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주 한 편의 칼럼을 읽고 오랫동안 생각에 잠겼다. 아동·청소년문학평론가이자 현직 초등학교 교장이 쓴 글, 이충일의 「더 나은 삶을 위한 문해력」(창비주간논평, 2026.3.10.)이었다. 그 글은 중요한 사실 하나를 환기시킨다. 지금 우리 교육이 놓치고 있는 것은 기술이 아니라 문해력이라는 점이다.
1995년 5월 31일, 한국 교육은 일대 전환점을 맞았다. 창의성과 다양성을 내세운 '5·31 교육개혁'. 이것은 이후 30년간 우리 교육정책의 기본 틀로 작동해왔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또 다른 전환점에 서 있다. 인공지능 시대에 걸맞은 교육체제. 이를 요구하는 목소리는 더 이상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 되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교육은 리셋할 수 있는 시스템이 아니다. 그것은 축적된 실패 위에서만 갱신되는 과정이다. 이 점을 외면한 채 또 다른 변화를 서두르는 것은 어쩌면 우리 교육개혁이 반복해온 구조적 오류일지도 모른다.
이충일이 분석한 미국 '알트 스쿨'의 실패는 그 사실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인공지능 기반 개인화 교육이라는 이름 아래 미래학교를 자처했던 이 실험은, 실리콘밸리의 자본과 기술이 결합된 이상향처럼 보였다. 그러나 결과는 달랐다. 학생들의 읽고 쓰는 능력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고,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배움 역시 형성되지 않았다. 이 실패는 기술의 한계를 넘어, 교육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되묻게 한다.
문해력은 단순한 읽기 능력이 아니다. 문장을 읽는다는 것은 맥락을 이해하고 보이지 않는 전제를 추론하며 타자의 시선을 상상하는 일이다. 이 과정은 단순히 정보를 수신하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 안에 존재하는 다른 삶과 접촉하는 경험이다. 그 접촉이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반복될 때, 인간은 자신과 다른 세계를 낯설어하지 않고 이해하려는 태도를 가진다. 문해력이 공감능력과 연결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결국 문해력은 인간이 세계를 이해하고 타자와 관계 맺는 방식 전체를 구성하는 능력이다.
그렇다면 지금의 AI·디지털 교육 정책은 이러한 관점을 충분히 반영하고 있는가. 디지털 교과서, AI 튜터, 코딩 교육 확대와 같은 정책 자체를 문제 삼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그 정책들이 전제하고 있는 인간상이다. 더 빠르게 정보를 처리하고 더 효율적으로 결과를 산출하는 인간. 그러나 이러한 설계 위에서 우리가 지향하는 삶과 인간은 과연 가능할 것인가. 이 질문이 빠진 채 기술만을 앞세우는 교육은 방향을 잃을 수밖에 없다.
최근 정부의 '독서국가' 선언도 이러한 위기를 감지한 대응으로 보인다. 그러나 독서를 강조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할 수 없다. AI가 일상화된 환경에서 독서의 양을 늘리는 일은 오히려 '가짜 독서'를 확산시킬 위험이 있다. 가짜 독서란 텍스트를 통과하되, 텍스트와 '대결'하지 않는 독서다. 요약된 줄거리만을 읽거나 AI가 정리한 핵심 문장을 확인하는 일에만 진심인 아이들이 교실에 가득하다. 이 모든 것은 독서의 형식은 갖추고 있지만, 독서의 본질인 '저항과 이해의 긴장'은 경험하지 못하게 한다. 독서가 또 하나의 경쟁 지표로 환원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권장 도서 목록을 완독하는 것이 성취가 되고 독서량이 스펙이 되는 순간, 독서는 문해력을 기르는 과정이 아니라 그것을 우회하는 수단으로 전락하는 것은 시간문제다.
문제는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 기술 도입을 늦출 것인가의 문제가 아니라 그 기술을 해석하고 판단할 수 있는 인간을 어떻게 길러낼 것인가의 문제다. 텍스트를 읽고 질문하는 경험, 서로 다른 해석이 충돌하는 토론, 자신의 생각을 언어로 구성하는 글쓰기. 이 과정이 교육의 주변이 아니라 중심에 놓일 때, 기술은 비로소 교육의 쓸모있는 도구가 될 것이다.
결국 교육개혁의 질문은 하나로 수렴된다. 우리는 어떤 인간을 길러내고자 하는가. 이 질문 없이 설계된 정책은 아무리 정교하더라도 길을 잃는다. 그 길의 방향을 가리키는 나침반은 문해력이어야 한다. 문해력이 빠진 교육개혁은 개혁이 아니다.
[이진서]
고석규비평문학관 관장
제6회 코스미안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