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모컨 속 기묘한 동거, 생존과 인간다움의 경계
퇴근 후 텔레비전 리모컨을 돌리다 보면 묘한 모순과 마주하게 된다. 한 홈쇼핑 채널에서는 사람을 정교하게 본뜬 인공지능 쇼호스트가 쉬지도 않고 유창하게 물건을 판다. 반면 다른 채널에서는 공영 교육방송 사장이 등장해 인공지능은 위기가 아니라 새로운 도약을 위한 기회라고 힘주어 말한다.
방송 산업 전체가 생사의 기로에 놓였다고 토로하는 엄중한 자리에서 나온 역설적 낙관이다. 인공지능이 언젠가 내 일자리를 빼앗을지 모른다는 묵직한 불안감을 안고 사는 평범한 시청자 입장에서, 이 낙관과 위기감의 기묘한 동거는 선뜻 소화하기 어렵다.
이질적인 두 풍경이 던지는 메시지는 명확하다. 방송 제작 현장의 인공지능 도입은 이제 거스를 수 없는 거대한 파도가 되었다. 지금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분명하다. 효율성의 이면에 끝까지 남겨두어야 할 인간의 몫은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대기획부터 평생교육까지, 전면 도입된 EBS AI 퍼스트 전략
EBS는 내년 봄 개편을 기점으로 새로운 도전을 시작한다. 콘텐츠 기획부터 제작 전 과정에 인공지능 기술을 전면 도입하겠다고 선언했다. 이른바 EBS AI 퍼스트 전략이다. 첨단 기술을 활용한 대형 기획 제작과 AI와 인간다움에 주목한 평생교육 강화가 핵심 축이다.
동서양 명저 백 권을 다루는 대형 역사 기획이 대표적이다. 애덤 스미스 같은 역사적 사상가들을 인공지능 영상과 음성으로 정교하게 되살렸다.이들이 시청자에게 직접 자신의 저서를 강의하는 듯한 파격적인 연출을 선보인다. 주요 위인들을 인공지능 인형극으로 구현하는 역사 프로그램도 준비 중이다. 방송사 측은 이 과정에서 제작비를 삼십 퍼센트 이상 대폭 줄였다고 설명한다.
단, 기술 중심주의에 매몰되는 것은 경계하고 있다. 기계가 결코 대신할 수 없는 깊은 사유와 감수성을 기르기 위해, 어린이 철학 토론이나 부모를 위한 성교육 다큐멘터리 같은 평생교육 프로그램도 전면에 내세웠다.
풍전등화의 수신료 공영방송 EBS, 냉정한 생존 셈법
이러한 방송사의 파격적인 기술적 시도를 미래를 향한 이상주의로만 해석할 수는 없다. 그 이면에는 수신료 공영방송 EBS가 처한 구조적이고 가혹한 재정 현실이 깊게 뿌리내려 있다. 수십 년째 이어진 수신료 동결과 최근의 수신료 분리징수 논란을 겪고 있다.
여기에 매체 다변화로 인한 전반적인 광고 시장의 위축까지 겹치며 공영방송의 재정 압박은 한계치에 달했다. 글로벌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의 블록버스터급 대작 한 편 제작비를 떠올려 보자. 이 금액이면 EBS가 일 년 동안 여섯 개 채널을 전부 운영하고도 남는다는 씁쓸한 비교마저 나오는 실정이다. 척박한 토양에서 수십억 원이 드는 거대한 세트를 짓고 배우를 동원해 장기 기획을 계속 찍어내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결국 예산 부족으로 멈춰 섰던 과거의 웰메이드 기획들을 부활시키기 위함이다. 인공지능의 힘을 빌려 저렴하면서도 화려하게 콘텐츠를 살려내겠다는 계산이다. 즉, 인공지능 전환은 시대를 선도하려는 단발성 이벤트가 아니다. 방송사의 명운을 걸고 선택한 가장 냉정하고 절박한 생존 전략이다.
AI 시대 일자리 불안 속, 옅어지는 검수와 책임의 무게
진짜 문제는 화려하게 그려진 이 청사진이 실제 제작 현장을 얼마나 견뎌낼 수 있는가에 있다. 기획을 주도하는 책임자들은 인공지능을 표현의 도구로만 쓸 뿐이라고 선을 긋는다. 내용에 대한 철저한 검수와 최종적인 책임은 최고 권위의 인간 전문가가 반드시 진다고 거듭 강조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재정 압박이 가중될수록 윗선의 요구는 달라진다. 현장에는 더 적은 인력과 예산으로 더 많은 인공지능 프로젝트를 빠르게 완성하라는 압력이 가해질 수밖에 없다. 자연스럽게 꼼꼼히 내용을 살펴야 할 검수 인력은 턱없이 부족해진다. 한 명의 담당 프로듀서가 여러 기획을 동시에 떠안으며 기계의 결과물을 대충 훑고 넘어가는 구조로 변질되기 쉽다.
