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감정을 전하는 데 서툴렀던 시간을 지나, 캔버스 위에 타인을 향한 다정한 미소를 새겨 넣는 작가가 있다. The Imaginary Pocus가 [창간특집기획연재] 아티스트 아카이브 시리즈로 만난 열여덟 번째 주인공은 ‘동행’을 사랑한 아티스트 시각예술가 쏘냐 작가이다. 스스로를 거창한 예술가이기보다 "신발 위에 기억과 관계를 그리는 작가"로 여기는 그녀의 따뜻한 이야기를 곁에서 따라가며 듣고 기록하는 시간을 가져본다.

속도보다 마음의 ‘방향’을 묻는 작가의 철학
그녀의 예술은 거창한 결심이 아니라 내면의 작은 빈자리에서 조용히 싹텄다. 과거 인간관계에서 겪었던 상실감과 보호받지 못하는 연약한 존재들을 향한 깊은 안타까움이 창작의 출발점이 되었다. 붓을 들면서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은 달라졌다.
사물과 생명을 철저히 분리하던 과거와 달리 모든 것에 고유한 이야기가 깃들어 있음을 깨달은 작가는 "속도보다 방향을, 소비보다 관계를 바라보게 되었습니다"라고 고백한다. 남들보다 빨리 도달하는 것보다 누구와 걷는지를 인생의 중심에 두게 된 것이다. 그녀를 움직이는 가장 강력한 원동력 역시 "예술의 진정성은 도구에 있지 않고, 마음의 방향에 있다"는 확고한 철학이다.
무심하게 바라본 ‘신발’에서 발견한 동행의 관계
그녀의 작품 세계를 꿰뚫는 핵심어는 단연 ‘동행’이다. 이 사유가 탄생한 계기는 지극히 평범한 일상의 한순간이었다. 어느 날 현관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가족들의 여러 켤레 신발을 바라보던 그녀는, 그것이 단순한 물건이 아님을 직감했다.
누군가는 땀 흘려 일터에 다녀오고, 누군가는 친구를 만났으며, 또 누군가는 긴 시간을 묵묵히 걷다 돌아온 서로 다른 하루의 궤적이 그곳에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그날 이후 작가에게 신발은 "방향을 품고 있고, 기억을 담고 있으며, 관계의 흔적을 고스란히 안고 있는 오브제"로 재탄생했다. 누군가와 함께 걷고 버텨낸 조용한 동행의 상징을 캔버스 위 하나의 세계로 빚어낸 것이다.
상상 속 존재들에게 내어준 ‘지켜야 할 자리’
그녀의 캔버스 속 신발 위에는 강아지나 고양이, 기니피그 같은 작고 연약한 동물들뿐만 아니라, 때로는 상상 속 생명체들이 함께 머문다. 이는 거대한 세상 속에서 제대로 된 보호 없이 무심히 잊히거나 가볍게 다루어지는 생명들을 대변하는 상징이다. 이들에게 안전한 안식처를 내어주는 것이야말로 그녀 작업의 본질이다.
작가는 "쉽게 소비되는 것들 위에 ‘지켜야 할 자리’를 만들어주고 싶은 마음"으로 빈 화면을 다정하게 채워 나간다. 관객들이 이 고요한 장면을 마주하며 "작은 쉼표처럼, 잠시 멈춰 숨 고르는 시간"을 갖고, 일상에서 놓치기 쉬운 생명과 관계의 가치를 찬찬히 되돌아보길 바라는 의도가 담겨 있다.
캔버스가 숨 쉴 때까지 견디는 ‘치열한 기다림’
하나의 화폭이 완성되기까지 작가는 철저한 관찰자가 된다. 이태원이나 홍대 거리에서 사람들의 독특한 신발을 유심히 관찰하고 핀터레스트 등에서 시각적 영감을 수집한다. 이후 디지털 기기로 구도를 치밀하게 조율하지만, 캔버스 위에 감정을 부여하는 것은 붓과 물감의 몫이다. 과도한 묘사보다 여백의 상징성을 유지하고, 몽환적이면서 따뜻한 색채로 공존의 메시지를 담아낸다.
