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다고 말하는 자들의 눈먼 진실
요한복음 9장은 단순한 치유 사건을 넘어선다. 맹인이 눈을 뜬 사건은 이야기의 시작일 뿐, 본질은 그 이후에 벌어지는 ‘심문’과 ‘대립’에 있다. 24절 이후의 장면은 이미 기적을 경험한 사람보다, 그 기적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의 반응에 초점을 맞춘다.
바리새인들은 맹인이 예수로 인해 눈을 떴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들은 이미 결론을 정해두었다. 예수는 죄인이라는 전제를 깔고 심문을 이어간다. 여기서 드러나는 것은 단순한 불신이 아니라 ‘확신의 교만’이다.
이 본문은 오늘 우리에게 묻는다. 과연 누가 보고 있는가. 신앙을 오래 했다는 이유로, 교리를 안다는 이유로, 직분을 가졌다는 이유로 우리는 스스로를 ‘본다’고 단정하지 않는가. 요한복음은 그 확신을 정면으로 흔든다.
24절에서 바리새인들은 다시 맹인을 불러 말한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우리는 이 사람이 죄인인 줄 아노라.” 이 문장은 이미 판결을 내려놓은 자의 언어다. 질문이 아니라 압박이다.
종교 권력은 체제를 위협하는 존재를 두려워한다. 예수는 안식일에 병을 고쳤고, 율법의 틀을 넘어섰다. 그 행위 자체가 권위 구조를 흔들었다. 맹인의 치유는 단순한 개인의 회복이 아니라 종교적 통제에 대한 도전이었다.
오늘 교회 역시 안전한 틀을 지키는 데 급급할 때가 있다. 새로운 해석, 새로운 고백, 새로운 경험을 경계한다. 그러나 본문은 묻는다. 혹시 우리가 지키려는 것은 진리가 아니라 체면은 아닌가.
맹인의 답변은 단순하다.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맹인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
이 고백에는 신학적 체계도, 교리적 정교함도 없다. 그러나 분명한 체험이 있다. 그는 논쟁에서 이기려 하지 않는다. 다만 자신이 경험한 변화를 증언한다.
신앙은 종종 복잡해진다. 설명은 많지만 고백은 빈약하다. 그러나 요한복음 9장은 ‘한 가지 아는 것’의 힘을 보여준다. 하나님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해도, 그분이 나를 어떻게 변화시켰는지는 말할 수 있다.
이 장면은 오늘의 교회에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이론으로 말하는가, 체험으로 말하는가. 진리를 소유하려 하는가, 아니면 만난 분을 증언하는가.
결국 그는 회당에서 쫓겨난다. 출교는 당시 사회에서 공동체와의 단절을 의미했다. 생계와 관계, 정체성이 모두 흔들리는 결정이었다.
그러나 바로 그때 예수는 다시 그를 찾아온다. “네가 인자를 믿느냐”라는 질문 앞에서 그는 묻는다.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 그리고 예수를 주로 고백한다.
흥미로운 점은 육체의 눈이 열린 이후에야 영적 눈이 완전히 열렸다는 사실이다. 그는 처음에는 예수를 ‘그 사람’이라 불렀고, 이후에는 ‘선지자’라 했다. 그리고 마침내 ‘주’라 고백한다.
신앙은 점진적이다. 그러나 그 마지막 단계는 결단을 요구한다. 안전한 울타리를 떠날 때, 비로소 참된 만남이 시작된다.
예수는 선언한다. “나는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이 말씀은 단순한 역설이 아니다. 영적 교만에 대한 경고다. 바리새인들은 묻는다. “우리도 맹인인가.” 예수는 답한다. “보지 못하였다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
무지는 겸손으로 이어질 수 있다. 그러나 확신은 때로 회개의 길을 막는다.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는 순간, 더 이상 빛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된다.
오늘 우리는 정보를 넘치게 가진 시대에 산다. 성경 지식, 신학 자료, 설교 콘텐츠가 풍부하다. 그러나 지식이 곧 시력은 아니다. 오히려 더 많이 알수록, 더 많이 본다고 착각할 위험이 있다.
요한복음 9장 24-41절은 단순히 과거 종교 지도자들의 실패를 기록한 본문이 아니다. 이는 오늘 교회를 향한 거울이다.
맹인은 자신이 보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빛을 받아들였다. 바리새인들은 스스로 본다고 확신했다. 그래서 빛을 거부했다.
결국 영적 시력의 출발점은 겸손이다. 나는 모른다고, 나는 아직 보지 못한다고 인정하는 자리에서 비로소 참된 만남이 시작된다.
우리는 과연 보고 있는가. 아니면 본다고 말하며 눈을 감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