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NN의 보도에 따르면, 미국 대사관이 서안지구 유대인 정착촌인 에프라트에서 최초로 영사 업무를 제공하기로 했다. 이번 조치는 정착촌을 평화의 장애물로 간주해 온 기존의 미국 외교 원칙에서 벗어나 정착촌의 정당성을 인정하는 행보로 해석된다. 이스라엘 측은 이를 역사적 결정이라며 반기고 있으나, 팔레스타인과 국제 사회는 이 조치가 사실상 영토 합병을 공식화하는 위험한 선례가 될 것이라며 강력히 비판하고 있다. 또한, 이스라엘의 영토 확장을 지지하는 주이스라엘 미국 대사의 강경한 발언이 전해지면서 중동 지역 내 긴장감과 국제법 위반 논란은 더욱 심화되는 양상이다.
행정 서비스라는 이름의 외교적 파격, ‘2개 국가 해법’의 장례식인가 새로운 질서의 서막인가
지도는 선(線)으로 이루어지지만, 역사는 발자국으로 쓰인다. 수십 년간 국제 사회가 ‘분쟁의 땅’이라 부르며 접근을 꺼렸던 서안지구(West Bank) 유대인 정착촌에 최근 낯선, 그러나 매우 익숙한 깃발이 꽂혔다. 주이스라엘 미국 대사관이 정착촌 내부에서 공식 영사 업무를 시작한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단순한 여권 갱신을 위한 행정 편의일지 모르나, 중동의 거대한 화약고 위에서 이 발걸음은 평화의 문법을 근본적으로 뒤흔드는 거대한 파열음이다. ‘불법 점령지’라는 수식어가 ‘정상적인 행정 구역’으로 치환되는 이 미묘한 순간, 우리는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가공된 현실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중동의 심장부에서 벌어지는 이 ‘조용한 합병’의 드라마를 깊은 통찰의 시각으로 추적한다.
행정의 옷을 입은 정치적 결단
미국 대사관의 이번 행보는 지극히 사무적인 ‘Freedom 250 이니셔티브’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었다. 2026년 2월을 기점으로 미국 대사관은 예루살렘 남부의 에프랏(Efrat) 정착촌을 방문해 미국 시민권자들을 대상으로 여권 발급 및 영사 서비스를 제공했다. 대사관 측은 향후 팔레스타인 행정 수도인 라말라와 유대인 정착촌 베이타르 일리트 등지에서도 유사한 순회 업무를 진행할 것이라 밝혔다. 표면적으로는 ‘다양한 지역 거주민을 위한 서비스 확대’를 내세웠지만, 그 이면에는 서안지구 정착촌을 이스라엘의 실효적 지배 영역으로 공인하겠다는 의도가 짙게 깔려 있다. 이는 수십 년간 정착촌을 ‘평화의 장애물’로 규정해온 국제사회의 금기를 행정적 편의라는 명분으로 무너뜨리는 고도의 전략적 선택이다.
수십 년 외교 원칙의 파기
이 사건의 핵심은 미국이 오랫동안 고수해 온 ‘2개 국가 해법’과의 결별이다. 과거 트럼프 1기 행정부 시절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은 "정착촌 건설이 국제법에 위반되지 않는다"라는 폭탄선언으로 길을 닦았다. 이번 영사 서비스는 그 선언을 현장에서 구체화한 실무적 마침표에 가깝다. 이스라엘 외무부는 이를 "역사적 결정"이라 환호하며, 이 지역을 ‘점령지’ 대신 ‘유대와 사마리아(Judea and Samaria)’라는 성경적 이름으로 부르며 영유권을 노골화하고 있다. 반면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 등 자치 정부 측은 "미국이 단계적 합병을 정상화하고 있다"며 강력히 반발한다. 워싱턴의 수뇌부가 ‘합병 반대’를 외치는 사이, 현장의 대사관은 이미 ‘합병의 길’을 닦고 있는 형국이다.
확장주의와 인지적 부조화의 충돌
최근 마이크 헉커비 주이스라엘 미국 대사의 발언은 이러한 긴장에 기름을 부었다. 그는 인터뷰에서 이스라엘의 영토 확장을 두고 "그들이 전부를 차지해도 괜찮다"라는 식의 파격적인 사견을 내비쳐 아랍권의 분노를 자아냈다. 비록 공식 정책이 아니라고 수습했지만, 현장 사령관의 이러한 태도는 대사관의 행보와 맞물려 미국의 진의를 의심케 한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공식적으로 합병을 승인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대사관이 정착촌 깊숙이 들어간 것은 ‘기정사실화’ 전략의 전형이다. 이미 현장에서 사실로 굳어진 정책을 나중에 정치적으로 승인받는 방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