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헌식의 역사칼럼] 『난중일기』에 나타난 여러 종류의 오기

윤헌식

충무공 이순신은 임진왜란 시기 자신의 겪은 공적 또는 사적인 사건을 『난중일기』에 서술하였다. 『난중일기』는 충무공이 개인 자격으로 작성한 일기이므로 그 내용은 비교적 자유로운 문장 구조로 작성되었다. 예를 들어 자주 주어가 없는 문장을 서술하기도 하였으며, 목적어/서술어의 순서 또한 우리나라의 문장 구조(목적어+서술어)와 중국의 문장 구조(서술어+목적어)를 자유롭게 오갔다.

『난중일기』를 적을 때 사용된 한자의 서체 또한 자유로워서 해서체, 행서체, 초서체가 뒤섞여 난다. 이러한 까닭으로 어떤 문장은 이에 사용된 서체가 어느 쪽인지 모호하기도 하다.

『난중일기』는 자유로운 문장 구조와 서체로 적힌 만큼 종종 여러 종류의 오기도 발견된다. 아마 이러한 주제에 대해 불편하게 생각하는 분도 계실 듯하다. 우리나라에서 워낙 충무공을 완벽한 인격체의 인물로 생각하려는 경향이 있으므로 『난중일기』의 오기를 다루는 일이 하나의 금기처럼 느껴지기 때문일 것이다. 시중에 출간된 『난중일기』 번역서들을 살펴보면 『난중일기』의 오기를 제대로 다루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이 또한 비슷한 이유 때문일 수 있다.

 

국보 이순신의 『난중일기』 - 자료출처: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난중일기』에 나타난 오기를 다루는 일은, 충무공을 완벽한 인격을 가진 가상의 인물이 아니라 인간적인 모습을 가진 현실의 인물로서 올바로 이해하기 위한 시도로 이해하여 주셨으면 좋겠다. 이러한 오기를 제대로 밝혀놓지 않으면 결국에는 『난중일기』의 내용과 충무공에 대한 올바른 이해에 장애가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글에서 『난중일기』에 나타난 모든 오기를 다룰 수는 없다. 지면상의 이유도 있고, 필자 또한 『난중일기』에 나타난 모든 오기에 대해 알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기를 종류별로 나누어 몇 가지만 소개하고자 한다. 『난중일기』의 오기가 지닌 의미에 대해서는 부디 독자들께서 올바른 판단을 해주시기를 바란다.

(1) 단순한 착오에서 비롯된 오기

『난중일기』에는 단순한 착오로 인해 발생한 오기가 자주 발견된다. 대개는 구음이 같거나 의미가 같은 한자를 혼동하여 잘못 적은 사례들이다.

『난중일기』, 1592년 6월 2일

아침에 출발하여 곧장 당진(唐津) 앞 선창에 이르니 왜선 20여 척이 줄지어 정박해 있었다.

* '당진(唐津)’은 ‘당포(唐浦)’의 오기이다. 이날 일기는 당포해전 전투를 서술한 기록이다. 한자 '津'이 '浦'와 비슷한 의미를 지녔기 때문에 혼동하여 오기한 것으로 보인다.

『난중일기』, 1592년 8월 25일

삼천포 앞바다에 이르니 평산포만호(김축)가 공장(空狀)을 올렸다.

* ‘空狀’은 ‘公狀’을 잘못 쓴 것이다. 공장(公狀)은 지방의 수령 등이 상급 관리를 만날 때 보내는 문서를 말한다. 이는 정례화된 문서이므로 공문에 가까운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난중일기』, 1593년 2월 22일

두 승병장과 성 의병(성응지)을 제포(濟浦)로 보내어 상륙하는 척하게 하고 우도의 여러 장수들의 배에서 부실한 것을 골라 동쪽으로 보내어 상륙하는 척하게 하였다.

* ‘濟浦’는 ‘薺浦’의 오기이다. 이 기록은 1593년 초에 있었던 웅포해전 전투를 서술하였다.