매체의 한계에 부딪힐 때마다 그녀는 "기술을 더하는 대신, 관찰과 사유의 시간을 늘립니다"라고 말한다. 무엇보다 어깨와 허리가 굳어가는 통증을 견디며 "관계가 억지로 보이지 않고, 화면이 스스로 숨 쉬는 느낌이 들 때까지 기다리는 것. 그 기다림과 집중이 저에게는 가장 치열한 노동입니다"라고 담담히 밝히며 자신만의 확고한 작업 방식을 설명한다.

예술이 세상과 연결되던 첫 순간의 기억
작가가 직업적 예술가로서의 책임감을 단단히 다지게 된 경력은 대학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생애 첫 외주 작업으로 무려 '부산 아시아경기대회' 캘린더 일러스트라는 국가적 규모의 스포츠 행사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최종 일러스트레이터 단 한 명으로 발탁된 학생 쏘냐는 단순히 집에서 그림만 그려 넘기지 않았다. 외주를 맡긴 회사에 일정 기간 상주하며 그림을 그리기도 했고 실제 현장에서 디자이너들과 소통하며 작업을 진행했던 경험은 그녀에게 작업에 대한 진지한 태도와 책임감을 가르쳐 주었다.
작가는 "그때의 경험은 ‘내가 정말 그림으로 세상과 연결될 수 있구나’라는 확신을 처음으로 갖게 해준 순간이었다"라고 회고한다. 이 확신을 바탕으로 현재 작가는 일상적인 오브제 '신발'을 통해 기억과 관계에 대한 서사를 깊이 있게 풀어내고 있다. 현재 동물 캐릭터가 등장하는 '입양 시리즈'를 비롯해 다양한 상징을 담은 작품 세계를 꾸준히 확장하는 중이며, 국내외 굵직한 전시와 아트페어, 협업 프로젝트에 활발히 참여하며 대중과의 접점을 넓혀가고 있다.
잊지 못할 세 가지 기억, 햄버거, 핑크빛, 수호견에 담아낸 세 점의 대표작
쏘냐 작가의 사유는 구체적인 세 점의 대표작을 통해 한층 선명해진다.
첫 번째 작품 ‘미니’는 작가가 실제로 반려했던 기니피그를 기리며 탄생했다. 패스트푸드의 상징인 햄버거와 운동화가 결합된 형태 위에 작은 생명을 올려, "우리가 음식처럼 쉽게 소비하는 것들이 있는 반면, 생명은 결코 그렇게 가볍게 소비되거나 다루어져서는 안 된다"는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두 번째 작품 ‘핑크’는 지인의 가슴 아픈 사연에서 출발했다. 깊이 사랑했지만 피치 못할 사정으로 파양해야 했던 친구의 러시안 블루 고양이를 모티브로 삼았다. 작가는 작품 속 핑크색을 단순한 색이 아닌 '감정의 온도'로 정의했다. 심리적 안정감을 주며 공격성을 낮추고 마음을 부드럽게 감싸는 색인 핑크빛을 화면 가득 채워, "이별 이후에도 남아 있는 사랑과, 그 사랑이 지닌 따뜻한 힘"을 감동적으로 그려냈다.
마지막 세 번째 작품 ‘삽살이’는 천연기념물 제368호 토종견을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예로부터 액운을 쫓는 수호견으로 불려 온 상징성을 담아, 오랜 세월 우리 민족의 곁을 지키고 독도를 수호해 온 삽살개를 통해 우리가 잊지 않고 지켜내야 할 역사와 문화에 대한 마음을 화폭에 당당히 담아냈다.
AI 시대, 기술이 대체할 수 없는 ‘인간다움’
인공지능이 눈 깜짝할 사이에 화려하고 정교한 이미지를 쏟아내는 시대지만, 작가는 인간의 상상력이 지닌 대체 불가한 가치를 단호하게 믿는다. 기술은 많은 것을 만들어낼 수 있는 수단일 뿐, "어떤 이야기를 담을지, 어떤 감정을 표현할지는 결국 사람의 마음과 상상에서 시작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일상적인 운동화를 햄버거로 둔갑시키고 그 위에 잊힌 생명들의 안식처를 세우는 직관은 상상력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녀는 "상상이야말로 기술로는 완전히 대체될 수 없는 인간만의 힘"이라고 짚어내며, 예술의 본질이 결국 인간다움에 있음을 강조한다.

