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도시의 이름은 '평화의 터전'이다. 그러나 평화는 단 한 번도 없었다
세상에는 이름과 현실이 이토록 잔인하게 어긋나는 도시가 없다. 히브리어로 '평화의 마을'을 뜻하는 예루살렘(Jerusalem). 그러나 그 이름 안에 새겨진 평화라는 두 글자는, 수천 년 역사 속에서 단 한 순간도 온전히 실현된 적이 없다. 그 도시의 공기 속에는 유대인들의 통곡 소리와 무슬림들의 아잔(기도 소리)이 뒤섞이고, 총성과 시편이 같은 하늘 아래 울려 퍼진다. 세 개의 거대한 믿음이 태어난 요람이자, 그 믿음들이 서로를 향해 칼끝을 겨누는 가장 치열한 전선이다. 그리고 그 분쟁의 중심에는, 정복도, 석유도, 이념도 아닌, 단 하나의 '바위'가 있다.
모든 분쟁의 시작점: 그 바위 하나
성전산(Temple Mount), 혹은 이슬람이 '알 하람 알 샤리프(Haram al-Sharif)', 즉, '고귀한 성소'라 부르는 그 광장 한가운데, 수백 년 된 건축물 아래 드러난 거친 석회암 바위가 하나 있다. 크지도 웅장하지도 않다. 보는 이에 따라서는 그저 오래된 돌덩이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바위는 단순한 돌이 아니다. 그것은 전 세계 수십억 인구의 영혼과 연결된 신경이며, 인류의 절반이 자신의 신앙과 존재의 근원으로 여기는 곳이다. 이 바위를 건드리는 것은 곧 그들의 심장을 건드리는 것이다. 두 개의 거대한 신앙이, 두 개의 거대한 역사가, 바로 이 한 지점에서 서로를 밀어내며 겹치기 때문이다.
유대인의 2,000년 기다림: "성전이 돌아올 그 자리"
유대인에게 이 바위는 단순한 암석이 아니다. 히브리어로 '에벤 하-슈티야(Even HaShetiyah)', 곧, '세상의 기초가 되는 돌'이다. 그들의 믿음 속에서 이 바위는 신이 세상을 창조할 때 그 중심을 잡기 위해 놓은 주춧돌이다. 더 나아가, 이곳은 '모리아 산(Mount Moriah)'이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믿음의 제물로 바치려 했던 바로 그 장소이며(창세기 22장), 솔로몬왕이 최초의 성전을 세웠던 터이다. 그 성전은 바벨론에 의해 한 차례 무너졌고, 스룹바벨과 헤롯 대왕의 손을 거쳐 제2 성전으로 재건됐다. 그러나, 서기 70년, 로마 제국의 군대가 이 두 번째 성전마저 불태우고 허물었다. 비타협적인 유대 민족에게 교훈을 남기려 했던 로마군은 단 하나의 서쪽 벽만을 남겨두었다. 그것이 오늘날 유대인들이 이마를 대고 어깨를 들썩이며 기도하는 '통곡의 벽(Wailing Wall)'이다.
그들이 2,000년간, 이 벽 앞에서 흘린 눈물은 과거에 대한 것만이 아니다. 그것은 '미래'를 향한 기도다. 유대 신앙의 고백 속에서, 메시아가 오시는 그날, 이 바위 터 위에는 반드시 제3의 성전이 세워져야 한다. 이 바위는 유대 민족에게 2,000년간의 기다림의 이유이자, 모든 것이 회복될 마지막 희망의 땅이다. 그들에게 이 바위를 포기하라는 것은 역사와 미래와 신앙 그 자체를 포기하라는 말과 같다.
무슬림들의 거룩한 발자국: "이슬람의 예언자가 하늘로 오른 바위"
그런데 지금 그 바위 위에는, 유대인의 성전이 아닌 눈부신 황금 돔(Dome of the Rock)이 서 있다. 이슬람 신앙에 따르면, 무슬림들의 예언자 무함마드는 어느 날 밤 메카에서 천사 가브리엘이 이끄는 신비한 말을 타고 예루살렘까지 날아왔다. 이를 '알-이스라(Al-Isra)', 즉, 야간 여행이라 한다. 그리고 바로 이 바위를 발판 삼아 일곱 하늘을 거쳐 신의 어전에 나아갔다 돌아왔다는 것이다. 이를 '알-미라지(Al-Miraj)', 즉, 승천이라 부른다.
전 세계 19억에 달하는 무슬림들에게 예루살렘은 메카와 메디나에 이은 세 번째 성지다. 그리고, 알아끄사(Al-Aqsa), 즉, '가장 멀리 떨어진 사원'은 그 성지의 심장이다. AD 691년, 우마이야 왕조의 칼리프는 이 바위의 신성함을 기리기 위해 거대한 황금 돔을 세웠다. 오늘날 그 황금 돔은 전 세계 무슬림에게 이슬람 문명의 영광을 상징하는 표식이다. 무슬림들에게 이 바위를 내어주라는 것은, 선지자의 기적을 부정하고 신앙의 근간을 뿌리째 흔들라는 말과 다름없다.
제로섬 전쟁: 한쪽이 얻으면 다른 쪽은 모든 것을 잃는다
이것이 예루살렘 문제의 본질이다. 이것은 영토 분쟁이 아니다. 정치적 갈등도 아니다. 두 개의 절대 진리가 한 평의 땅 위에서 충돌하는, 신학적이고 영적인 전쟁이다. 한쪽은 그 바위 터가 '비어 있어야 한다'라고 믿는다. 다른 한쪽은 그 바위 위에 세워진 돔이 '영원히 지켜져야 한다'라고 믿는다. 이 두 믿음 사이에는 타협의 여지가 없다. 이 바위는 나눌 수 없다. 그래서 이 땅에는 분쟁의 피가 마를 날이 없었다.