『난중일기』, 1593년 6월 21일

새벽에 한산도(韓山島)의 망하응포로 진을 옮겼다.

* ‘韓山島’는 ‘閑山島’의 오기이다.

『난중일기』, 1594년 7월 1일

배응록이 원수(元師)가 있는 곳으로부터 들어왔다.

* ‘元師’는 ‘元帥’의 오기이다. 당시 도원수는 권율이다. 1597년 7월 7~8일 일기 등에도 같은 오기가 나타난다.

『난중일기』, 1594년 8월 6일

고성현령(조응도)와 사도첨사(김완), 적도가 함께 왔다가 갔다(固城及蛇渡赤島 幷來去).

* '적도(赤島)'는 이와 부합하는 관직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이와 유사한 ‘적량(赤梁)’의 오기로 판단된다. 즉, 적도는 적량만호의 오기이다. 1596년 7월 10일 일기에도 '적량'이 '적도'로 오기된 사례가 다시 나타난다.

『난중일기』, 1594년 11월 25일

하품과 기지개를 켜고 깨어나니 곧 한바탕 꿈이었다(欠身而覺 乃一夢也).

* ‘欠身’은 ‘몸을 굽힌다’라는 의미로서 문맥상 뜻이 통하지 않으므로 오기이다. 『이충무공전서』는 이를 '하품과 기지개'를 의미하는 ‘欠伸’으로 교정하였다.

『난중일기』, 1595년 1월 6일

어응린과 고성현감(固城縣監)이 왔다.

* 임진왜란 시기 고성의 수령은 현령이므로 '고성현감(固城縣監)'은 '고성현령(固城縣令)'의 오기이다.

『난중일기』, 1595년 6월 3일

아침에 남해현령의 급보에 “해평군 윤두수(尹斗壽)가 남해로부터 본영으로 건너간다.”고 하였는데 무슨 까닭인지 모르겠다.

* '윤두수(尹斗壽)'는 '윤근수(尹根壽)'의 오기이다. 해평군은 윤근수의 작호로서, 『선조실록』 등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윤근수는 남부지방에 있었고 윤두수는 해주에서 중전을 호위하고 있었다. 윤두수와 윤근수 형제를 혼동하여 발생한 오기로 보인다.

『난중일기』, 1596년 4월 10일

조붕이 와서 만났는데 그 모습을 보니 오랫동안 당학(唐虐)을 앓아서 외모가 아주 수척하였다.

* ‘唐虐’은 ‘唐瘧’의 오기이다. 임진왜란 시기 여러 기록에 의하면 1596년에 당학이 퍼져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선조수정실록』에 따르면 병에 걸린 사람은 이틀 간격으로 앓았으며 이를 당학으로 불렀다고 하며, 병이 중국으로부터 유래되었기 때문에 이러한 이름으로 불렸다. 이틀 간격으로 앓았다는 기록에 근거하여 이 병을 말라리아로 보는 견해도 있다.

『난중일기』, 1597년 4월 4일

오산의 황천상의 집에 이르러 점심을 먹었다(到吾山黃天祥家㸃心).

* '吾山'은 '烏山'의 오기이다. 오희문의 『쇄미록』의 기록에 따르면 황천상은 오희문과 친척관계로서 거처는 진위였다. 진위는 오산과 인접한 지역이다.

『난중일기』, 1597년 4월 22일

판관(전주판관)이 유둔(油屯), 생강 등의 물건을 보냈다.

* ‘油屯’의 바른 표기는 ‘油芚’이다. 비록 ‘油屯’은 여러 조선시대 문헌에서 가끔 용례가 발견되지만, 사실상 오기로 보아야 할 것 같다. 유둔은 기름을 먹인 종이나 목면포를 겹쳐 만든 것으로서 비옷 등을 제작할 때 사용되었다.

『난중일기』, 1597년 7월 20일

오시(11~1시)경에 진주 정개산성(定介山城) 아래 강가의 정자에 이르니 진주목사가 와서 만났다.

