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상 칼럼] 꿈서리

이태상

“날마다 늘 새롭게 선택하는 자만이 삶과 자유를 누릴 자격이 있다”

 

독일의 시성(詩聖) 괴테는 말했다. 현대 과학에서 최면에 대한 연구조사 끝에 발견한 사실은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우리 두뇌 컴퓨터에 입력되어 우리가 다 기억할 수 있으나 우리가 의식적으로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한다고. 

 

다시 말해 우리가 우리의 기억을 편집한다는 것이다. 공포심, 반감, 투쟁심 또는 사태의 압박감, 불안, 초조함 때문에 많은 기억들을 우리 의식에서 지워버린다는 것이다. 아마도 그래서 기억이라는 과정을 거친 것은 죄다 일종의 픽션이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역사와 문학이 같은 것이 되지 않을까. 

 

예부터 덧없는 인생의 무상함을 가리켜 인생은 일장춘몽이라 했다. 젊어서는 앞날에 대한 무지갯빛 꿈으로 부풀고 나이 들면 주마간산이듯 홱홱 지나쳐버린 일들이 꿈결만 같다. 그렇다면 젊어서는 꿈 많은 사람이, 나이 들어서는 추억 많은 사람이 진짜 부자가 아닐까. 또 그렇다면 종자씨 까먹기나 참외 서리보다 봄에 씨 많이 뿌려 무르익은 오곡백과 가을걷이가 훨씬 더 푸짐 느긋하게 신나고 보람이 있을 것 같다. 

 

우리가 밤에 자면서 꿈꾸는 동안은 꿈인 줄 미처 모르다가 잠에서 깨어날 때야 꿈이었음을 알게 되듯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는 순간 삶이 또한 꿈이었음을 알게 될는지 모를 일이다. 그러나 우리가 자면서 꿈꾸는 동안에도 더러 어렴풋이나마 모든 것이 한갓 꿈속의 일인 줄 알게 되는 수가 있는 것처럼 이 세상의 삶이 어떻든 간에 또한 꿈에 지나지 않음을 우리가 알 수 있을 것도 같다. 

 

그렇다고 할 것 같으면 우리가 살아 숨 쉬며 잠 깨어 꾸는 꿈이야말로 우리가 꿈속에서 꿈꾸는 꿈이 아닐는지 모른다. 또 누구든 자기가 꾸고 싶은 꿈만 꾸고 꾸기 싫은 꿈은 안 꿀 수 없을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어떤 꿈을 꿀 것이며 꾸는 꿈을 우리가 어떻게 풀이하느냐일 것이다. 흔히 우리가 꿈속에서 경험하는 다음과 같은 일들을 꿈 전문가들은 어떻게 해석하는지 알아보자. 

 

개미처럼 또는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죽어라 하고, 어떤 괴인이나 괴물로부터 도망치려 해도 손과 발이 말을 안 듣고, 몸이 조금도 앞으로 나가지지 않는 꿈은 직장이나 결혼이나 친우관계 등에 얽매여 벗어나고 싶어도 벗어날 수 없는 함정 또는 궁지에 빠져있는 느낌 때문이다. 높은 절벽에서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꿈은 자신의 체면 손상이나 사회적인 지위 상실을 걱정하는 까닭이며, 공중을 나는 꿈은 비약적인 성공이나 생활 향상을 희망하거나 세상의 온갖 근심과 걱정 다 떨쳐버리고 세속적인 일들로부터 초탈해 보고 싶은 염원에서 비롯한다고 한다. 

 

이따금 벌거벗은 꿈을 꾸게 되는 것은 우리의 거짓되고 위선적인 면이 드러나 우리의 적나라한 진상이 세상에 폭로될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고 시험문제를 앞에 놓고 그 가운데 가장 쉬운 문제 해답조차 머리에 떠오르지 않아 낑낑거리는 꿈은 일상생활에서 하찮은 일도 제대로 처리할 수 없다는 자신 결핍을 반영하는 것으로 풀이된다. 또 버스나 기차 배 비행기를 놓치는 꿈은 절호의 찬스를 놓칠까 봐 걱정하는 것이거나 갈 길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다고 착각하는 데서 발생한단다.

 

이러한 꿈 전문가들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꿈보다 해몽이 좋아야 한다는 말을 우리는 익히 들어왔다. 어디 그뿐인가.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우리 어머니나 다른 분들이 태몽을 꾸셨다고 하면서 여러 가지 태몽에 여러 가지 의미를 부여하시지 않았는가. 좀 더 생각해 보면 이 태몽이란 것도 태몽에서 시작해서 태몽으로 그치는 것 아니고 태생 전 태 교육으로부터 출발해서 태생 후 탯줄 아닌 탯줄로 이어지는 정신적 세뇌작업 또는 심리적 승화작용을 통해 꿈꾸듯 하는 삶의 꿈이 연면히 계속되는 것 같다. 그런즉 서리서리 꿈 서리하렷다. 

 

미국 작가 쥬나 반스(1892-1982)는 ‘죽음을 알게 허락받은 것이 삶’이라고 했다. 이 말은 언제일지는 미정이지만 조만간 우리 모두 죽는다는 사실을 의식함으로써 우리 삶을 더 잘 살 수 있다는 뜻인 것 같다. 죽는다는 사실 때문에 우리가 삶을 사랑할 수 있다는 말일 게다. 삶이 유한하기에 소중하지 않은가. 소풍이 끝나지 않고 계속된다고 하면 더 이상 소풍이 될 수 없지 않겠는가. 

 

로마의 서정시인 호레이스도 ‘한밤이 우리 모두를 기다리고 있다.’라고 읊지 않았나. 그래서 ‘티베트 사자의 서’같은 죽음에 대한 안내서가 있겠지만,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 죽음에 대한 것보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삶에 대한 것 아닐까. 미국 시인 새뮤엘 울만(1840-1924)의 다음과 같은 말들은 우리 모두에게 좋은 지표가 되리라.

 

“사람이 사람다워진다는 것은 고귀한 위엄 있게 생각과 느낌을 말하고 행동에 옮기는 것이다. 이런 품위를 가늠하는 것은 좌절감을 느낄 때라도 얼마나 호연지기를 갖느냐다. 청춘은 인생의 한 시기가 아니고 정신상태이다. 앵두 빛 뺨이나 붉은 입술 또는 유연한 무릎이 아니고 의지의 발로發露이고 상상의 날개이며 감정의 열정이다. 생명의 깊은 샘으로부터 치솟는 싱그러움이다. 아무도 나이를 먹는다고 늙지 않고 이상을 저버릴 때 늙기 시작한다. 

 

나이는 피부에 주름살을 만들지만 삶의 열정을 잃으면 영혼이 시든다. 너는 네가 갖는 자신감만큼 젊고 네가 갖는 공포심만큼 늙는다. 네가 갖는 희망만큼 젊고 네가 갖는 절망감만큼 늙는다. 모든 사람 가슴 속에는 녹음실이 있다.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과 희망과 용기의 환호성이 전달되는 한 너는 젊다. 삶의 의욕을 다 잃고 네 가슴이 비관과 냉소로 얼어붙는 날, 그때 비로소 너는 늙어버린 것이다.”

 

 

[이태상]

서울대학교 졸업

코리아타임즈 기자

합동통신사 해외부 기자

미국출판사 Prentice-Hall 한국/영국 대표

오랫동안 철학에 몰두하면서

신인류 ‘코스미안’사상 창시

이메일 :1230ts@gmail.com

 

작성 2026.03.28 09:46 수정 2026.03.28 1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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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