역사가 그 잔혹함을 증언한다. 1990년 이스라엘 극우 단체가 성전산에 유대교 성전 재건을 선포하면서 충돌이 본격화됐다. 2021년 5월 이스라엘 경찰의 무력 진압은 이른바 '11일 전쟁'의 도화선이 됐다. 2023년 4월에는 이스라엘 극우 국가안보 장관 이타마르 벤그비르가 알아끄사가 자리한 동예루살렘을 강행 방문했고, 이스라엘군은 경내에 있던 무슬림 약 350명을 강제로 잡아 가뒀다. 그리고, 2023년 10월 7일, 하마스는 작전명을 '알아끄사의 홍수'라 명명하고 이스라엘을 기습했다. 민간인 1,200여 명이 목숨을 잃고 260여 명이 납치됐으며, 이스라엘의 보복 공습은 가자지구 건물의 80%를 폐허로 만들었다. 2026년 4월 현재 팔레스타인 사망자는 5만 5,000명을 넘어섰다.
현재, 알아끄사 모스크의 관리권은 1994년 이스라엘-요르단 평화협정에 따라 요르단의 이슬람 종교기관 '와크프(Waqf)'가 쥐고 있다. 비무슬림의 입장은 특정 시간대에 허용되지만, 경내에서의 기도는 오직 무슬림들에게만 허락된다. 이 '불완전한 현상 유지' 구도가 양측 모두에게 영속적인 불만을 남기며 분쟁의 씨앗을 키워왔다.
기독교가 던지는 혁명적 질문: "제3의 길은 있나"
여기서 기독교는 전혀 다른 목소리를 낸다. 사실 이 두 거대한 목소리에 묻혀버린, 또 하나의 목소리가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가르치셨고, 이 도시에서 십자가에 달리셨으며, 이 도시에서 부활하셨다. 그러나 그분은 이 바위와 건물을 향한 인간의 집착에 대해 가장 혁명적인 선언을 하셨다.
"이 성전을 허물라. 내가 사흘 만에 일으키리라." (요한복음 2:19)
사람들은 그가 돌로 지은 건물을 말하는 줄 알았다. 그러나, 그는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셨다. 초대교회의 첫 순교자 스데반은 이 진리를 깨달았기에, 돌에 맞아 숨을 거두면서도 이렇게 외쳤다.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사도행전 7:48) 사도 베드로는 믿는 자들을 '살아있는 돌(Living Stones)'이라 불렀으며, 우리가 모여 신령한 집으로 세워져 간다고 선포했다(베드로전서 2:5).
그러므로, 기독교가 제시하는 '복음'의 핵심은 하나님이 더는 예루살렘의 그 차가운 바위 위에, 혹은 황금 돔 아래에 거하시지 않는다는 선포다. 참된 성전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몸이 되었고, 이제 그를 믿는 자들의 마음이 거룩한 처소가 되었다. 이것은 유대교와 이슬람 모두가 그 신성한 바위를 사이에 놓고 싸우는 동안, 복음이 선포하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해답이다.
한 인간의 고백: 통곡의 벽 앞에서
나는 중동 지역을 오랜 기간 지켜본, 한 사람으로서 조용히 말하고 싶다. 중동을 오가며 이 땅의 숨결을 직접 맡았다. 통곡의 벽에 이마를 대고 흐느끼던 노인 유대인의 떨리는 어깨를 보았다. 라마단의 새벽, 알아끄사 앞마당에 무릎을 꿇고 엎드린 수천 명의 무슬림들의 기도 소리도 들었다. 그들 각각의 눈물은 진짜였고, 그들 각각의 기도는 모두 진심이었다. 그것이 지금도 내 가슴을 이렇게 묵직하게 짓누른다.
나는 기독교인으로서 그 땅을 사랑한다. 예수님의 발이 닿았던 땅이기 때문만이 아니다. 이 땅이 깊은 아픔 속에 있기 때문이다. 어느 편의 총알이 날아가든, 맞는 건 언제나 사람이다. 그들은 모두 어느 누군가의 자녀이고, 어느 누군가의 어머니, 아버지, 동생이고 형이다. 그 사람들 앞에서 나는 어떤 신학적 교리보다 먼저 저들의 아픔을 배워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세상의 절반이 저 차가운 바윗돌 하나를 차지하기 위해 서로를 증오하고 죽이고 있다. 그들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그 작은 바위 위에 가두려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곳에 계시지 않는다. 그분은 지금, 상하고 크게 뉘우치는 마음을 찾으신다.
이제, ‘알아끄사’의 문제는 절대 그 돌 언덕 위에서만 벌어지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나의 것'이라는 집착 앞에서 어디까지 잔인해질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거울이다. 어쩌면 우리가 모두, 내 안의 어딘가에서, 저 성전산 위에서 지금도 싸우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그러나, 해결책은 있다. 다만 그것은 어떤 협약이나 유엔 결의안 이전에, 한 사람 한 사람이 '저 사람도 나처럼 이 땅 위를 살아가는 존재'임을 받아들이는 데서 시작된다. 그리고, 기독교인으로서 나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묻고 싶다.
“우리는 왜 아직도, 그 돌무더기 앞에서 진짜 성전인 그분을 보지 못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