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 제목부터 낯설다.
『도깨비의 춤』. 사랑도 자연도 아니다. 육근철 시인은 ‘양자’를 시의 중심에 놓았다.
독자에게 친절하지 않은 선택이다. 그는 그 불친절함을 조금도 변명하지 않는다.
“독자를 이해시키기 위해 쓴 시집이 아닙니다.” 그의 말은 단호하다. 이 시집은 설명을 포기한 책이 아니라, 이해라는 태도 자체를 내려놓으라고 요구하는 책이다.
육근철은 우리가 이미 양자 시대에 살고 있다고 말한다.
보이지 않지만 작동하는 세계, 불연속과 이중성이 공존하는 시대. 그는 그 세계를 설명하려 들지 않는다.
대신 시로 그려보고, 노래해 보고, 끝까지 견뎌보려 한다.
과학자 출신 시인이라는 이력은 그의 시를 쉽게 오해하게 만든다.
“양자가 지식 그 자체처럼 보인다면, 그건 잘못된 관측입니다.”
그의 시에 등장하는 양자는 징검다리이고 도깨비이며 물수제비이고 아이돌의 춤이다. 지식이 아니라 비유다. 비유를 통해서만 닿을 수 있는 세계가 있다고 그는 믿는다.
『도깨비의 춤』을 읽다 보면 독자는 자주 멈춘다. 연속성이 끊기고 설명이 없다. 그는 이 구조를 의도했다고 말한다.
“양자의 세계를 이해하려는 것 자체가 잘못입니다.”
사랑을 이해하려 하지 않듯, 예술을 이해하려 하지 않듯, 이 시집 역시 받아들이는 것이 먼저라는 것이다.
육근철은 21세기의 문장을 이렇게 바꿔 말한다.
“나는 관측한다, 고로 얽힌다.”
시는 생각의 결과가 아니라 관측의 흔적이라는 선언이다.
그의 시 형식은 넉 줄이다.
10년 넘게 고수해 온 이 형식에 대해 그는 ‘불연속의 건축’이라고 설명한다. 네 층의 건물은 이어져 있지만, 그 안의 사람들은 각기 다른 삶을 산다. 한 문장을 줄바꿈한 것이 아니라, 각 연이 떨어져 있으면서 하나의 주제를 둘러싼다. 짧고 단순하지만 감각적인 시대. 그는 이를 “양자시대의 리듬”이라고 부른다.
도깨비는 이 시집의 상징이다. 나이 든 세대에게 도깨비는 두려움의 대상이지만, 아이들에게는 신비롭고 귀여운 존재다.
시집 제목을 ‘불연속의 춤’에서 ‘도깨비의 춤’으로 바꾼 것도 손녀와의 대화 끝에 나온 결정이었다. 그는 말한다.
“입자인 듯 파동이고, 파동인 듯 입자인 양자의 본성이 바로 도깨비입니다.”
아이돌의 춤, 힙합과 팝핑, 탈춤까지 그의 시에 함께 등장하는 이유다. 이 시집은 분명 젊은 독자를 의식하고 있다.
육 시인은 자신을 경계에 선 관측자라고 말한다. 과학과 시의 경계, 문과 이과의 경계. 그는 문리(文理)의 본래 뜻을 다시 꺼낸다. “사물의 이치를 깨닫는 힘.” 물리를 공부한 시인이 필요한 이유다. 그에게 애매함은 결핍이 아니라 시대적 조건이다.
이 시집은 위로하지 않는다. 대신 긴장을 준다. 그는 시가 언제나 따뜻해야 한다는 통념을 거부한다. “시는 때로 송곳처럼 후벼 파야 합니다.” 시인은 신과 인간을 잇는 구름다리 같은 존재라는 그의 말에는 시의 역할에 대한 오래된 책임감이 담겨 있다.
“이해하려 하지 마라.” 이 문장은 경고라기보다 호소에 가깝다. 세상은 이미 바뀌었고, 이해의 언어로는 따라갈 수 없다는 고백이다. 그의 몸은 늙고 병들었지만, 사유는 멈추지 않는다. 445평 독락원 농장에서 그는 나무와 꽃, 바람과 돌거북의 말을 관측한다.
“나는 그들이 하는 말을 받아 적을 뿐입니다.”
목련이 털모자를 벗으려는 순간을 그는 시로 남긴다.
『도깨비의 춤』은 친절한 책이 아니다. 호불호가 분명하다. 그는 그 결과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자비 출판이라는 선택도 감수했다.
“바둑의 포석처럼, 언젠가 쓰일 날이 있겠지요.”
지금 읽히지 않아도 괜찮다. 10년 뒤 누군가
“아, 이런 시인도 있었구나”라고 말해준다면 충분하다고 그는 말한다.
육근철은 끝으로 이렇게 말한다.
“세상 모든 걸 이해하려 하지 마세요. 죽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까. 사랑을 이해할 수 있습니까.” 이해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태도는 삶에서도 유효하다고 그는 믿는다.
『도깨비의 춤』은 바로 그 태도를 연습하는 시집이다. 이해의 시대가 끝난 자리에서, 관측과 얽힘으로 살아가려는 한 시인의 조용하지만 단단한 선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