 골통들이 국정을 휘둘리며 수시로 왕권을 찬탈하려는 왕족들의 협잡 때문에 입지가 곤궁에 처했다. 이에 분개한 광해는 왕위를 위협하는 왕족들에게 위해를 가한다. 계축옥사를 단행하여 인목대비를 유폐시키고 임해군, 영창대군을 처형하는 강경노선으로 친화 정책의 개혁을 시도하였다.
광해의 정책에 반기를 든 골수 서인들이 능양군을 부축하여 반정을 시도하였다. 능양군은 아버지 별서에 김류, 이귀, 이서, 김자점, 이괄을 불러들여 반정을 모의한다. 마침내 반정이 성공하여 광해를 추출하고 왕으로 옹립된다. 친명배청자들에 의해서 임진왜란의 고통을 자각 못 한 우를 범하고 말았다. 광해를 폭군이라고 몰아낸 인조는 국정을 개판으로 만들어 조선이란 국가를 임진왜란 전국으로 퇴보시켰다.
반정의 시작과 결론은 자명하다. 은평구 연서역의 아버지 별서로 장단부사 이귀. 이천부사 이중로, 김류, 김자점, 이괄에게 그들이 사병을 불러드린다. 2,000여 명의 사병이 집결하였다. 원두표를 반정군 훈련대장으로 삼고 북한산 자락 독바위에서 군사 훈련을 시켰다.
반정은 연서역 독바위에서 시작하여 홍제원, 창의문을 부수고 창덕궁을 정복하여 광해를 잡고 경복궁을 접수하고 정권을 찬탈하였다.
공신 책정에 불만을 품고 이괄이 난을 일으키다
인조반정이 1년을 채 넘기지도 않은 채 이괄의 난을 맞았다. 이괄은 반정의 주체인데 2등 공신으로 책봉한 데 불만을 표했다. 그런데 인조는 장만을 도원수, 이괄을 부원수로 한 북방방어사(영변)로 발령을 내린다. 이괄은 후금의 침략에 대비하여 강한 군사 훈련과 성책 보수, 경비 강화에 충실하며 강력한 군대를 훈련시켜 정변을 준비하였다.
이괄 뿐만 아니라 변방으로 쫓겨난 한명련· 정충신· 기자헌· 현집· 이시언이 공신채겅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모의했으나 발각되어 조사 결과 모두 무고로 풀려났으나 이괄의 아들은 모반죄로 죽이고 이괄을 심문하러 온 조사관들의 목을 베어버린다. 그리고 구성부사 한명련을 꾀어 반란을 일으켰다.
1624년 1월 22일 이괄은 기병 100여 명을 선봉으로 삼고, 1만 병력으로 영변을 출발하여 도원수 장만이 주둔한 평양을 피하여 곧장 한양으로 진군하였다. 어찌나 행군 속도가 빠른지 관군이 파악 못 하였다. 평산을 거쳐 개성에서 관군을 대파하고 한성으로 직도하였다.
이괄의 군대에 놀란 인조는 공주로 피난하였다. 1624년 2월 11일 이괄 군은 마침내 서울에 입성하여 경복궁을 장악하고 선조의 아들 흥안군 제를 왕으로 추대하고, 민심을 수습하였다. 이 무렵 도원수 장만과 정충신 연합군대가 한양 근교 무악재 안산에 진을 쳤다. 이괄은 이들을 공격했으나 정충신의 군에 패하였다. 이괄과 한명련을 패잔병을 이끌고 수구문을 빠져나가 삼전도를 거쳐 광주로 달아났다.
2월 15일 밤 이천의 묵방리에서 부하 장수들이 이괄과 한명련의 목을 잘라 관군에 바치고 항복하므로 이괄의 난은 평정되고, 인조는 22일 환도하였다. 인조는 환도하여 이괄의 반란 평정에 공을 세운 장만· 정충신· 남이흥 등 32인을 진무공신으로 포상하였다. 그리고 바보 임금과 얼간이 신하들이 병정놀이가 시작되었다.
병자호란은 光海를 추출한 데 대한 보복이었다.
1627년 후금이 정묘호란을 일으킨 형제국으로 맹약한 후금은 10년 만에 1636년(인조 14년) 병자년 12월 8일, 조선을 침략하였다. 정묘호란은 명나라를 치면서 조선을 제압하여 다독일 목적의 전쟁이지만 청나라에 호의적인 광해군을 몰락시킨 조선을 굴복하려는 전쟁이었다. 후금의 태조 누르하치는 명나라를 정복하면서 광해와 약속을 하였다.
