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낙랑군은 평양의 위치를 알려주는 좌표; 반드시 밝혀야! 그_2
현대의 산업발달과 인구증가는 땅의 수요를 폭발시켰고,
쓸모없어 보이던 땅을 개발하게 되면서 의외의 지역에서
상식 밖의 유물이나 유적이 발굴되어 지식의 한계를 절감하게 만든다.
더욱이 현대의 첨단과학으로도 제조 및 축조 원리를 풀이하지 못하는
유적과 유물이 적지 않아 현대인들을 곤혹스럽게 만들기도 한다.
학자는 호기심과 관찰력이 뛰어난 사람이라야 뛰어난 업적을 남기지만,
업적에 대한 집착으로 스스로 명예를 실추시키는 사례가 흔하여 안타깝다.
그 대표적 예가 일본에서 몇 번씩이나 발생되었다는 사실은 더욱 안쓰럽다.
일본인은 삼국시대 역사를 공유하다 일본열도로 건너가 나라를 세웠다는 사실 때문에
필자는 우리와 동족이라고 단정하므로 민망스럽기까지 하다.
한편, 황해를 내해로 생각하고, 화하족이 유전적으로 우리와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하는 중공사람에 느끼는 감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들은 늘 동북방의 종족들에게 지배받고 있다는
피해의식을 접지 못하기 때문에 자기중심적이 심화된 것이 아닌가 추정한다.
무의식적 집단 배타의 심리를 키우는 것은 아닐까?
따라서 낙랑군에 대한 주제가 필자에게는 세 나라의 국민을
하나로 묶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는 염원에서 더욱 소중한 연구대상임을 밝히고자 한다.
곧 분별을 위한 주제가 아니라
하나됨을 추구하는 명제임을 독자들도 공유하여 주시기를 기대한다.
또 같음을 알고자 한다면 다름도 알아야 한다는 사실도 함께해 주시기 바란다.
뒤틀어진 ‘낙랑군 평양설’
일본은 1571년부터 포르투갈과 교역을 통하여
서양에 대한 면역이 이미 이루어졌던 듯하다.
그 교역을 통한 사고 전환으로 임진왜란에 대한 반성은 뒷전으로 밀리고,
1854년 페리제독의 흑선이 전환점이 되어
돌파구가 오히려 조선 재침략에 대한 시동이 걸린 것이 아닐까
개인적으로 추론해 본다.
그렇지 않다면 일본인들의 우리나라 역사 왜곡이 설명되지 않는다.
즉 일본인들의 조선 침략 계획은 매우 이른 시기부터 이루어졌음을 의심하고 연구할 필요가 있다.
북경에서 구매한 낙랑유물을 악용하여, 평양 인근에서 낙랑유물을 발굴하였다는
일본 사학자의 발표는 대표적 유물조작 사건으로 간주된다.
발굴조작 음모는 임기응변일 수 있어도,
조선멸망이 확정되기도 전인 1909년 세키노 다다시라는 자가
벌써 ‘고구리고적조사반’을 꾸려 평양 일대 유물 조사한다든지,
조선 주권 강탈 직후에는 도리이 류조를 시켜
‘한대 낙랑군 유적조사’로 신속하게 확대시키는 조치는
역사왜곡을 위한 사전연구가 없었다면 실시하기 쉽지 않은 일이다.
이러한 일련의 유물발굴 조작을 바탕으로 태어난 평양낙랑설이,
백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대학이라는 국가적 교육기관에서 부정되지 않고,
오히려 그 역사왜곡의 골격을 유지, 발전시키는 사실에 대한 책임을
우리나라 사학계는 어찌 감당할 것인지 모르겠다.

유적으로 증명되는 북경 인근의 낙랑군
1976년 평안남도 강서군 덕흥리에서 발견된
유주자사 진의 무덤의 벽화에 남겨진 묵서는
고구리의 대륙 영역 일부를 선명하게 증명하였다.
또 그 묵서가 말하는 의외성에 모든 국민이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당대에 남긴 글임에도
학계에서는 있는 그대로 해독하지 않고,
무덤의 주인이 중국계 망명자라는 둥,
유주자사라는 직위가 실직이 아니라 허직이라는 둥의
근거 없는 가설을 제시한다는 사실이다.
여기에서는, 그러한 비논리적 가설은 배제하고, 사실만 바라본다.
덕흥리 고분의 묵서 일부를 번역하고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정면에 좌정하고 있는 무덤의 주인공은
“▨▨군 신도현 도향 중감리 사람이며
석가문불의 제자인 ▨▨는 역임한 관직이
건위장군 국소대형 좌장군 용양장군
요동태수 사지절 동이교위 유주자사 진이었다.”