* ‘定介山城’은 ‘정개산성(鼎蓋山城)’의 오기이다. 지금의 경남 하동군 옥종면의 두양리와 종화리에 걸쳐 있는 정개산에 있었으며, 1596년 체찰사 이원익의 명에 의해 진주목사 나정언이 쌓았다.

(2) 인물 이름의 오기

『난중일기』에 상당히 많이 등장하는 종류의 오기이다. 충무공이 사람 이름을 적을 때 그 이름의 한자를 정확히 모르는 경우 임의의 한자로 표기하여 생긴 오기로 보인다. 이를 가차(假借)라고 말하는 분도 계시지만, 가차는 '어떤 뜻이나 음을 나타내는 글자가 없을 때 뜻이나 음이 같은(또는 비슷한) 다른 글자를 빌려 쓰는 방법'이다. 다른 사람의 이름을 잘못 썼으면(알고 했든 모르고 했든) 그것은 오기로 보는 것이 옳다.

『난중일기』, 1593년 2월 16일

정 재상(송강 정철)이 사은사가 되어 명나라에 간다.”라는 소식을 들었기에 노비단자를 정원명(鄭元明)에게 보냈는데 그것을 사은사 행차에게 전해주도록 일러서 보냈다.

* ‘鄭元明’은 ‘鄭元溟’의 오기이다. 정원명은 송강 정철의 조카로서 그의 이름은 해당 가문(영일정씨)의 족보에서 확인된다. 정원명의 이름은 『난중일기』 이후의 기록에 여러 차례 등장하는데, 충무공이 나중에 그의 이름을 제대로 확인했기 때문인지 뒷부분 일기에는 ‘鄭元溟’으로 제대로 기록되어 있다.

* 송강 정철은 평양과 개성 수복에 대하여 명나라에 사례를 하기 위해 1593년 1월 11일경 명나라고 가는 사은사로 임명되었다. 당시 명나라로 가는 사신 일행이 사용할 여비는 관례에 의하여 각 도의 감사, 병사, 수사, 수령들이 보내주는 물품으로 충당되었다. 노비단자(路費單字)는 그 물품들의 목록을 적은 문서이다.

『난중일기』, 1593년 2월 19일

(적량만호) 고여우(高汝友)와 (감목관) 이효가도 와서 만났다.

* 고여우의 이름은 『난중일기』에 여러 차례 ‘高汝友’로 기록되었지만, 이는 ‘高汝雨’의 오기로 생각된다. 왜냐하면 「만력11년계미9월초3일별시방목」, 『선조실록』 기사, 이원(李黿, ?~1504)의 『재사당일집』, 이유간(李惟侃, 1550~1634)의 『우곡일기』 등의 여러 기록에 '高汝雨'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들 기록에서 그가 만호나 첨사를 지낸 이력도 확인된다.

『난중일기』, 1593년 5월 12일

저녁에 (소비포권관) 이영남과 윤동구가 와서 만나고 고성현령 조응도(趙應道)도 와서 만났다.

* ‘趙應道’는 ‘趙凝道’의 오기이다. 그는 제1차 진주성전투, 제2차 당항포해전 등에 참전하였으며 1597년 3월 기문포에서 일본군과 싸우다 전사하였다.

『난중일기』, 1593년 8월 17일

제만춘(齊萬春)을 불러와 진술을 받아 보니 매우 분한 이야기가 많았다.

* ‘齊萬春’은 ‘諸萬春’의 오기이다. 제만춘은 1592년 9월에 일본으로 포로로 잡혀갔다가 탈출해온 경상우수영 소속의 군관이다. 『임진장초』에 그가 일본에서 겪었던 일 등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으며, 일본측 자료인 『와카사카기(脇坂記)』에도 제만춘으로 추정되는 조선 수군 장수가 포로가 되었다가 탈출해서 돌아갔다는 기록이 있다.