이 단계에 이르면 전문가가 치밀하게 책임진다는 약속은 공허한 구호로 전락할 위험이 매우 크다. 무엇보다 AI 시대 일자리 불안이 팽배해진 우리 사회의 서늘한 정서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 최근 조사에 따르면 대학생 열 명 중 여덟 명 이상이 인공지능 기술 탓에 직업 안정성을 위협받는다고 느낀다. 국민 과반수가 기계의 노동 대체로 인한 일자리 양극화를 깊이 우려하고 있다.
이런 공기 속에서 경영진이 외치는 기회라는 구호는 상당히 공허하게 들린다. 현장에서 뛰는 노동자와 미래를 준비하는 청년 세대에게는 당장의 생존 위기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단기적으로는 기계의 힘을 빌려 저렴하고 그럴듯하게 만든 콘텐츠가 호평을 받을지 모른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조직 내부에 축적되어야 할 기획력과 제작 역량이 메말라버릴 수 있다는 점은 치명적인 잠재적 위험이다.
기회와 위기의 갈림길, 끝까지 남겨두어야 할 인간의 몫
결국 핵심은 최신 기술을 도입하느냐 마느냐의 납작한 기술적 찬반 논쟁이 아니다. 어떤 확고한 원칙 아래 이 기술을 통제하고 활용할 것인가 하는 철학과 제도의 문제다. 인공지능 대기획이 단순한 인건비 삭감의 명분으로 악용되어서는 안 된다.
공적 재원 논의 과정에서 이것이 진정한 공영 교육을 위한 필수 투자임을 사회적으로 인정받아야 한다. 방송사 내부적으로도 당장의 효율성에 매몰되지 않도록 중심을 잡아야 한다. 인공지능이 감히 대신할 수 없는 인간 고유의 직무 영역을 명확히 설정하고 강력하게 보호해야 한다.
나아가 시청자에게 콘텐츠 제작 과정의 인공지능 활용 범위를 밝히고, 인간의 윤리적 검증 과정을 투명하게 고지하는 신뢰 장치도 반드시 뒤따라야 한다. 새로운 기술이 공영방송에 진정한 기회로 자리 잡으려면 가벼운 성과를 자랑할 때가 아니다. 기계가 얼마나 많은 업무를 빠르고 저렴하게 대신 처리했는지 뽐내서는 안 된다.
치열한 자동화의 흐름 속에서도 책임, 윤리적 판단, 그리고 공감이라는 이름으로 끝까지 인간에게 남겨둔 몫이 무엇인지 집요하게 물어야 한다. 이 불편하고 묵직한 질문에 방송사가 얼마나 진정성 있게 답하느냐에 결과가 달렸다. 이번 혁신이 허울 좋은 일회성 슬로건에 그칠지, 아니면 미래 공영 미디어의 새로운 기준표가 될지가 바로 여기서 결정될 것이다.
[전문 용어 사전]
▪️수신료 분리징수: 오랫동안 전기요금과 합쳐서 일괄적으로 거두던 텔레비전 방송 수신료를 시청자가 개별적으로 따로 납부할 수 있도록 제도를 바꾼 조치. 최근 공영방송의 주요 재원이 급감하며 경영 위기를 초래하는 핵심 원인이다.
▪️AI 퍼스트 전략: 방송 프로그램의 기획, 제작, 편집 등 전 과정에 걸쳐 인공지능 기술을 가장 우선적으로 도입하는 방침. 이를 통해 제작 비용을 혁신적으로 줄이고 업무 효율을 극대화하려는 경영 및 제작 기조를 뜻한다.
▪️공영방송: 단순한 상업적 이익이나 시청률을 추구하지 않고, 공공의 이익 증진과 사회적 책임을 다하기 위해 운영되는 매체. 주로 국가나 공공단체의 지원(수신료 등)을 바탕으로 운영된다.
▪️OTT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 전파나 케이블을 통한 기존 방송과 달리, 인터넷 통신망을 통해 영화나 드라마 등 다양한 미디어 콘텐츠를 제공하는 플랫폼. 시청자가 원할 때 언제 어디서나 시청할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