서쪽 벽면에 위 아래로 도열한 인사들은
그 유주자사가 관할하는 13군의 태수로 그 명단이 보인다.
한 명의 직책은 판독되지 않고 12분은 각각
燕郡(연군)태수, 范陽(범양)내사, 漁陽(어양)태수, 上谷(상곡)태수,
廣寧(광녕)태수, 代郡(대군)내사, 北平(북평)태수, 遼西(요서)태수,
昌黎(창려)태수, 遼東(요동)태수, 玄菟(현도)태수, 樂浪(낙랑)태수로서
산서성 북부와 하북성 서북부를 망라하는 지역이다.
즉 산서성 북쪽과 하북성의 서북쪽(현 북경의 서쪽을 포함) 경계에
오늘날도 존재하고 있는 지명으로
낙랑군이 북경의 서쪽 어딘가에 있었겠구나 하고
어렵지 않게 추정할 수 있다.
시대적 배경은 전 대륙이 5호16국으로 갈라져 전쟁하여
나라가 불과 몇 년 동안에 세워지고 망하는 지경이었다.
그 때문에 전쟁의 중심에 일생을 보냈던 분인 만큼
평화로운 지역인 이 땅을 묘지로 선택하였을 것이다.
유주의 영역을 뒷받침하는 한서 지리지
우리와 소위 지나(차이나) 역사에서 갈등에 등장하는
대표적 지명은 요동, 요서를 가르는 遼(요)가 있지만,
그 다음으로 幽(유)를 뺄 수 없을 것이다.
흥미롭게도 두 글자 모두 멀다, 아득하다라는 뜻이어서
소위 지나의 나라들에게는 멀지만 소유하고 싶어하는 대상이었던 모양이다.
시대 따라 변화를 겪지만, 그 지역에 어떤 행정구역이 있었는지
최초로 기록한 문헌을 꼽자면 한서이며,
그 지리지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괄호 속의 지명은 현재도 쉽게 중국지도에서 찾을 수 있는 지명임).
東北曰幽州:其山曰醫無閭.
~ 涿郡(涿, 故安, 容城, 易, 安平, 良鄉), 勃海郡(浮陽, 安次),
代郡(代, 靈丘), 上谷郡(軍都, 居庸, 昌平, 廣寧, 涿鹿),
漁陽郡, 右北平郡, 遼西郡, 遼東郡(西安平), 玄菟郡, 樂浪郡(遂成)
동북을 일컬어 유주라 한다. 그 산은 의무려산이라 한다.
~ 탁군(탁, 고안, 용성, 역, 안평, 랑향), 발해군(부양, 안차),
대군(대, 영구), 상곡군(군도, 거용, 창평, 광녕, 탁록),
어양군, 우북평군, 요서군, 요동군(서안평), 현토군, 낙랑군(수성)이 포함된다.
[의무려산을 요녕성 북진시 인근의 산이라는 주장을 필자는 전혀 동의할 수 없다.
산서성과 하북성에 걸친 산으로 필자는 추정하고 있다.
향후 이 산의 위치도 추적할 계획이다.]
덕흥리 무덤의 12군명과 한서 지리지 유주의 속군 가운데,
어양, 상곡, 대군, 요서, 요동, 현도, 낙랑은 겹쳐있고,
광녕은 상곡과 겹치기도 분리되기도 한다.
나아가 10개 군명이 8곳은 산서성과 하북성에 있는 군으로
오늘날까지도 쉽게 확인되는 지명이다.
낙랑군과 주변 지역의 역사적 사건으로 오늘날 어느 지역인지 판단하여 보았다.
고구리 대무신왕은 동쪽의 낙랑국을 합병하고 5년 뒤 낙랑군을 쳐서 없앴으나,
7년 뒤에는 다시 광무제에게 빼앗겨 그 남쪽이 한의 땅이 되었다고 하였다.
모본왕 2년 북평, 어양, 상곡, 태원을 쳐서 빼앗았다.
이들 지명 모두 산서성과 하북성 지명이다.
또 태조대왕 53년(105년) 요동 6현을 빼앗았고,
66년(118년)에는 현도를 습격하였다는 기록도 이미 소개하였다.
고구리의 수도가 하북성 어느 곳에 있었을 가능성을 추정할 수 있다.
위 사실의 추정은 누구나 가능하다.
그런데 사학자들 눈에는 보이지도 않으며,
보더라도 조선시대 박지원도 2달 걸렸던 거리를 두고
전쟁을 치렀다고 해석하고 고집한다.