『난중일기』, 1594년 8월 25일

아침에 하천수(河千守)에게 계본을 주어 내보냈다.

* ‘河千守’는 ‘河千壽’의 오기이다. 하천수의 이름은 『선무원종공신녹권』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난중일기』에 등장하는 이름들 가운데 상당수는 『선무원종공신녹권』에서도 발견되므로 이 자료와 비교하여 그 이름의 오기 여부를 검토할 수 있다.

『난중일기』, 1594년 9월 10일

김경숙(金敬叔)이 창신도로 돌아갔다.

* '김경숙(金敬叔)'은 '김경로(金敬老)'의 오기로 생각된다. 같은 달 8일과 9일 일기에 김경로가 등장하고, 『난중일기』에 김경숙이라는 이름이 이날 이외에는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경숙’은 김경로의 이름 경로(敬老)와 자 성숙(惺叔)을 혼동한 때문인 듯하다.

『난중일기』, 1594년 11월 13일

신 첨지(신호)와 아들 회와 이희남, 김숙현이 본영으로 가고 종 한경도 은진의 김정휘(金廷輝)의 집으로 가도록 하였다.

* '김정휘(金廷輝)'는 '김정휘(金挺輝)'의 오기로 생각된다. 충무공의 장남 이회의 장인 김정휘(金挺輝)의 고향이 은진이며, 『난중일기』에 김정휘가 은진 사람이라는 내용이 나오기 때문이다. 이회가 1595년에 혼례를 올렸으므로 일기의 내용은 혼례 준비와 관련된 것 같다.

『난중일기』, 1595년 6월 24일

기성백의 아들 징헌이 그의 서숙부 경충과 왔다(奇誠伯子澄憲 與其庶叔景忠來.).

* ‘성백(誠伯)’은 ‘성백(成伯)’의 오기로서 남해현령 기효근의 6촌인 기경인(奇敬仁)의 자이다. 또한 '징헌(澄憲)'과 '경충(景忠)'은 각각 ‘징헌(徵獻)’과 ‘경충(敬忠)’의 오기이다. 이들의 이름과 자는 모두 『행주기씨족보(幸州奇氏族譜)』에서 확인된다. 충무공이 이들을 만난 이후 『난중일기』에 임의의 한자로 이들의 이름을 적은 듯하다. 흥미롭게도 이날 일기의 기록은 『행주기씨족보』의 정확성을 입증한다.

『난중일기』, 1595년 6월 30일

문어공(文語恭)이 날삼을 사기 위하여 나가고 이상록도 돌아갔다.

* '문어공(文語恭)'은 '문어공(文於公)’의 오기이다. 문어공(文於公)의 이름은 1596년 일기에도 등장하며, 『선무원종공신녹권』에서도 발견된다.

『난중일기』, 1595년 8월 21일

경수(전라우수사 이억기의 자)와 언경(경상우수사 권준의 자), 자윤(조방장 박종남의 자), 언심에게 편지를 썼다(裁簡于景受及彦卿子胤彦深䖏).

* 이은상은 『이충무공전서』의 번역 시에 ‘언심(彦深)’을 조방장 신호의 자인 ‘彦源’의 오기로 보았다. 일기에 나열된 장수들의 이름으로 보아 ‘彦深’이 조방장 신호를 가리키는 것이 옳다고 생각된다. 신호의 무과급제 방목에 따르면 처음에 그의 자는 ‘深源’이었다. 아마도 일기에 기록된 ‘彦深’은 신호의 처음 자인 '深源'과 나중의 자인 '彦源'을 혼동했기 때문인 것 같다.

『난중일기』, 1596년 윤8월 18일

종사관 김용(金俑)이 서울로 올라갔다.

* ‘金俑’은 ‘金涌’의 오기이다. 이날 일기는 충무공이 도체찰사 이원익 일행과 전라도를 순행할 때의 기록으로서, 『선조실록』에서 당시 김용이 도체찰사 이원익의 종사관이었음이 확인된다. 김용은 학봉 김성일(金誠一, 1538~1593)의 조카이다.


