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돈 교수의 좌충우돌 성경신학[1] - 밧모 섬 유배 생활, ‘불금’보다 뜨거웠던 ‘부활 일요일’의 추억

"에덴의 추방과 밧모의 유배 사이"… 결핍의 끝에서 터져 나온 ‘가난의 소리’

안식일과 주일은 엄연히 ‘다른 날’… 사도 요한이 노년의 고립 속에서도 날짜를 센 이유

"영적 침체는 예고 없이 오지 않는다"… 요한계시록이 약속한 ‘일곱 가지 복’을 선점하라

박상돈 교수 | 합동총회신학교 성경신학

 

요한계시록을 묵상하던 어느 날, 문득 시 한 구절이 떠올랐습니다. 청년 시절 읽었던 시집에 담긴 내용입니다. 지금은 시인도, 시집 이름도 전혀 기억나지 않습니다. 그렇게 까맣게 망각 저편에 있었던 글귀가 번쩍이듯 생각났습니다. 정말 뜬금없는 상황 아닙니까? 묵상한답시고 요한계시록을 펼쳐놓았습니다. 잠시 눈을 감고 어떻게 방향을 잡아야 옳을지 점검해봅니다. 그런데 그야말로 느닷없이 그 구절이 떠올랐습니다. 

 

"쨍그랑,
 창세에 울린 가난의 소리"

 

아마도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아담과 하와 이야기였나 봅니다. 동산을 나온 두 사람이 어떻게 살았는지 잘 알지 않습니까? 그들이 가슴에 품은 희망 사항은 무엇이었겠습니까? 그들이 뜨겁게 살아간 사랑이 가난의 소리인가 봅니다. 아담과 하와가 낳은 두 아들을 보십시오. 가인과 아벨, 그 이름 의미를 살펴보십시오. 가인은 여호와로 인해 득남했다는 뜻입니다. 또한 아벨은 허무, 혹은 의미 없음을 뜻합니다. 그러니 그 이름에는 목마름과 배고픈 결핍이 녹아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을 살피며 사도 요한이 선 자리가 새삼스럽습니다. 요한은 지중해에 있는 돌 많은 밧모 섬에 유배되었습니다. 그래선지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아담과 하와 그림자가 어른거립니다. 물론 에덴 동산 추방과 밧모 섬 유배는 의미하는 바가 전혀 다릅니다. 하지만 삶의 자리에서 옮겨진 상황 자체는 유사성을 지녔습니다. 따라서 추방이건 유배건 그 자리가 지닌 빈곤은 정말 닮아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아담과 하와는 어떻게 살았습니까? 죽도록 땀 흘려야 먹을 양식을 구할 수 있습니다. 비록 추방이라고는 하나 생존 가능성은 열려 있습니다. 게다가 팔팔한 청춘 그 자체 아닙니까? 

 

반면 사도 요한은 어떻습니까? 어느새 나이는 팔십을 훌쩍 넘어 구십 언저리에 다가와 있습니다. 늙고 쇠한 육신이란 장막을 떠올려보십시오. 살아도 산 것 같지 않은 그 몸을 이끌고 밧모 섬에 내쳐졌습니다. 섬이란 본시 그 어디든 바람과 파도가 끊이질 않습니다. 그런 섬으로 던져진 요한 사도가 살아낼 시간을 보십시오.

 

요한계시록은 그 갑갑함을 전혀 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애써 우리가 찾아야 알 수 있는 환경입니다. 그 대신에 사도 요한은 다른 말을 합니다. 교회와 친숙하지 않으면 정말 낯선 단어가 등장합니다. "계시(啓示)"란 말은 어떻습니까(계 1:1)? 그리고 "주의 날"은 또 어떻습니까(계 1:10)? 그중 제가 주목한 단어는 "주의 날"입니다. "주의 날"은 어떤 이들이 말하는 "안식일"과 같은 뜻이 아닙니다. "주의 날", 곧 주일은 안식일과 전혀 다른 날입니다.

 

거듭 말하는데 주일과 안식일은 전혀 개념이 다릅니다. 알아듣기 쉽게 말하면 주일은 일요일, 안식일은 토요일입니다. 그러니 같은 날도 아니며 의미 전환은 더더군다나 아닙니다. 강조하자면 주일은 주일이고 안식일은 안식일일 뿐입니다. 주일은 신약 예배와 필연적 관계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루신 구원 사역을 보십시오. 구원을 설명할 때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 고난이 핵심입니다. 예수님은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달려 운명하셨습니다. 금요일 해가 질 무렵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서둘러 십자가에 달린 이들을 내렸습니다. 예수님은 아리마대 요셉이 마련한 무덤에 장사했습니다(마 27:61). 그리고 제삼일, 곧 안식일 다음 날에 부활하셨습니다.

 

"안식일이 다 지나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갔더니"(마 28:1)

 

예수님이 "주의 날", 곧 주일에 부활하셨습니다. 그 후 주일은 신약교회에서 예배와 연관된 날로 인식되었습니다. 자, 문제는 밧모 섬에서 주의 날은 어떤가입니다. 솔직히 유배지에서 보내는 나날은 달라질 게 없는 일상이지 않습니까? 그날이 그날 같은 지루한 일상에서 주의 날을 예리하게 구별합니다. 주일을 의식함은 그가 무엇에 초점을 맞추고 사는지를 보여줍니다. 당연하지만 주일을 잊지 않는 그가 예배를 의식하지 않았겠습니까? 주일을 기억함은 오직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코로나19 상황을 통과하며 예배 의식이 해이해졌다고들 합니다. 느슨해진 틈을 타 ‘탈 교회 현상’도 나타납니다. 심지어 가속화되었다고 진단하는 교회 성장학자들도 있습니다. 그래서랄까, 오늘따라 더욱 사도 요한이 사모한 예배가 그립습니다. 주의 날을 가려내며 어떻게든 하나님 앞에 선 요한을 보십시오. 영적 침체는 어느 날 갑자기 닥치는 법이 없습니다. 그야말로 서서히 무너짐이 영적 침체입니다. 그래서 경계하고 조심해야 하는데, 정말 쉽지 않습니다.

 

요한계시록을 읽고 묵상하며 쉽지 않은 신앙 언어에 놀랍니다. 그래서 단어 하나하나에 신경을 곤두세우곤 합니다. 그러다 보니 전체를 보기보다는 부분에 집착하기 일쑤입니다. 어떤 분은 제게 요한계시록을 읽을 때 난독증을 조심하라고 합니다. 그만큼 요한계시록은 읽기가 부담스러운 책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요한계시록을 읽는 자에게 주실 복, 곧 상급을 꼭 기대하십시오. 예수님은 요한계시록에서 자그마치 일곱 차례나 복을 말씀했습니다. 그 약속하신 복을 하나하나 모두 챙기셨으면 좋겠습니다.

 

 

 

작성 2026.02.25 13:30 수정 2026.02.25 1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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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