이 글의 독자라면 이해할 수 있겠는가?

낙랑이 북경 인근이라는 또 다른 유적 발굴
2014년 북경의 남쪽 대흥구 황촌진 삼합장촌에서 도시개발하다 발견된
129기의 무덤 가운데 단연 세상사람들의 주목을 집중적으로 받은 무덤이 있었다.
앞의 유주자사 진의 경우는 국가적으로 예우받은 특수한 경우이고,
상식적으로는 묻힌 지역과 관련된 사람의 무덤이라고 생각한다.
즉 낙랑군조선현 출신 한현도가 낙랑군에 묻힌 것이므로
그 지역이 낙랑군이었다고 추정하게 된다.
그러나 발표에 의하면 東魏(동위) 때 묘라고 하였는데,
元象二年四月十七日 樂浪郡朝鮮縣人 韓顯度銘記
원상 2년(539년) 4월 17일 낙랑군 조선현 사람 한현도 명기
라고 새겨진 벽돌이 출토되니 놀랄 수밖에 없다.
그동안 낙랑군을 대한민국 평양 일대라고
일본 군국주의 치하 일본사학자들의 낙랑군 평양설을
정설로 수용해 오던 중국 사학계도 이 발견에 주목하였다.
북경 천안문에서 불과 20㎞밖에 안 되는 지점에서
낙랑군이라는 묘지명이 발견되었다는 사실은,
낙랑군이 북경인근이라는 가능성을 강하게 증언하는 것이다.
중공 사학계의 충격이 너무도 컸던 것인가,
엉뚱한 기록을 가져와 낙랑군 사람이 북경에 매장될 수 있는 논리를 개발한다.
즉 북위 태무제가 서쪽으로 귀환하는 기록이 있었는데,
그때 한국 평양 근처 낙랑군에 거주하던 북위사람들을
거의 강제적으로 이주시켰다는 이야기다.
다음 기록 어디에도 한국 평양이 등장하지 않는다.
독자 여러분이 직접 판단하시기 바란다.
詔平東將軍賀多羅攻文通帶方太守慕容玄於猴固,
撫軍大將軍 永昌王健攻建德, 驃騎大將軍 樂平王丕攻冀陽 皆拔之.
虜獲生口 班賜將士各有差. 九月乙卯 車駕西還.
徙營丘, 成周, 遼東, 樂浪, 帶方, 玄菟 六郡民三萬家于幽州, 開倉以賑之。
조서를 내려 평동장군 하다라(賀多羅)에게는
猴固(후고)에 있는 문통(북연의 왕인 풍홍)의 대방태수 慕容玄(모용현)을 공격하게 하고,
무군대장군 영창왕 健(건)에게는 建德(건덕)을,
표기대장군 낙평왕 丕(비)에게는 冀陽(기양)을 공격하게 하니 모두 함락하였다.
사로잡은 포로들을 장수와 병사들에게 차등 있게 나누어 주었다.
9월 을묘일, 황제의 수레가 서쪽(수도 평성)으로 돌아갔다.
영구·성주·요동·낙랑·대방·현도 6개 군의 백성 3만 호를
幽州(유주)로 이주시키고, 창고를 열어 그들을 진휼하였다.
위의 북위 황제는 탁발도를 말한다.
이 북위라는 나라는 산서성 代(대)를 기반으로 성장한 나라인데,
위 예문을 보더라도 산서성과 하북성 일부까지도 일시적으로 차지할 수 있던 나라이다.
훗날 사마씨의 晉(진)나라를 양자강 남쪽으로 밀어내어
東晉(동진)으로 쪼그려뜨린 선비족의 나라이다.
이 나라가 동위·서위, 다시 북제·북주로 분렬되었다 통일된 나라가 隋(수)다.
즉 북위(훗날 성씨를 원으로 바꾸어 원위라고도 함)라는 나라는
고구리 서쪽에 있었기 때문에 평양과는 전혀 인연이 있을 수 없는 나라라는 사실이다.
더구나 “지명이 같다고 언제나 같은 곳일까?
수도 한성은 세 곳”이라는 2월 6일자 글에서 밝혔듯이,
그 북한의 평양은 실제로 漢城(한성)이었음이
성터에서 발굴된 석각으로 확실하게 증명되었다.
결정적 단서를 하나 더 추가하자면,
낙랑군과 평양은 이웃하였더라도,
낙랑이 평양이었다는 기록은 읽은 적이 없다.
다음 회에는 사서의 기록을 더욱 깊이 탐구하여
낙랑군과 고구리 수도의 실체에 더 다가가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