갤러리를 벗어나 누군가의 하루와 ‘걷는 예술’
쏘냐 작가의 그림은 정적인 갤러리의 하얀 벽면에만 조용히 머무르기를 거부한다. 앞으로도 신발을 매개로 한 깊이 있는 회화 작업을 지속하면서, 패션 등 다채로운 분야와의 적극적인 협업을 통해 대중의 삶 속으로 깊숙이 스며들고 싶어 한다.
"그림이 벽에 걸린 작품으로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하루와 함께 걷는 형태가 되길 바랍니다"라는 소망은 그녀의 지향점을 명확히 보여준다. 작가가 빚어낸 따뜻한 위로의 이야기들이 옷, 가방, 굿즈 등에 담겨 일상 속에서 더 가까이 동행하는 것이 그녀가 그리는 계획이다.
“방향을 잃지 마세요. 속도는 늦어도 괜찮습니다”
자신의 삶이 고유한 예술이 되는 순간을 아직 찾지 못해 방황하는 이들에게 작가는 응원을 건넨다. "거창한 시작이 아니어도 괜찮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좋아하는 것 하나를 오래 바라보는 일에서 예술은 시작된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진정으로 눈이 가고 마음이 머무는 것을 놓지 않을 때 비로소 자신만의 단단한 언어가 탄생한다는 조언이다.
인터뷰를 마치며, 무한 경쟁 속에서 남들과 보폭을 맞추느라 숨 가쁘게 뛰어온 우리 모두에게 그녀가 남긴 마지막 당부는 아주 깊은 여운을 남긴다. "방향을 잃지 마세요. 속도는 늦어도 괜찮습니다." 작가의 이 꾸밈없는 속 깊은 말은, 앞만 보며 달려가느라 지치고 상처받은 현대인들의 어깨를 가만히 토닥이는 가장 힘이 되는 응원이다.
[아티스트 소개: 쏘냐 (SONYA)]
대학 시절 '부산 아시아경기대회' 캘린더 일러스트 작가로 발탁되어 세상과 예술로 연결되는 벅찬 경험을 한 후 창작의 길에 확신을 얻었다. 관계 속에서 겪은 상실과 보호받지 못하는 연약한 존재들에 대한 안타까움을 바탕으로 붓을 든 그녀는 스스로를 ‘신발 위에 기억과 관계를 그리는 작가’로 칭한다. 일상적인 사물인 신발을 단순한 물건이 아닌 ‘누군가와 함께 걸어온 시간과 기억이 담긴 흔적’으로 정의하며, 그 위에 작고 잊히기 쉬운 생명들이 머무는 안식처를 그려내어 보호와 공존을 이야기하는 독창적인 회화 세계를 구축했다. 현재 동물 캐릭터가 등장하는 ‘입양 시리즈’를 비롯해 다채로운 상징과 서사를 담은 작품들로 국내외 전시와 아트페어, 협업 프로젝트 등에서 꾸준히 활동을 전개 중이다. 맹목적인 속도보다 ‘관계’와 조용한 ‘동행’의 가치를 전하며 지친 현대인들의 삶에 작은 쉼표를 건네는 메신저로서 세상과 소통하고 있다.
[The Pocus Archive: 아티스트 아카이브 – OO을 사랑한 아티스트]
AI가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리는 시대에도 변하지 않는 가치는 결국 인간의 마음과 상상의 힘에 있다. 본지 The Imaginary Pocus는 창간을 맞이하여 기술만으로는 흉내 낼 수 없는 인간 고유의 감성과 상상 세계를 지켜가는 예술가들을 조명하는 연재 시리즈 [OO을 사랑한 아티스트]를 선보인다. The Pocus Archive는 앞으로도 자신만의 가치를 사랑하며 자신의 원하는 미래를 실현하는 아티스트들을 엄선하여 기록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