『난중일기』, 1597년 4월 27일

저녁에 정원명의 집에 이르니 원수(권율)이 내가 온 것을 알고는 군관 권승경(權承慶)을 보내어 조문하고 또한 안부도 물었는데 위로하는 말이 매우 간곡하였다.

* ‘權承慶’은 권율의 조카이자 그의 막하에서 활동한 ‘권승경(權升慶)’의 오기이다. 권승경은 행주대첩에 참전한 인물이다.

『난중일기』, 1597년 6월 10일

원수(권율)의 종사관(황여일)이 삼척 사람 홍연해(洪漣海)를 보내어 안부를 물었는데 “늦게 만나러 오려고 한다.”라고 하였다. 홍연해는 바로 홍견(임치첨사)의 3촌 조카이다.

* ‘洪漣海’는 ‘홍연해(洪㶌海)’의 오기이다. 『남양홍씨세보』에서도 그가 홍견 동생의 아들임을 확인할 수 있다.

『난중일기』, 1598년 10월 2일

제포만호 주의수, 사량만호 김성옥(金聲玉), 해남현감 유형, 진도군수 선의문, 강진현감 송상보(宋尙甫)는 탄환에 맞았으나 죽지는 않았다.

* ‘金聲玉’은 ‘金成玉’의 오기이며, ‘宋尙甫’는 ‘宋商甫’의 오기이다. 김성옥은 당포해전 등에 참전하였고, 송상보는 행주대첩 등에 참전한 인물이다. 이날 일기는 왜교성 전투 상황을 서술한 기록이다.

(3) 『난중일기』의 한자를 잘못 보아 오류가 발생한 사례

아래는 충무공이 『난중일기』에 오기를 적은 사례가 아니라, 『이충무공전서』 편찬자들이 『난중일기』의 한자를 제대로 읽어내지 못하여 오류가 발생한 사례이다.

『난중일기』, 1595년 1월 16일

또한 “신임 충청수사 이계훈(李繼勛)의 배에서 불이 났다.”라고 하여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 '이계훈(李繼勛)'은 '이계정(李繼鄭)'의 오기이다. 이계정의 이름은 『선조실록』과 무과방목 에도 전한다. 『난중일기』 가운데 1595년 일기는 『이충무공전서』로만 전해지는데, 『이충무공전서』 편찬자들이 이계정의 이름을 잘못 본 것으로 생각된다.

『난중일기』, 1595년 11월 2일

곤양군수 이수일(李守一)이 와서 만났다.

* 『곤양군읍지』의 「읍선생」에 의하면 1595년 당시의 곤양군수는 '이극일(李克一)'이다. 따라서 '이수일(李守一)'은 『이충무공전서』가 발간될 때 착오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단, 충무공이 오기했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

『난중일기』, 1597년 4월 23일

저물녘에 임실현으로 들어가니 고을 원이 의례적으로 대접하였다. 원은 홍순각(洪純慤)이었다.

* 홍순각의 이름은 『임실읍지』의 「선생안」과 조응록의 『죽계일기』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충무공전서』는 홍순각의 이름을 '홍언순(洪彦純)'으로 오기하였다.

(4) 『난중일기』 번역자들이 착각한 사례

『난중일기』 번역서들이 그 내용이나 글자를 착각하여 잘못 설명한 사례가 있다. 이는 지적이 필요한 문제이다.

『난중일기』, 1592년 5월 2일

겸삼도순변사(兼三道巡邊使)의 공문과 우수사(이억기)의 공문이 왔다.

* 많은 『난중일기』 번역서들이 겸삼도순변사를 이일(李鎰)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심지어 이를 오기라고 설명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선조실록』, 『선조수정실록』, 『임진장초』의 기록 등을 살펴보면 당시 이일의 관직은 순변사(巡邊使) 또는 경상도순변사(慶尙道巡邊使)였으며, 신립(申砬)의 관직이 도순변사(都巡邊使) 또는 삼도순변사(三道巡邊使)로 나타나고 있으므로 해당 인물은 신립으로 보는 것이 옳다.

