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과물 너머, ‘찐한 대화’가 숨 쉬는 시간
어린 북아티스트들과 함께 책을 짓는 일은 그야말로 ‘무작정 떠나는 여행’과 같습니다. 잘 닦인 도로를 달리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없는 이야기를 찾아 나서는 탐험이자 새로운 상상의 지평을 향해 자신만의 길을 내는 창조의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이 예측할 수 없는 특별한 여정을 온전히 즐기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특별한 ‘생존가방’이 필요합니다.
지난 20여 년간 오프라인에서 진행되던 수업이 시간이 흘러 온라인으로 전환되면서, 뜻밖의 혜택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바로 가정에서 아이들이 책을 만드는 전 과정을 부모가 곁에서 지켜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결과물만 받아보던 시절에는 알 수 없었던, 내 아이가 스스로 북아티스트의 모자를 쓰고 이야기를 짓는 그 흥미로운 과정을 목격하게 되었고, 아이들과 나누는 비밀 같은 ‘찐한 대화’는 결과물이 아니라, 무심히 지나가는 듯한 바로 그 과정 속에 숨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건 그동안 저 혼자 누리던 아이들의 상상 여행의 여정을 함께 하게 된 특혜였지요.

무작정 여정에 준비할 생존 가방
이 여행을 위해선 세 가지 준비물이 필요합니다. 만약 아무 준비 없이 떠났다가는 얼마 못가서 아이도 부모도 모두 이 환상적인 무작정의 여정을 포기하게 될 지도 모릅니다.
이 특별한 여정의 생존 가방에 담아야 할 첫 번째 준비물은 ‘즐겁게 과정을 지켜보기’입니다. 아이들은 상상하는 즐거움을, 어른들은 그저 바라보는 즐거움을 누리는 것입니다. 물론 한 권의 스토리 팝업북이 탄생하기까지는 수많은 변수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처음엔 2쪽짜리 책을 계획했더라도, 쓰다 보니 이야기가 길어지고 할 말이 많아져서 6쪽으로 늘어나는 일도 다반사입니다. 이때 작업 시간이 길어지고 아이들이 부담을 느낄 수도 있지만, 고사리 같은 작은 손으로 머리를 싸매며 써 내려간 글을 읽어보면 그 노력이 ‘눈이 시리게’ 감동적으로 다가옵니다.
그러니 두 번째 준비물은 ‘욕심을 버리고 어린 아티스트의 의사를 존중하는 태도’가 되어야 합니다. 어른의 시선에서는 조금 더 부추겨서 남들에게 자랑할 만한 매끈한 결과물을 만들고 싶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그 욕심을 과감히 저버려야 합니다. 아이들이 애써 작업한 과정을 살리면서도 미적으로 손색없는 형태를 구상하되, 언제나 그들의 의사를 먼저 묻고 의견을 나누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어른의 ‘욕심’을 비우고 아이의 ‘의사’를 채우다
작업을 하다 보면 성격 급한 아이들은 순서를 뒤바꾸거나, 밑그림도 없이 사인펜으로 바로 그림을 그려버리기도 합니다. 10명 중 절반은 순서에 신경 쓰지 않고 하고 싶은 것부터 해버립니다. 계획대로 책이 나오지 않을 수도 있고, 어른들이 상상하는 작품과는 거리가 멀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 지점에서 무작정 여행의 생존 가방에 챙길 마지막 준비물인 ‘실패할 경험을 선택할 자유’가 필요합니다.
순서를 어기면 망친다는 뻔한 잔소리는 아이들과의 관계를 해칠 뿐만 아니라, 이미 다른 곳에서도 충분히 듣고 있는 터라 창작의 세계에서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습니다. 우리는 그저 너그럽게 실패할 기회를 주면 됩니다. 그것이 아이의 ‘고집이든 반항이든’, 혹은 조금 느린 이해의 걸음이든 상관없습니다. 한 권의 책을 만드는 여정의 본질은 결과물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 느끼는 즐거움과 성취감, 그리고 자존감을 실컷 누리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잔소리는 끄고 ‘망쳐볼 기회’를 선물하기
우리가 아무리 오랜 세월 아이들을 가르쳤다 한들, 오늘 만난 아이들은 저마다 전혀 새롭고 특별한 여행을 떠나는 존재들입니다. 우리의 경험과 노하우는 그들의 여정에 잠시 깔아주는 ‘징검다리’ 정도에 불과할 것입니다. 아이들이 상상 속에서 길을 잃고 엉뚱한 곳으로 빠져들 때, 정답을 들이미는 대신 ‘슬쩍’ 다가가 함께 고민해 주는 것만으로 충분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곧 아이들의 손끝에서 어른들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재미와 감동이 쏟아져 나오는 기적과 스스로 실마리를 풀어가는 창조자의 손끝을 마주하게 됩니다.
부모와 아이 사이에 신뢰가 쌓이고, 공감의 강이 흘러 바다로 나아갈 때, 아이들은 펄럭이는 돛을 펴고 마음껏 노를 저어 행복한 항해를 할 것입니다. 우리 어른들이 이 생존 가방을 스스로 잘 챙길 수 있다면 언제든 아이들과 또다시 상상의 여정에 함께 할 수 있겠지요.
그러니 어쩌면 아이들이 가장 바라는 어른들의 모습은 자신들의 무작정 상상 여행을 언제든 함께 할 여행자가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