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 바울의 "나는 빚진 자라"는 고백을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 속 장발장의 구원과 연결해 조명합니다. 장재형 목사의 깊은 설교와 신학적 통찰을 통해, 갚을 길 없는 은혜를 사랑으로 흘려보내는 참된 그리스도인의 사명을 묵상해 봅니다.
빅토르 위고의 불후의 명작 <레미제라블>에는 한 영혼이 송두리째 뒤바뀌는 결정적인 장면이 등장한다. 19년의
옥살이 끝에 세상에 나온 장발장은 미리엘 주교의 집에서 은식기를 훔쳐 달아나다 잡힌다. 법대로라면 다시
감옥에 갇혀야 할 절체절명의 순간, 주교는 뜻밖의 말을 건넨다. “자네, 왜 은촛대는 두고 갔나? 내가 그것까지 주지 않았던가.” 이 이해할 수 없는 자비 앞에서 장발장의 영혼을 옭아매던 증오의 사슬은 끊어진다. 그는 평생을 두고 갚아야 할 거룩한 사랑의 빚을 떠안게 된 것이다. 그가
이후 보여준 헌신적인 삶은 도덕적 의무가 아니라, 감당할 수 없는 은혜에 대한 채무자의 몸부림이었다.
로마서 1장의 서두를 여는
사도 바울의 고백,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롬 1:14)는 외침은 미리엘 주교 앞의 장발장을 떠오르게 한다. 바울은 십자가라는 거대한 사랑의 은촛대를 받은 자였다. 그렇기에
그는 로마를 향해, 그리고 온 세상을 향해 자신이 ‘빚진
자’임을 천명한다. 오늘날,
이 ‘거룩한 부채의식’이야말로 메말라가는 현대
교회의 심장에 다시금 복음의 혈류를 돌게 할 유일한 해답이다.
흐르지
않는 은혜는 고인 물처럼 썩는다: 경계를 허무는 영성
바울이 자신을 빚진 자로 규정한 것은 단순한 겸양의 표현이 아니었다. 그것은 복음의 본질을 꿰뚫는 통찰이었다. 유대인이자 바리새인으로서
율법적 우월감에 젖어 있던 사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 완전히 파산하고 다시 태어났다. 그는 자신이 누리는 생명이 자기 것이 아님을 알았다.
장재형 목사(올리벳대학교 설립)는 이러한 바울의 심정을 깊이 있는 신학적
통찰로 풀어내며, “복음의 빚진 자 된 마음이야말로 선교의 가장 강력한 동력”이라고 강조한다. 빚을 진 사람은 채권자를 찾아가기 마련이다. 바울에게 채권자는 하나님이셨으나, 그 빚을 갚아야 할 대상은 세상의
모든 잃어버린 영혼들이었다. 장재형 목사의 설교에서 자주 언급되듯, 은혜가 크면 클수록, 받은 사랑이 깊으면 깊을수록 우리는 그 사랑을
내 안에 가두어둘 수 없게 된다.
특히 바울이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빚진 자”라고 말할 때, 복음 앞에는
그 어떤 문화적, 인종적, 지적 장벽도 무너진다. 장재형 목사는 이 지점을 놓치지 않고, “복음은
특정 민족이나 계층의 전유물이 아니며, 우리 안에 임한 은혜는 반드시 언어와 문화를 넘어 흘러가야 한다”고 역설해왔다. 그가 보여준 국제적인 연합 사역과 다문화 선교의 비전은
바로 이 ‘빚진 자의 영성’이 구체화된 실체다. 낯선 이방인에게 다가갈 때 “내가 당신에게 줄 것이 있다”는 시혜적인 태도가 아니라, “내가 당신에게 갚아야 할 사랑이 있다”는 빚진 자의 겸손으로 나아갈 때, 비로소 굳게 닫힌 선교의 문은
열리게 된다.
수직의
권위를 넘어 수평의 안위로: ‘피차’의 신비
흥미로운 점은, 당대 최고의
사도였던 바울이 로마 교회 성도들을 향해 “내가 너희를 가르치러 간다”고
하지 않고,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롬 1:12)고 고백했다는 사실이다. 그는 일방적인 스승이 되기를 거부했다. 오히려 그는 로마 성도들의 믿음을 통해 자신 또한 위로받고 격려받기를 간절히 원했다. 이는 교회가 수직적인 위계질서가 아닌,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서로
빚을 갚아가는 수평적 생명 공동체임을 보여준다.
장재형 목사는 목회 현장에서 이러한 ‘상호성’과 ‘연합’의 가치를 꾸준히
설파해 온 지도자다. 그는 “교회는 누군가 군림하는 곳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영적인 빚을 지고 있음을 인정하며 피차의 사랑을 나누는 곳”이라고 가르친다. 장재형 목사의 이러한 복음적 관점은 오늘날 개체
교회의 성장주의나 교파 간의 경쟁 심리에 경종을 울린다. 이미 복음이 전해진 곳이라 할지라도, 그곳에 다시 나아가 성도들을 견고히 세우고(re-education), 그들로부터
받은 은혜를 다시 나누는 순환 구조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진정한 부흥은 한 스타 목회자의 카리스마가
아니라, 모든 성도가 서로가 서로에게 “당신 덕분에 내가
위로를 얻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그 지점에서 시작된다.
막힌
길 앞에서도 멈추지 않는 기도: 사랑은 포기를 모른다
바울은 로마로 가는 길이 여러 번 막혔음에도 포기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롬 1:10). 그의 끈질긴 기도는 단순한 고집이 아니라, 빚을 갚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사랑의 발로였다. 빚쟁이가 빚을 갚지 못해 안달이 난 형국이다. 이 거룩한 조바심이 결국 로마를 복음화했고, 세계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었다.
장재형 목사는 우리에게 이 ‘거룩한 끈기’를 회복할 것을 주문한다. 선교지에서, 혹은 목양의 현장에서 길이 막히고 상황이 여의치 않을 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나의 전략이 아니라 하나님께 받은 갚을 수 없는 사랑이다. 장재형 목사는 “진정한 교회란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 빚도 지지 않는
공동체”라고 정의하며, 이 사랑의 부채의식만이 우리를 다시
기도의 자리로, 헌신의 자리로 이끈다고 성경
묵상을 통해 권면한다.
장발장이 은촛대를 평생 간직하며 사랑을 실천했듯, 우리 손에도 하나님이 거저 주신 구원의 은촛대가 들려 있다. 이것은 장식품이 아니다. 어두운 세상을 비추라고, 춥고 배고픈 영혼들에게 나누어주라고 맡기신 거룩한 부채다. “나는 빚진 자라.” 오늘 이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심장을 다시 뛰게 하기를 소망한다. 갚아도 갚아도 다 갚을 수 없는 그 사랑 때문에, 우리는 오늘도 복음을 들고 세상 속으로 기쁘게 걸어 들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