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숨 가쁜 불안이 손끝의 고요한 리듬을 만나는 순간, 혼란스럽던 마음은 비로소 완전한 대칭의 축을 찾는다. The Imaginary Pocus가 [창간특별기획연재] 아티스트 아카이브 시리즈의 열 두 번째 주인공으로 만난 아티스트는, 비단 위에 겹겹이 쌓아 올린 수행의 시간과 AI라는 실험실을 오가며 견고한 마음의 질서를 설계하는 ‘안녕(安寧)을 짓는 아티스트’ 고은주 작가이다.

불확실한 시대, 마음의 축을 세우는 '안녕'의 건축가
우리는 습관처럼 “안녕하세요”라고 묻는다. 하지만 정작 그 ‘안녕’의 상태가 무엇인지, 어떻게 하면 그 상태에 도달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누구도 명쾌한 답을 주지 않는다. 불확실성이 지배하는 이 시대, 고은주는 막연한 위로 대신 마음이 무너지지 않도록 단단한 구조를 세우는 작가다.
그녀에게 안녕은 단순한 인사나 기분이 아니다. 그것은 거친 파도 속에서 호흡을 고르고 중심을 되찾게 만드는 정교한 ‘기술’이자 ‘장치’다. 2007년부터 지금까지 18회의 개인전을 치르며 묵묵히 자신만의 조형 언어를 다져온 그녀는 이제 한국화라는 전통의 그릇에 동시대의 불안을 잠재우는 치유의 알고리즘을 담아내고 있다.
영감보다 노동, 붓질의 반복이 만드는 치유의 의식
많은 예술가가 영감의 번뜩임을 기다릴 때, 고은주는 노동의 성실함을 믿는다. 그녀가 예술의 길을 걷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역설적이게도 삶이 흔들리는 결핍의 순간들이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과 책임의 무게가 짓누를 때,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무너지는 마음을 붙잡아 줄 견고한 형식이자 틀이었다.
작업실에 들어선 그녀는 가장 먼저 바탕을 매고 아교반수를 한다. 비단이나 종이 위에 아교를 칠하고 말리는 이 지루하고 단순한 반복 과정은 그녀에게 일종의 수행이다. 손을 규칙적으로 움직이는 동안 머릿속의 소음은 꺼지고, 거칠던 호흡은 차분한 리듬을 되찾는다. 고은주는 이 과정을 통해 깨달았다. 손끝의 리듬을 통해 스스로 회복해내는 감각이라는 것을. 그래서 그녀의 예술은 표현의 수단이기 이전에, 일상을 견디게 하는 ‘안녕의 기술’이다.
AI라는 실험실, 비단 위에 스며드는 숨결 그리고 선택의 힘
고은주의 작업 방식은 매우 현대적이면서도 지극히 전통적이다. 그녀의 작업 프로세스에는 최첨단 기술인 AI(인공지능)와 가장 아날로그적인 재료인 비단과 석채(돌가루 안료)가 공존한다. 그녀에게 AI는 안녕의 구조를 설계하는 ‘실험실’이다. 하지만 기술의 속도 안에서도 그녀가 잃지 않는 것은 ‘선택의 힘’이다.
“AI가 이미지를 빠르게 생성할수록, 무엇을 상상하고 선택하느냐는 더 중요해집니다. 상상력은 도구가 아니라 방향을 결정하는 힘이고, 기술은 그 상상을 구체화하는 매개일 뿐입니다.”
작가는 AI가 쏟아내는 수많은 이미지 속에서 ‘안녕’에 가장 가까운 균형을 찾아낸다. 그리고 그 결과물을 화면에 옮기는 과정은 다시 오롯이 작가의 육체적 노동으로 회귀한다. 디지털 이미지가 가진 매끈하지만 차가운 속도는, 비단 위에서 겹겹이 쌓이는 안료의 층과 시간의 두께를 통해 따뜻한 ‘숨결’을 얻는다.
특히 그녀가 주로 사용하는 오방색은 전통적인 상징을 넘어 심리적으로 가장 안정된 질서를 만들어내는 색이다. 탁하지 않은 깊이감을 가진 천연 안료가 비단에 스며들 때, 관객은 시각적인 안정을 넘어 촉각적인 위로까지 경험하게 된다.
기원(祈願)에서 구조로, 불안을 잠재우는 시각적 알고리즘
고은주의 화면에는 길상적인 도상, 추상적 패턴, 타로카드 프레임 같은 상징들이 등장한다. 흥미로운 점은 그녀가 이 상징들을 사용하는 방식이다. 그녀는 특정 의미를 강요하지 않는다. 대신 관객이 스스로 자신의 불안을 투영하고 해소할 수 있는 열린 구조를 만든다. 이것이 작가가 말하는 ‘상징의 전략’이다.
초기 작업이 여성과 모성에 대한 존재론적 질문에서 출발해 꽃과 물을 통해 생명과 돌봄을 탐구했다면, 2019년 이후 그녀의 시선은 ‘동시대의 불안’으로 확장되었다. 전통적인 기원(祈願) 문화가 가진 치유의 기능에 주목하되, 그것을 현대적인 조형 언어로 재해석하여 ‘안녕을 구축하는 시각적 구조’를 제안하기 시작한 것이다.


