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제 에너지 시장 불안과 물가 상승 압력이 확대되는 가운데, 한국은행의 기후 대응 정책이 글로벌 흐름에 비해 뒤처져 있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특히 통화정책 영역에서 기후 리스크를 적극 반영하지 못하면서 장기적인 금융 안정성까지 위협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국제 경제 싱크탱크와 국내 연구기관이 공동으로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은행은 기후변화 대응과 관련해 다수의 연구 성과를 축적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 정책 이행에서는 제한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보고서는 중앙은행이 기후 위기에 대응하는 역할이 세계적으로 이미 일반화된 흐름이라고 설명한다. 기후 변화가 금융시장 불안정과 실물경제 충격을 동시에 야기하는 핵심 변수로 떠오르면서, 주요국 중앙은행들은 통화정책과 자산운용 전반에 기후 요소를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은행은 이러한 변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주요 20개국을 대상으로 한 평가에서 하위권에 머물렀으며, 아시아 지역 비교에서도 중위권 이하에 위치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정책 설계와 실행 간 괴리가 크다는 점을 보여주는 지표로 해석된다.
실제로 한국은행은 기후변화 대응 조직을 신설하고 관련 연구를 40건 이상 수행했지만, 초기 전략에서 제시한 핵심 정책은 상당수가 실행되지 않았으며, 녹색채권을 담보 자산으로 명확히 포함하는 방안이나 외화자산 운용에 ESG 전략을 통합하는 계획은 수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부분적 혹은 미이행 상태로 남아 있다.
또한 금융통화위원회 차원의 논의도 제한적이어서, 최근 1년여 동안 열린 회의에서 기후변화가 주요 의제로 다뤄진 사례는 극히 적었으며, 그마저도 단편적인 수준에 그쳤다. 이는 중앙은행 의사결정 구조에서 기후 문제가 핵심 변수로 자리 잡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보고서는 이러한 상황의 원인으로 세 가지 구조적 요인을 제시한다. 우선 ‘시장 중립성’ 원칙에 대한 경직된 해석으로, 특정 산업을 선별 지원하지 않겠다는 명분 아래 기존 자산 구조를 유지하는 방식이 결과적으로 탄소 집약 산업 중심의 시장을 강화하는 효과를 낳고 있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미흡한 녹색 금융 인프라로, 국내 녹색채권 시장은 규모와 신뢰성 측면에서 아직 충분히 성숙하지 못했으며, 분류체계 또한 국제 기준과의 정합성이 부족하다는 평가가 나온다.
세 번째는 보수적인 거버넌스 구조로, 정책 결정 과정에서 산업계와 금융권의 이해가 우선되는 구조 속에서 기후 의제가 상대적으로 후순위로 밀리는 경향이 존재한다는 분석이다.
이 같은 정책 지연은 경제 리스크로 이어져, 한국은행 자체 분석에서도 기후변화로 인한 금융 손실이 수십조 원 규모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그러나 현재의 정책 대응 수준으로는 이러한 충격을 충분히 흡수하기 어렵다는 지적이다.
특히 탄소중립 목표 달성을 위해 필요한 투자 규모와 실제 투자 간 격차가 큰 상황에서, 중앙은행의 역할이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탈탄소 전환이 늦어질수록 자산 가치 하락과 금융 불안정 위험이 동시에 확대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이에 보고서는 중앙은행 정책 전반에 기후 요소를 통합하는 방향의 전환을 제안하는데, 기후 위험을 외부 변수로만 보지 않고 금융 시스템 내부 요인으로 인식하는 ‘이중 중대성’ 개념 도입, 녹색채권을 담보 체계에 명시적으로 포함하는 정책, 녹색 금융 지원 프로그램 확대 등이 주요 제안으로 포함됐다.
또한 외화자산 운용 과정에서 탄소 배출 영향과 투자 구조를 투명하게 공개하고, 녹색 자산 비중을 확대해야 한다는 요구도 제기됐다. 아울러 통화안정채권을 활용한 녹색 금융 확대, 의사결정 구조 개편 등 보다 근본적인 변화 필요성도 강조됐다.
보고서는 한국 경제가 글로벌 기후 리스크에 노출된 구조를 고려할 때, 중앙은행의 적극적인 정책 전환이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라고 지적한다. 새로운 총재 취임을 계기로 정책 방향을 재정립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는 이유다.
기후위기는 더 이상 환경 영역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통화정책과 금융 안정의 핵심 변수로 자리 잡은 만큼, 한국은행 역시 기존 틀을 넘어서는 정책 혁신이 요구된다. 지금의 대응 속도로는 다가오는 경제 리스크를 충분히 관리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보다 과감한 전략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다.