『난중일기』, 1596년 윤8월 7일

아침에 아산의 종 향시(向是)가 들어왔는데

* 『난중일기』 번역서들이 대체로 '향시(向是)'의 이름을 ‘백시(白是)’로 서술하고 있는데, 이에 비해 『이충무공전서』에 수록된 『난중일기』에는 이 이름이 ‘향시(向是)’로 표기되어 있다. 충무공의 『난중일기』 친필본에 쓰인 이 이름의 '向'을 다른 날짜의 일기에 쓰인 ‘向’ 및 ‘白’과 비교해보면 ‘向’임을 알 수 있다.

『난중일기』, 1596년 윤8월 11일

체찰사(이원익)의 분부를 받기 위해(待候) 출발하여 당포에 이르렀는데

* ‘待候’는 ‘윗사람의 명령을 기다리다’라는 의미이다. 일부 『난중일기』 번역서들이 이를 '侍候'로 서술하였지만, 충무공의 『난중일기』 친필본에 쓰인 글자를 살펴보면 ‘待候’가 옳다.

『난중일기』, 1597년 4월 21일

임달영이 “곡식을 사기 위하여 배로 사진포(思津浦)에 왔다.”라고 하였지만, 그 동기가 아주 거짓되었다.

* 많은 『난중일기』 번역서들이 '사진포(思津浦)'를 ‘恩津浦(은진포)’로 서술하고 있다. 이에 비해 『이충무공전서』에 수록된 『난중일기』에는 이 지명이 ‘사진포(思津浦)’로 서술되어 있다. 충무공의 『난중일기』 친필본에 쓰인 한자를 검토하면 '思津浦'가 옳은 표기이다. 지명의 음가로 보아 조선시대 은진현에 있었던 포구인 시진포(市津浦)나 사진(私津)을 ‘思津浦’로 적은 것으로 추정된다.

『난중일기』, 1597년 8월 4일

고산현감 최철강(崔鉄剛)이 군인들을 병사(이복남)에게 넘겨주기 위하여

* 이은상이 최철강의 이름을 '최진강(崔鎭剛)'으로 잘못 서술한 이후 많은 번역서들이 이 오류를 답습하였다. 2018에 출판된 『난중일기』 번역서(박종평, 글항아리)는 기존 번역서들이 이 이름의 한자를 잘못 보았을 가능성을 제기하였다. 이 번역서는 『선조실록』과 조응록의 『죽계일기』에 고산현감의 이름이 '최철강(崔鐵剛)'으로 기록된 점을 그 근거로 제시하였다. 충무공의 『난중일기』 친필본에 적힌 최철강의 이름을 살펴보면, 그 가운데 글자는 ‘鎭’이 아닌 '鉄'이다. '鉄'은 '鐵'의 약자임과 동시에 초서체자이다. 한자 '鉄'과 ‘鎭’의 초서체가 매우 비슷한 까닭으로 이러한 착오가 발생한 것이다.

[참고자료]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한국고전종합DB, 이원(李黿)의 『재사당일집(再思堂逸集)』 권2, 「부록(附錄)」-「행록(行錄)」

한국사총설DB, 이유간(李惟侃)의 『우곡일기(愚谷日記)』, 1610년 5월 7일

한국사총설DB, 조응록(趙應祿)의 『죽계일기(竹溪日記)』

이은상 역주, 『국역이충무공전서』, 1960, 충무공기념사업회

박종평 옮김, 『난중일기』, 2018, 글항아리

 

 

[윤헌식]

칼럼니스트

이순신전략연구소 선임연구원

저서 : 역사 자료로 보는 난중일기

이메일 : thehand8@hanmail.net

 

작성 2026.04.03 10:44 수정 2026.04.03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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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