세 개의 이정표: 기원에서 구조로, 그리고 빛으로
고은주의 예술 세계가 어떻게 확장되어 왔는지는 그녀가 꼽은 세 점의 인생작을 통해 선명하게 드러난다. 이 작품들은 작가가 불안을 다루는 방식이 평면에서 공간으로, 이미지에서 환경으로 진화하는 과정을 증명하는 중요한 이정표다.
가장 먼저 주목해야 할 작품은 <오늘도, 무사부>(2023)이다. 전통 기원 문화 중 부적을 차용한 이 평면 작업은 작가가 상징 체계를 본격적인 화면 언어로 받아들인 첫 번째 전환점이다. 그녀는 부적을 단순히 재현하는 데 그치지 않고, 불안을 견디기 위한 시각적 구조로 재설계했다. 개인적인 감정을 보편적인 기호로 번역하는 방법을 발견한 이 작품은 고은주 작업의 출발점이자, 지금까지 이어지는 기본 문법이 형성된 시기를 상징한다.
두 번째 이정표는 <서천꽃밭&상상꽃>(2023)이다. 설위설경과 지화(종이로 만들어 바쳤던 꽃)를 차용한 이 설치 작품은 평면의 상징을 공간으로 확장하려는 첫 과감한 시도였다. 작가는 기원(祈願) 행위가 단지 이미지를 보는 것이 아니라 환경과 몸의 경험이라는 점에 주목했다. 관객이 구조 안에 직접 들어오게 만드는 이 작업을 기점으로, 그녀의 관심사는 ‘보는 그림’에서 ‘머무르는 구조’로 이동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서천꽃밭>(2023)은 안녕의 개념이 빛과 공간으로 확장된 작품이다. 작가는 빛의 반사와 투과를 매체로 삼아 색과 장식이 평면에 머무르지 않고 공간 전체에 퍼지도록 연출했다. 관객은 이미지를 보는 경험에서 나아가 빛 속에 놓이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이는 고은주의 예술이 회화를 넘어 심리적 공간을 건축하는 단계로 나아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작품이다.
평면을 넘어 공간으로, 마음의 구조를 시각화하는 '안녕'의 단계
현재 고은주는 그 어느 때보다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2025년 호반문화재단의 ‘H-EAA 선정작가상’을 수상하고, 서울과 경기도 등지에서 굵직한 전시를 이어가고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은행을 비롯해 다양한 기관이 그녀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녀가 구축한 ‘안녕의 세계’가 대중과 평단 모두에게 설득력을 얻었음을 증명한다.
그녀의 시선은 이제 더 깊고 넓은 곳을 향한다. 앞으로 선보일 새로운 연작은 마음을 추상적인 감정이 아니라 공간적인 구조(방-문-장-동선)로 이해하여 마음의 구조를 시각화하는 프로젝트다. 복잡하고 추상적인 마음의 구조를 시각화하고 구체화시킴으로써 통찰을 연계하는 심리기법을 작품에 적용하여 삶의 균형을 다시 세우도록 반복, 리듬, 상징으로 구현해 낼 예정이다,이는 하나의 이야기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다층적으로 관찰하고 구조로 번역하는 실험이다. 또한 관객의 움직임에 반응하는 인터랙티브 아트와 설치 미술을 통해, 안녕을 공감각적으로 체험하게 하겠다는 포부도 가지고 있다.
"오늘도, 당신의 마음이 무사히 안녕하기를"
고은주 작가는 예술성을 “선택의 책임”이라고 정의한다. 기술이 이미지를 쉽게 만들어내는 세상에서,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비울지 결정하는 것은 결국 인간의 몫이다. 어떤 리듬이 타인에게 위로가 될지 고민하는 ‘윤리’를 갖는 것, 그것이 고은주가 생각하는 진정한 예술이다.
그녀의 작품은 우리에게 흐트러진 호흡을 가다듬고 다시 일상을 살아낼 수 있는 작지만 단단한 의자를 내어준다. 그녀가 화면 위에 짓는 집은 비바람을 피할 수 있는 견고한 피난처다. 삶이 예술이 되는 순간을 찾지 못해 방황하는 이들에게 작가는 조용히 조언한다. 오늘 할 수 있는 작은 반복부터 시작하라고. 바탕을 만들고 손을 움직이는 그 사소한 정렬의 시간들이 쌓여, 결국 당신의 삶을 지키는 예술이 될 것이라고 말이다.
고은주의 작품 앞에 서면, 그녀가 건네는 나직하지만 힘 있는 문장이 들리는 듯하다. “오늘도, 당신의 마음이 무사히 안녕하기를.”

[아티스트 소개: 고은주]
2007년부터 18회의 개인전을 개최하며 한국화의 전통 재료인 비단과 석채에 AI 기술을 접목해 독창적인 작품 세계를 구축해 온 아티스트다. 자신을 ‘안녕(安寧)을 짓는 사람’이라 정의하며, 불안한 시대에 마음의 중심을 세우는 시각적 구조를 설계한다. 2025년 호반문화재단 H-EAA 선정작가상 수상 및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은행 소장 등 평단과 대중의 인정을 동시에 받고 있다. ‘안녕은 감정이 아니라 기술’이라는 철학 아래, 관객이 스스로 마음을 정렬할 수 있는 치유의 경험을 선사하며 “오늘도, 당신의 마음이 무사히 안녕하기를” 바라는 따뜻한 위로를 건네고 있다.
[The Pocus Archive: 아티스트 아카이브 – OO을 사랑한 아티스트]
AI가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리는 시대에도 변하지 않는 가치는 결국 인간의 마음과 상상의 힘에 있다. 본지 The Imaginary Pocus는 창간을 맞이하여 기술만으로는 흉내 낼 수 없는 인간 고유의 감성과 상상 세계를 지켜가는 예술가들을 조명하는 연재 시리즈 [OO을 사랑한 아티스트]를 선보인다. The Pocus Archive는 앞으로도 자신만의 가치를 사랑하며 자신의 원하는 미래를 실현하는 아티스트들을 엄선하여 기록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