명나라는 사라지는 나라이니 우리의 손을 잡아라. 그렇게 하면 청나라는 조선에 돌멩이 하나도 던지지 않는 형제국으로 대할 것이다. 광해는 명을 멀리하고 청을 우대하는 등거리 정책을 폈다. 이에 친명배청론자들이 난을 일으켜 광해를 몰락시켰다. 이에 청 태종은 아버지의 명으로 형제인 조선인데 광해를 죽인 핑계로 조선을 침략하였다. 병자호란은 청 태종이 직접 군사를 몰고 조선을 침략하였다.
‘인조가 형제의 나라 임금 광해를 죽이고 친명정책을 쓴단 말이지. 군사를 동원하라 내가 직접 나설 것이다.’
1636년 1월 3일, 청태종은 강력한 8로군 기병대를 직접 앞세워 12만 군사로 압록강을 건너 침공하였다. 청나라는 인조와 조정이 강화도로 피난하는 길을 차단하여 강화도를 점령한 후 한양을 점령하였다.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하고 소현세자와 봉림대군과 왕실의 신료는 역대 임금의 신주를 모시고 강화도로 피난해 있었다.
인조는 남한산성에 1만 3천여 명의 병사로 수성하고 양평 양근리에 약 1만 7천여 명의 조선군이 집결하여 항전하였으나 청의 포위로 인한 굶주림과 추위와 비축 식량의 소진으로 어려움을 겪던 조정은 항전 의지를 상실했고, 2월 29일 출성하여 삼전도에서 치욕스러운 지절 3배로 청태종에게 항복하고 말았다.
동아시아 역사가 바뀌는 명청 교체기에 일어난 전쟁에서 패하고 막대한 보상금을 물어야 했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두 왕자와 왕족을 인질로 잡고 인질 공녀 3,000명, 병사 3만 명이 인질로 잡혀가는 엄청난 낭패를 겪었다. 남자는 청나라 병사가 되었고 공녀는 청나라 병사와 결혼을 했거나 일부 돌아온 환향녀는 화냥년이란 학대를 받고 불행한 삶을 살았다.
병자호란 원인은 친명배금 정책으로 친명파와 척화파와 대립 속에서 무능한 권신들의 패정으로 국제정세를 못 읽은 인조의 외교 무능력이었다.
인조는 청나라에서 돌아온 소현세자와 빈 손자를 학살하였다.
인조는 난세의 영웅이 될 세자를 죽였다. 인조는 청나라에 인질로 잡혀가서 8년 만에 돌아온 소현세자를 독살하고 며느리와 어린 세손들까지 학살한 정신병자였다.
인조는 소현세자가 선물로 가져온 벼루를 던져 죽였다. 세자는 청나라에 인질로 가서 서양의 아담 샬 신부와 친해지면서 실리 실학에 눈떠 서양의 문물을 습득하여 조선을 청나라 이상으로 개혁하려는 꿈을 갖고 돌아왔는데 아비를 농락하는 위인이라며 세자를 죽였다.
“난 네놈이 청나라에 가서 청나라 관료들과 서양인과 어울려 한 짓을 다 안다.”
“청나라의 문물과 서양의 문물을 배웠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겠다는 거냐? 청나라를 섬기겠다는 말이잖아.”
“섬기겠다는 것이 아니고 청나라와 외국문물을 배워 장차 조선을 개혁하여 부국강병의 나라로 만들 것입니다.”
“뭐라, 이놈이 아비를 농락하고 내 자릴 노리는구나.”
인조는 벼루를 들어 소현세자의 머리에 던졌다. 소현세자는 비명을 지르며 쓰러져 머리에 피를 흘리고 있었다. 인조는 의원을 불렀다.
“의원은 절대 이 상황을 말하지 마라.”
“생명이 위독합니다.” 의원이 말했다.
“그렇다면 극약을 써서 살려라.”
독살이었다. 벼루에 맞아 뇌진탕을 일으킨 세자에게 극약을 먹여 죽게 하였다.
“보약을 먹였더니 죽었다고 말하라.”
왕자의 상을 치르고 인조는 세자빈을 죽이고 세손을 제주도로 유배 보냈다. 죄목은 왕권 착취 공모죄였다. 정상적인 부모나 군왕이 가질 수 없는 광기를 보였다. 인조는 조선의 역대 왕 중에 가장 무능하고 포악한 군주였다. 그런 무능한 폭군이 광해를 폭군으로 몰아 죽였다. 만약에 광해가 계획한 대로, 소현세자가 꿈꾸는 대로 조선이 개혁했더라면 청나라에 버금가는 최강국이 되었을 것이다.
[김용필]
KBS 교육방송극작가
한국소설가협회 감사
한국문인협회 이사
한국문인협회 마포지부 회장
문공부 우수도서선정(화엄경)
한국소설작가상(대하소설-연해주 전5권)
이메일 :danmoon@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